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산시장 분석 #4: 대안편
부동산 쏠림현상이 국민들의 자산접근성과 경제활력을 저해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부동산 쏠림을 완화할 수 있을까? 부동산 시장 차원에서의 노력도 당연히 필요하다. 최근 발표된 정부의 수도권 아파트 대규모 공급계획도 넓게 보자면 서민들의 자산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동산 쏠림현상이 부동산 시장을 넘어선 자산시장 차원의 문제라는 점을 기억하자. 부동산 시장만의 해법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메타 상으로 부동산의 상대적 우위가 계속되는 한 자본은 다시 몰려오고 쏠림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일시적 집값 안정만 아니라 국민의 자산접근성 확대와 생산성 향상을 꿈꾼다면, 해법은 자산시장 전체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는 자산군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고, 접근이 쉽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선, 개인들이 소액이라도 자유롭게 투자하고 자산을 증식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투자처를 찾지 못 하고 맴도는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을 생산성에 보다 기여할 수 있는 자산에 투자되도록 물꼬를 터주자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부동산 쏠림현상을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메타의 실마리는 증권시장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증권시장은 부동산 시장에 비해 경제성장에 훨씬 더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혁신기업은 IPO나 증자를 통해 새로운 사업 진행을 위해 필요한 자본을 조달할 수 있다. 임직원 입장에서도 스톡옵션은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일할 유인이 된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주식은 부동산에 비해 접근성이 높다. 계좌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기업의 일부를 소유하고 배당도 받을 수 있다. 사실 기업만 잘 고른다면 장기적으로 수익률도 부동산보다 낫다.
실제로 정부는 이미 ‘부동산 투자자금의 코스닥 시장 유입’이라는 관점에서 정책을 추진 중이다. 2018년 1월 관계부처 합동 “코스닥 시장 활성화를 통한 자본시장 혁신방안”을 출발점으로, 코스닥 벤처펀드 관련 규제 완화와 세제혜택 부여, 기관 투자자의 코스닥 투자확대를 위한 펀드 조성 및 혁신기업의 상장요건 완화 등이 추진되었다. 최근엔 소부장 펀드 등 관제 펀드들도 대거 출시되어 소비자들의 선택권도 과거에 비해 풍부해졌다.
하지만 서민 입장에서 이러한 정책이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부동산에 대한 접근성을 가로막는게 높은 가격이라면, 주식에 대한 접근성을 가로막는건 정보격차이다. 애초에 일반인이 내부자가 가진 고급정보를 접하기란 불가능하다. 펀드 가입은 뭔가 믿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재무제표나 가치투자 공부는 너무 멀게만 느껴지니 리딩방이나 차트에 의존한다. 현실은 이럴진데 정책의 초점은 전문 투자자들에게 맞춰져 있었던지라 대중들이 보유한 단기부동자금을 유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개인자금의 주식시장 외면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벤트로 크게 흔들린 일이 있었으니- 바로 2020 코로나 사태와 동학개미운동이었다.
코로나와 유가폭락으로 인해 꿈도 희망도 없던 2020년 초 한국 주식시장의 구원투수는 단연 개인투자자였다. 평소 나만 없는 삼전 주식의 떡상에 배아파 하던 개인들이 코로나 사태로 시장이 폭락하자 쌈짓돈을 들고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통상 시장에서 개미들의 매수행렬은 하락을 예고하는 인간지표로서 조롱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다. 문제는, 이번 개미들의 행렬은 금액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는 것이다.
코스피가 순식간에 10년 전 가격으로 돌아간 1~3월, 시장에는 30조원에 달하는 개인자금이 흘러 들어왔다. 외국인과 기관의 썰물 같은 매도행렬에도 개인들은 지수 회복을 견인했다. 기관과 외인에게 털리기 일쑤던 개미들이 국난을 앞두고 단지 한국경제 펀더멘털에 대한 확신만으로 전장에 뛰어드는 모습은 어벤저스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반면, 부동산 시장은 코로나로 인한 유동성 경색국면을 이겨내지 못하고 몇 년 동안의 상승랠리를 멈추는 현상이 나타났다. 때마침 여당의 압승으로 끝난 4.15 총선결과와 맞물려 강남을 비롯한 과열지구 주택가격은 하락추세로 접어들었다. 실로 몇 년만에 부동산과 주식의 상황이 바뀌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코로나로 촉발된 동학개미운동의 끝이 우금치 전투가 될지 한국판 개미혁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결과는 그리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개인들이 누구도 시키지 않은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보유자산 형태를 ‘부동산->주식’으로 전환하는 집단적 선택을 감행했다는 점이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작금의 자산 쏠림현상이 해소될 수 있다는 여지를 다소 과격하게나마 실제로 증명한 것은 정부도, 외인도 아닌 개미들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변하면 부동산 쏠림현상도 완화될 수 있고 한국 금융시장의 스케일업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희망을 국민들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지금이다. 이러한 흐름을 장기적으로 이어 나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증권시장 매력도와 신뢰성 강화 + 정보접근성 확대' 패키지로 다음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미시적으로는 주주 자본주의 강화 및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강화
2) 거시적으로는 통화스와프 대폭 확대 등을 통한 환율 리스크 완화
3) 보다 급진적으로는, ISA제도 대폭 강화를 통한 ‘기본자산 서비스’ 제공
우선, 미시적으로는 경영을 못 하는 오너의 경영권을 위협할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두산, 한진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무능하더라도 경영권을 세습 받을 수 있고 경영을 잘못 하더라도 국가의 지원으로 언제든 회생할 수 있다는 안일함이 만연해 있다. 경영실패에 따른 리스크는 개별 주주들이 뒤집어 쓰고, 이미 핏줄로 정해진 ‘후계자’가 기업 생산성 향상이 아닌 형제들의 난과 사내정치로 경영권을 ‘세습’하는 후진적 경영문화가 계속되고 있다.
오너가 후계경쟁에 몰두하는 대신 위탁 받은 자본의 두려움을 알고 도덕적 해이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면 주주자본주의의 확고한 정립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론, 20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재추진할 필요가 있다.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이익 보호를 명시하고, 집중투표제와 전자투표제를 의무화하고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을 통한 소액주주들의 권한 강화를 추진할 수 있다. 아울러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자회사-손자회사 의무지분율을 상향하고 사익편취 규제대상을 확대하여 신사업 진출을 명목으로 총수 일가의 사적 영리추구가 가능한 범위를 축소해 나가야 한다.
물론 논쟁은 있다. 기업 경영권에 지나친 침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주식투자를 해본 사람은 알리라.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재계 말대로 '반기업 정서'와 행동주의 펀드들의 '경영권 위협' 때문이 아니라, 경영권을 전횡하고 스스로 기업이 쌓아온 신뢰를 깎아먹는 '오너 리스크'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기업들이 반기업법, 기업 때리기라는 수사로 일관하면서 스스로 신뢰와 경영역량을 높이려는 노력을 도외시하는 한, 한국 금융시장의 스케일업이 요원한 이유다.
또한, 최근 이슈가 되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대폭 확대하여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에 나서는 것도 효과적이다. 국민연금은 주주들의 이익을 위협하고 생산성이 아닌 지대를 추구하는 오너들에게 경영권 위협의 매운맛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체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국가권력의 기업경영권 개입’이라는 프레임으로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국민연금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여 해결할 문제다. 오너의 전횡을 방관하고 합법적인 의결권 행사를 올바르게 사용할 생각조차 안 하는 게 오히려 자본주의에 더 큰 위협 아닌가?
자유시장경제와 재벌 독점체제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 상황이다. 기업의 자본이 재벌의 사적 이익이 아닌 생산성 혁신에 투자되도록 유도하고, 그로 인한 이득을 소수 재벌 혈족이 아닌 국민 전체가 누리도록 하는 데는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가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거시경제적으로는 통화 스와프 적극 확대 등을 통한 환율 안정성 확보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어느덧 중견 선진국 위치에 들어섰음에도 한국은 여전히 외환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통화 불안국’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캐나다, 일본, 스위스, 영국 그리고 EU는 외환위기 걱정 없는 정책운용이 가능하다.
한국 주식시장의 진정한 스케일업은 앞선 국가들에 준하는 정도의 환율 안정성이 담보되기 전에는 어렵다. 일단은 외환위기 걱정이 없어야 외인이고 개인이고 주식시장에 맘 놓고 장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높아진 경제적 위상을 바탕으로 미국과의 무제한 통화스와프나 그에 준하는 협정을 추진하고, 한국 국채의 국제시장에서의 담보력을 강화하는 방안 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각종 악재가 겹쳤던 올해 초 미국과의 긴급 통화스와프 체결이 금융시장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최근 코로나 사태 속에서 수요가 급증하며 신뢰성을 입증한 한국 국채의 국제적 활용도를 높이는 것도 장기적인 환율 안정성과 국내 자본의 해외진출 가능성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국채 유통량이 늘어날 경우 유사시 일시적인 자본 유출입 규모는 오히려 확대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관리는 별도로 필요할 수 있다)
향후 한국은 선진적 방역, 의료 서비스나 안정적 제조업 역량, 높은 위기관리 능력을 활용하여 중견국가로서 국제사회에 필요한 공공재를 제공해 나가는 반대급부로 안전자산으로서의 원화 위상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직접적인 증권시장 혁신방안은 아니지만 고질적인 환율 불안정성을 완화하고 한국 기업들의 밸류에이션을 몇 단계 높이기 위해선 필수적인 노력이다.
마지막은 ‘자산 접근성’ 측면에서 보다 급진적인 제안이다. 바로 ‘기본자산’ 제도의 도입이다. 청년기에 모든 국민들에게 시드머니(Seed Money)를 주어 이를 불려나갈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제도다. 이미 노아 스미스(Noah Smith) 같은 경제학자가 제안한 바 있고 미국에서는 활발하게 논의되는 정책이다. 최근 피케티 역시 일정 나이가 되면 국가에서 종잣돈을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기본자산 논의에 힘을 보탰다.
이러한 흐름의 배경에는 노동보다 자본이 돈을 버는 경향성이 앞으로도 지속되리라는 전망이 있다. 앞서 살펴봤듯 점점 노동보다는 지식과 자본이 경제성장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근로소득의 직접적 향상보다는 청년층의 자산 접근성을 대폭 확대하는 것이 불평등 해소에 보다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대신 단기간 현금화를 제한하여 장기투자를 통한 자산가격 상승이득을 누릴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보완사항으로 제기된다.
사실 한국에서도 이미 제한적이나마 기본자산 제도가 시행 중이다. 정부가 2016년 도입한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나, 올해 4월부터 도입된 '청년저축계좌'가 바로 그것이다. 장기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일정기간 현금화를 제한하고 발생한 소득에 대해 세제지원이나 추가적립 등 정부 매칭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기본자산 제도와 결을 함께 하는 제도들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는 존재한다. 소액이라도 저축할 근로소득이 없거나 금융지식이 부족한 학생, 노인들은 여전히 자산형성의 기회에서 소외되기 쉽다. 제한된 혜택으로 가입자들의 만족도도 그리 높지 않다. 실제로 ISA의 경우, 2019년에는 누적 가입자수가 오히려 5만명 정도 줄기도 했다.
국민 대다수가 자산가격 상승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게 한다는 제도의 취지를 달성하려면 가입범위를 대폭 확대하고 비과세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예 웬만한 국민들은 모두 ISA 계좌를 터주고, 비과세 혜택 대신 아예 상당한 금액을 종잣돈으로 주는 방법도 고민할 수 있다. 국가경제 성장에 대한 구성원의 지분, 일종의 스톡옵션을 온 국민에게 지급하자는 것이다. 최근 여당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ISA 개선방안인 KoLIA(국민자산관리계좌) 제도 도입이 상당히 고무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한편으로 기본자산 제도는 주식시장의 근본적인 문제인 '정보격차'를 해소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투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무지는 개인들의 자산접근성을 막는 큰 장벽 중 하나다. 만약 국민들에게 기본자산 계좌를 모두 터주고, 선택가능한 투자옵션에 최근 소부장 펀드같은 유망 중소기업 펀드를 추가하면 어떨까. 국가적 차원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투자상품을 홍보하고 보증하여 신뢰도도 확보하면서 성장성 있는 분야에 대한 장기투자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자산 제도는 점점 자산형성이 어려워지는 청년층의 자산접근성을 대폭 높여주고, 확보한 자본을 보다 생산적인 분야에 투자하는 선순환을 국가가 일정부분 대행하는 제도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개인들이 저축에 따른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는 국민연금보다 훨씬 ‘자산 접근감’을 높이고, 투자원리와 금융시장 이해도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세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은 경제구조상 가계의 부동산 보유비중이 매우 높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2. 부동산에 치우친 자산구조는 자산불평등 심화, 성장률 하락, 가계 노후자산 리스크 등으로 이어진다.
3. 동학개미운동을 계기로 자산접근성을 확대하고 한국 금융시장 스케일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부동산에서 출발해서 먼 산으로 온 느낌이긴 하지만, 국가의 정책목표는 단순히 집값 안정이 아니라 국민들의 자산접근성 확대와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개별시장 차원의 미시적이고 전술적인 접근이 아닌 자산시장 전체 차원의 거시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러한 메타 접근이 이뤄질 때 비로소 시민들이 근로소득 뿐만 아니라 자본소득을 통해서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