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태그플레이션과 달러가치의 위기
메타버스와 비트코인의 시대, 금 투자는 자칫 구시대의 유물로 비춰질 수 있다. 소위 디지털 금으로 불리는 비트코인까지 나온 마당에 굳이? 나도 바텀업 투자를 선호하던 사람이라 금 투자에는 회의적이었던 적이 많다. 하지만 최근 생각이 좀 바뀌었다. 앞으로 수년간, 매크로 변수의 흐름이 어느 정도 예측가능하다면 그 흐름을 타는 투자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단 금이 어떤 자산인지 알아보자.
- 금은 희소한 자원이고, 통념과 달리 반도체 등 실물생산에 투입되어 소모되는 자원이다.
- 금은 가치저장 수단이면서, 경제에 꼭 필요한 '신뢰'를 공급하는 자원이다.
- 금은 인플레이션 시기, 특히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반되는 스태그플레이션 시기에 강하다.
위 사실들로 유추하면, 금 가격은 1)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예상되고(스태그플레이션), 2) 글로벌 경제에 신뢰를 공급하는 대체자원인 '달러'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3) 글로벌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4) 각국 중앙은행 등 장기투자자의 수요가 늘어날수록 상승하게 된다.
그럼 향후 2~3년 이상 위와 같은 트렌드가 계속될 수 있을지 살펴보자.
1. 경제메타의 변화: 스태그플레이션
2008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를 지배한 시장경제게임의 메타는 ‘디플레’였다. 중국의 압도적인 공급력과 세계화, 아마존 등 IT기업들의 가격혁신 등으로 인한 저물가 기조는 1970~80년대 이후 2010년대까지 오랜기간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메타가 바뀌고 있다.
- 전 세계, 특히 중국의 고령화로 인해 노동자원이 감소하고 공급역량이 감소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이 '공동부유'로 소득증대와 내수진작을 중시하면서 '값싼 중국'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 전 세계적 고령화도 심화되면서 노인부양 비용이 급증하고, 납세가능한 생산가능인구는 줄고 있다.
- 전 세계적으로 자유시장경제가 확산되고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각국 국민들이 정부에 대해 강력한 재분배 요구를 이어가고 있다. 좀더 직설적으로, '포퓰리즘'이 확대되고 있다.
- 미중경쟁이 점점 더 거칠어지면서 세계화가 약화되고 있다. 비용이 아닌 국제정치가 무역의 흐름을 결정하면 공급비용은 점차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체제경쟁은 국방비, R&D 투자도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 코로나 이전의 양적완화는 은행, 기관 등 소수 집단에게만 유동성 접근을 허락하여 유동성 재창출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반면, 코로나 대응을 위한 양적완화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돈이 고여있지 않고 실물시장에서 유통될 여지가 훨씬 커졌다는 뜻이다.
- 기존 탄소중심 경제체제가 친환경 체제로 급격히 바뀌면서 전환비용이 급증하고 있다.
나는 위 이유들로 향후 2~3년은 코로나19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인플레이션을 목격하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2. 미국 부채위기와 금리인상 한계
미국의 강건한 소비는 그동안 글로벌 경제의 성장을 굳게 지탱해 왔다. 하지만 미국도 고령화가 점차 심화되면서 노인부양비용과 사회복지지출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 MZ세대는 국민연금 혜택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품고 있고(한국도 마찬가지), 세금부담이 늘어나리라 예상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과거 세대보다 일찍 노후를 대비하면서 소비에 적극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인플레이션 상승도 소비에 악영향을 미친다. 식품, 에너지 등 필수재 가격이 상승하면서 소비여력은 더욱 위축된다. 여기에 명목금리까지 높아지며 가계와 정부의 이자부담도 가중된다.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를 거치며 누적된 정부부채는 재정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 특단의 생산성 혁신이나 소득증대가 없는 이상 가계와 정부의 소비여력이 극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누적된 부채는 정부가 명목금리를 극적으로 상승시키기 어렵게 만든다. 금리 급등은 미국정부 이자지출의 급증으로 이어져 바이든이 내세운 온갖 정책공약을 무효화시킬 뿐만 아니라, 당장의 실업급여 지급 중단은 물론 자산가격 급락으로 인한 연금지급 위험성 증대, 좀비기업 일제 도산으로 이어지게 된다. 고용확대와 대규모 환경투자, 중국에 맞선 대규모 재정투자 공약을 내세운 바이든 정권이 고용과 경기를 일시에 박살낼 수 있는 급진적 선택을 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인플레이션은 높아지는 가운데 소비증가율은 정체되고, 명목금리는 상승하나 물가상승률은 따라잡지 못하여 실질금리는 상당기간 정체되는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는, 금에 유리한 환경이다.
3. 미국 달러의 쇠퇴와 글로벌 불안정성 증가
경제가 성장하고 유지하기 위해선 많은 자원들이 필요하다. 노동력, 원자재, 자본재, 석유와 같은 에너지 자원이 실물자원이라면, 이 모든 걸 아우르는 건 바로 한 국가의 화폐로 대표되는 신용자본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일에 전념하고, 집에 와서 다음날을 기약하며 안심하고 잘 수 있는 것은 한달 뒤 다가올 월급날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화폐 지급과 유통이 원활하게 이뤄지고, 그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거라는 신뢰는 경제를 계속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밑천이 된다.
이제, 그동안 세계경제를 지탱해 오던 달러의 신뢰자본이 위기에 처해가고 있다. 금융위기와 코로나를 거치며 미국은 대공황급의 급격한 조정 대신 막대한 재정투자와 대량의 달러공급을 통한 위기대응을 선택했다. 그 결과 미 정부의 부채는 2차대전 이후 최악의 시기였던 1946년의 119%를 넘어선 140%로 급증했고, 선진국 전체로 넓혀도 2021년 국가채무는 GDP 대비 25% 수준으로 2차대전 시기를 넘어섰다.
이렇듯 급격한 부채증가에도 기축통화라는 달러의 이점으로 인해 자산시장은 큰 조정 없이 상승을 이어오고 있는데, 만약 미국의 소비와 성장 정체가 가시화되고 미국 자산을 보유한 각국 연기금 등 기관들의 상환 요청이 강해질 경우 미국 정부와 연준이 가진 밑천에 대한 의문은 강해질 것이다. '미국이 망하면 전 세계가 망하는데'라는 말이 통념처럼 퍼져있지만, 자산시장에서 통념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임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해 왔다.
간단히 생각해서, 중국의 부상에 따라 미국이 차지하는 실물경제 비중은 계속 감소하는 반면, 전세계 자본이 어느 때보다 많이 미국 자산시장에 유입되면서 미국 정부와 연준이 책임져야할 자산 커버리지는 연일 늘어나는 상황이다. 문제의 복잡성과 리스크는 그 어느때보다 커져 있는데, 이를 다뤄야 할 미국 정부와 연준의 역량은 과거에 비해 그리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고, 연일 계속되는 재정적자로 인해 정책도구(tools)도 제한적인 상황이라는 뜻이다.
전 세계 단일 패권국가로서 압도적 기술력과 무역 경쟁력, 중산층의 무한한 공급을 자랑하던 20세기 중반 미국과 지금 미국은 너무나 다르다. 2008 금융위기 이후 엘리트들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신뢰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극심한 양극화로 사회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고, 국회의사당이 폭도들에게 점령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로서의 미국의 입지는 앞으로도 굳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선은 계속 확대되는 가운데, 무역적자는 점점 심화되고, 국내의 정치적 분열과 엘리트 불신은 심해지는 상황에서 미국 달러의 영향력이 예전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이는 대체 안전자산인 금으로의 자본 도피가 일어날 가능성을 높여준다.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202101642011
4.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금 매입 증가
마지막으로, 전 세계 중앙은행들의 달러 의존도 하락 및 금 매입 추세다. 한 국가의 경제를 책임지는 최고 엘리트들의 의사결정이 상당히 오래 전부터 특정 방향성을 따르고 있다면, 그 흐름에 동반해 보는 것도 성공률 높은 베팅이라고 생각한다.
https://www.yna.co.kr/view/AKR20211226033800073?input=1195m
위 이유들로 2021년 11월부터 나는 난생 처음으로 국내 금 거래소 계좌를 터서 금 현물을 조금씩 포트에 담기 시작했고, 올해 초부터는 미국에 상장된 금광기업 상장주식도 일부 포트에 포함시켰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와 맞물리면서 금 가격이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이런 일시적 요인은 차치하더라도 향후 금 가격의 상승 여력은 훨씬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단기적 모멘텀을 좇는 성향의 투자자라면 모르지만, 나같이 게으른 성향의 사람은 2~3년 이상 지속될 추세를 보고 베팅하길 좋아한다. 금 투자를 시작한 이유도 지금 추세가 단기 이벤트가 아닌 장기적 트렌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사태 자체도 미국의 달러 단일패권의 하락과 국제적 불안정성 심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추후에 별도로 한번 다룰 예정이다)
당연히도, 금을 팔아야 할 변곡점도 존재한다.
1.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 혹은 실질성장률 회복을 통한 달러 가치의 회복
2. 미국과 중국의 극적인 협상타결과 협력체계 강화를 통한 세계 경제질서 회복
3. 암호화폐의 질적 향상에 따른 보편화, 특히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CBDC의 확산을 통한 신뢰자본 공급
위 시나리오들 모두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고 세계경제에 신뢰자본을 대량으로 공급해주는 이벤트들이다. 이런 이벤트가 발생하면 금의 상대적 매력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비중을 축소하는 것이 옳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이벤트들이 상당기간 발생할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하지만 시장은 항상 예상과 달리 움직이므로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