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건져 올린 기억
섭씨 37도에 육박하는 폭염,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에도 어느새 몸에 물기가 한가득 새어 나오고 잠시 엉덩이를 붙일 공간에 자리를 잡자마자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이마에서 귀밑머리를 타고 턱에 이른 땀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후우" 내뿜는 숨은 체온보다 더 데워진 뜨거운 열기가 되어 얼굴에 다시 부딪혔다 흩어진다. 이런 날 더위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떠오는 과거 어느 날의 기억이다.
옥탑방, 화장품 상점과 주점 그리고 노래방이 들어선 5층 건물의 꼭대기에는 간신히 비만 피할 수 있을 지붕이 덮혀진 쓰러질듯한 작은 방한칸 짜리 공간이 있었다. 바닥과 턱이 져 겨우 쭈그려 앉을 수 있는 구들 옆에 부르스터 하나와 선풍기 하나가 살림의 전부다.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그곳에 대기해야 하는 노래방 아줌마, 사람들은 '경'을 그렇게 불렀다. 노래방에서 일하는 서너 명의 젊은 남자 직원들의 삼 시 세 끼니를 챙기는 것이 그녀의 주업이었는데, 말이 세끼 식사지 달랑 하나 있는 부르스터에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만들어 쟁반에 담은 채 계단을 내려와 건네주고 다 먹은 식기들을 다시 쟁반에 챙긴 후 올라와 옥상 한 구석의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수 물로 닦아내는 것만으로 하루 일과가 꽉 찼다. 그나마 잠시 짬이 나면 체감으로는 40도가 넘는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공간에서 더운 선풍기 바람에 의지해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숨을 고르곤 했다.
딸이 하나 있었다. '경'에게는. 당시만 해도 드물었던 무남독녀 외동딸. 사람들은 '금이야 옥이야 얼마나 귀하게 컸겠느냐'라고 했지만 이제 갓 대학생이 된 그녀의 딸은 학기 중에는 장학금을 타기 위해 기를 쓰며 공부를 하고 방학이면 모자라는 등록금을 마저 채우기 위해 하루 종일 호프집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다 퉁퉁 부운 다리를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경'이 찜통 같은 옥탑방에서 매일을 보내도 군소리 하나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러니까 엄마 잘못 만난 딸 때문이었다.
딸은 가끔 그녀가 일하는 노래방에 들렀다 가곤 했다. 우연히 '경'이 일하는 노래방의 사장과 딸이 일하는 호프집의 사장이 인연이 있는 사이였기에. 노래방 사장은 나름 명동과 종로에 노래방과 호프집을 여러 개 운영하는 알부자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딸이 일하는 호프집의 사장은 젋었을 때 그의 밑에서 레스토랑 겸 주점의 지배인으로 일했단다. 오랜 시간 변함없이 똑 부러지게 일하며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호프집을 내려고 할 때 노래방 사장이 통 크게 그 밑천을 보태준 이후로 줄 곧 가깝게 지낸 모양이다.
'경'이 노래방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음에도 딸은 굳이 일없이 찾아가진 않았는데 그날은 다 먹은 식기류를 주섬주섬 챙겨 옥탑방으로 가려는 차에 호프집 사장의 심부름 때문에 들렸다가 마주쳤다. '경'은 주머니를 뒤져 푼돈을 꺼낸 후 자판기에서 시원한 음료를 여러 개 뽑아 노래방 청년들에게 쉬엄 쉬엄 하라며 건네고 남은 음료수를 딸에 손에 쥐어 줬다. "너도 목 좀 추기고 갈래?" 딸은 자기 또래의 남자 종업원들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쭈삣거리다 엄마의 뒤를 따라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경'은 "너무 덥다"는 말만 반복하는 딸 앞으로 선풍기를 돌려놓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딸을 쳐다보다 노래방 청년들이 아들뻘이라 이왕이면 잘해주려고 애쓰고 있어서 나름 그들도 자신에게 잘하려고 한다며 '나는 제법 잘 지낸다'는 말을 에둘러 늘어놓았다. "힘들..." 엄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남은 음료를 단숨에 들이 켠 딸은 벌떡 일어나 '경'을 흘깃 쳐다보는 듯 마는 듯 "이따 봐. 더워서 못 있겠다"라며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황급히 호프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래 어... 여가" 그제야 '경'은 선풍기를 다시 제자리로 돌리고는 좁은 공간에 쭈그리듯 기대며 뻐근한 허리를 두드렸다.
성급히 엄마를 등지고 호프집으로 뛰어 돌아온 '경'의 딸은 하루의 남은 시간 동안 전에 없던 짜증이 나서 못 견뎌했다. 갑작스럽게 허드렛일을 하던 엄마와 마주친 것 때문인지, 더운 날 심부름을 시킨 호프집 사장 때문인지, 아니면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찜통이던 옥탑방에서 연신 땀을 흘려 찝찝해진 몸뚱이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집에서 다시 만난 엄마에게 '왔냐?'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뾰로통하게 있었고 '경'은 왠지 모를 눈치만 연신보다 딸의 늦은 저녁을 챙겨주고 남겨진 집안일을 잽싸게 해내고는 "무슨 일 있었냐?"라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피곤에 지쳐 코를 골며 잠이 들어버렸다.
"힘드냐고 물어보긴 뭘 물어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뾰로통하게 내뱉는 딸의 말을 '경'은 들었을까? "종일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 놓는 호프집에 있는데 뭐가 힘들겠어. 더운 건 고사하고 춥다 추워" 딸의 턱이 실룩거리는 것을 '경'은 보았을까?
"그게 사람 있으라고 만든 곳이야? 거기서 종일 왜 그러고 있어. 나쁜 새끼들. 젊은 놈들이 찬바람 쐬며 노래방에 쳐 앉아 있으면서도 무거운 쟁반 한 번을 안 들어주고 더운 날 잠시라도 열 좀 식히라는 말 한마디 안 하면서 건네주는 음료수는 넙쭉 넙쭉 잘도 받아 마시더라. 그런 놈들인데 아들뻘이라 잘해주긴 뭘 잘해줘" 그런 말이라도 했어야 하는 걸까? 아니 남이야 그렇다고 치고 "이렇게 더워서 어떡해. 힘들지?"라는 말이라도 했어야 되었을 텐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딸이라면.
그 한마디를 못해서 무더위로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만 되면 문득문득 눈에 땀이 차 오른다.
'경'의 딸이라서. 다시 못 보는 엄마 생각이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