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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둥빠 Mar 03. 2021

세 번 만에 드디어 본 셋째 얼굴

해외에서 한 번, 한국에서 한 번, 두 번 모두 소중한 가족을 지키는데 실패했다. 가슴이 찢어졌다. 아내는 나보다 강했다. 뱃속의 아이를 두 번이나 잃고 나니 셋째를 꼭 가져야겠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셋째를 가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찾아왔던 아이들이었다.     


해외에서 쌍둥이를 키우며 몸조리는커녕 몸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상태에서 임신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내에게 몸을 조금 회복하고 더 건강하게 만들고 나서 갖자고 설득했다. 아내는 본인 나이가 많아 그냥 빨리 갖고 싶다고 했다. 아내 이기는 남편이 어디 있나. 두 번째로 유산한 지 3달 만에 세 번째 셋째가 그렇게 찾아왔다.     

셋째가 찾아온 기쁨도 잠시였다. 나는 무서웠다. 아내에게 말은 안 했지만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다. 세 번이나 셋째 얼굴도 못 보고 잃을 수는 없으니까.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셋째의 출산 예정일은 회사 업무가 한창 바쁜 시즌이다. 예정일까지 셋째가 뱃속에서 잘 버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몸도 너무 망가져 있었다. 


안 그래도 해외에서 몸이 망가져서 한국에 돌아왔는데, 살인적인 업무량으로 치료조차 제대로 못 받았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유산을 한국에서 또 경험하며 마음도 무너져 있었다. 뱃속의 셋째도 걱정이었지만 내 몸과 마음에 대한 자신도 없었다. 버틸 자신이 없었다.     


몇 달을 고민했다. 육아휴직을 쓸까 말까. 아무리 예전보다 남자 육아휴직자가 많이 늘어났다고 하나 아직까지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육아휴직을 하면 회사 내에서의 평가도 좋지 않게 될 것이 뻔했다. 가장 큰 문제는 급여였다. 조금 알아보니 육아휴직을 쓰면 첫 3달은 150만 원 정도를 받고 나머지는 월 100~120만 원 정도만 받을 수 있었다. 1년 정도 육아휴직을 하면 총 마이너스 금액은 4,000만~5,000만 원 정도 될 것 같았다. 당장 생계가 걱정이었다. 5인 가족이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되는 돈으로는 당연히 살 수 없었다. 전세대출 이자만 100만 원이었다.     


아내와 태어나게 될 셋째, 쌍둥이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내가 육아휴직을 하는 것이 맞았다. 그렇지만 회사에서의 평판, 인사평가, 급여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 못 이루는 혼자만의 고민이 몇 달 동안 이어졌다. 아내와 종종 대화도 하고 아내의 의견을 듣기도 했지만 결정은 내 몫이었다. 본가와 처가의 도움은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내가 육아휴직을 하고 돌보거나 도우미 이모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하다 결국 나는 육아휴직을 하기로 결정했다. 두 번이나 셋째들의 얼굴도 못 봤는데 세 번째 셋째는 꼭 지키고 싶었다. 물론 임신 기간 중에는 아내가 잘 버텨야겠지만 임신 막바지부터 출산 이후에는 내가 곁을 지킬 수 있는 스케줄이었다.     


회사에 육아휴직을 통보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아침 먹고 출근 전에 나는 마지막까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진짜 육아휴직을 하는 것이 맞는지...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한 마디 했다.


육아휴직 쓸지 말지를 고민하지 말고,
그 기간을 어떻게 잘 보낼지 고민해.   


역시 아내가 나보다 강했다. 이미 육아휴직을 쓰기로 결정했는데 나는 아직도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아내의 한마디에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출근해서 회사에 육아휴직을 통보했다.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왜? 육아휴직 쓰려고 하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팀장님은 이미 눈치를 채고 계셨나 보다. 내가 정말 존경하는 팀장님이었다. 팀장님이 아니었다면 육아휴직을 결정하는데 덜 힘들었을 거다. 이렇게 좋은 상사를 모시기는 쉽지 않으니까. 옆에서 더 배우고 함께 일하고 싶었던 분이다. 아무튼 팀장님과 짧게 면담을 하고 육아휴직을 쓰는 것으로 인사팀에 통보했다.  

   

그렇게 떠나고 싶었던 회사였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팀원들이 정말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내 커리어의 갈림길에서 원래 가려던 길과 다른 길을 선택하는 순간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 미묘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직장 동료들 중에는 싫어하는 사람, 부러워하는 사람, 응원해 주는 사람.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속내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알 필요도 없다. 나에게는 소중한 가족들이 직장 커리어보다 중요하니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육아휴직 통보 후 시간은 더디게 갔다. 임신 32주 차 정도에 내 육아휴직도 시작되었다. 다행히 뱃속의 셋째도 잘 컸다. 아내도 새 생명을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산부인과 검진은 계속 정상이었다. 감사했다.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정말 감사했다.     


보통 둘째는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난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첫째 둘째를 쌍둥이로 낳았으니 실질적으로 이번 셋째는 두 번째 출산이었다. 예정일이 가까워 오는데 전혀 신호가 없었다.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의사 선생님도 조금 의아해하셨다. 그렇게 예정일이 지나갔다. 기다리던 셋째는 계속 나오지 않았다. 결국 유도 분만을 하기로 했다.      


6시간 30여 분간의 진통 후에 셋째가 세상에 나왔다. 2020년 10월 28일 오후 4시 37분에 세 번째 꼬마 공주님은 우리 부부에게 얼굴을 보여줬다. 세 번 만에 얼굴을 보여준 참 비싼 녀석이었다. 아무런 문제 없이 건강하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 울음소리를 듣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이렇게 나는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큰 감동 이런 건 없다. 셋째의 울음소리와 함께 그동안 내가 속으로 삼킨 눈물들이 터져 나왔어야 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는 내 인생의 지나간 수많은 실패들은 셋째의 탄생과 함께 전반전이 끝났다.      


물론 앞으로의 후반전에도 실패를 많이 겪을 거다. 그건 이제부터 기록해 나갈 것이다. 내 실패 스토리를 읽어주시는 분들 중에 성공 스토리 아니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종종 있었다. 아직까지는 내 인생에 특별한 성공은 없다. 성공 스토리는 이제부터 만들어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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