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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Oct 13. 2020

무난할 수 있는 권리

무던하거나 무심하거나


넌 무난한 삶을 살게 될 거야


  꽤나 오랜 전, 나의 미래가 궁금해지는 날이면 소위 말해 '운세를 알려준다'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혼자 가기에는 멋쩍어서 대부분 지인과 함께 가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렇게 한결같았다. 대게 나보다는 나와 같이 온 지인에게 더 관심이 많다고 해야 할까? 지인의 운세를 한참 이야기하고 나서 나는 "아참! 너도 있었구나!" 하며 곁다리로 훑어주고 마는 식이었다. 운을 봐주는 사람이 무성의하다고 싶기도 하고 돈이 아까운 마음에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싶기도 했다.


그놈의 무난이란, 대체 무난하다는 게 뭘까?


1. 별 어려움이 없다.
    (예: 예심을 무난하게 통과하다.)
2. 이렇다 할 단점이나 흠잡을 만한 것이 없다.
    (예: 무난한 연주)
3. 성격 따위가 까다롭지 않고 무던하다.
    (예: 그는 성격이 무난해서 친구가 많다.)
비슷한 말
무던하다. 쉽다. 수월하다. 어지간하다. 원만하다. 용이하다. 평범하다. 안전하다. 괜찮다. 수수하다.


  사전적인 정의는 이랬다. 대략 한눈팔고 걸어가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어지간해서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의 기억에 좋던 나쁘던 두고두고 남을 만큼의 인상을 주기에는 뭔가 좀 모자란,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웬만해서 싸울 일도 없지만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일도 많지 않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딱히 나쁘다고 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게 좋다고 하기에도 부적합한 뉘앙스다.



그래서 내 삶은 어디가 어떻게 무난하냐고!



별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도전하는 것에 있어서 실패가 적을 만큼 운이 좋다는 것일까?


  삶을 살면서 몇 번의 중요한 시험에 있어서 목표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 적은 거의 없었다. 대학 입시가 그랬고 채용면접이 그랬으며 연애와 결혼이 그랬다. 일단 '치러 보겠다'라고 마음먹으면 원하는 방향의 결과를 얻었다. 처음에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생각은 "나의 목표가 내가 무리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수준을 지향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을 무릅쓰고 밀어붙이고 있는 것에 대한 부담감 또는 결국 실패한 후에 내가 겪어야 할 좌절감을 예측하고 되도록이면 그 길을 피해 가려했는지도 모른다. 도전은 하는데 궁극적으로 원하는 지점보다는 살짝 한 단계 낮은 난이도의 결과를 표적으로 삼는 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나는 그것을 해 왔는지도. 그저 실패하고 싶지가 않고 괴롭고 싶지가 않아서.


  때로는 '실패를 감내하고 실행할 만큼의 삶의 여력이 내겐 없다. 실패 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내게는 적다'는 이유를 대며 내게 부담을 주는 실체 없는 타인을 만들어 내거나, '이 정도도 나쁘지 않잖아. 너무 치열할 필요 없으니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말자'며 나와 판박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수호신을 세워 두기도 했다. 자체적 타협 모드는 시기적절하게 작동했다.


  여하튼 그 덕에 삶의 몇 군데는 무난하게 통과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 바람에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데 타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실패가 적다는 것이 운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걸어온 길이 어쩌다 보니 쉬웠던 게 아니라 쉬운 길을 찾아 걸어온 까닭이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쉬운 길이 아니라면, 어려운 길이고 그것을 이겨냈을 때에만 삶은 더 가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삶의 가치란 쉽고 어려운 것과 관계가 없는지도 모른다. 좀 더 힘겨웠으면 좀 더 가치가 있는 듯 생각하는 것이 힘겨움에 대한 자기 보상의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반드시 뭔가를 이루려는 게 누구에게나 유효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뭔가의 기준을 놓고 넘거나 넘지 못하는 일이 없다면, 그런 기준 자체가 없다면 쉬울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 것 아닐까. 더군다나 그 기준이란 것이 절대적으로 생성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발을 딛고 살아온 세상의 흐름이 나라는 개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을까?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은 후에도 나의 일을 계속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것이 뭐 어려운 일인가 싶을 수 있지만 내가 그것을 선택해야 할 시점에는 당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여 겉으로는 지향하는 듯 속으로는 지양하는 암묵적인 이중 잣대가 만연하던 일종의 과도기, 세상을 거스르려면 쉽지 않았을 터였지만 어쨌거나 과도기의 끝은 지향과 닮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뭘 한 것이 딱히 없어도 세상은 지향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다만 내가 선택해야 할 그 시점에 흐름이 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일 뿐이다. 내 경우에는 전자였다. 혼자 벌어서는 답이 나오기 힘든 시대라는 인식의 발현된 건 그런 것이었다.


  비슷한 예로 직장에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일을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일상을 만끽하고 싶어 했을 때 세상은 워라벨을 이야기했고, 미래의 업과 상관없이 관심이 생기는 것에 대해 연령과 현실이 주는 한계성을 무시하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을 때 세상은 평생교육 또는 사회적 재교육을 이야기했다. 타인과의 관계에 얽매이기보다는 조금은 이기적이더라도 내 삶을 즐기고 싶었을 때 세상은 자신과의 대화에 대한 필요성을 이야기했으며, 노년의 삶에 있어서 휴식 그 이상의 가치를 필요로 할 때 세상은 인생의 후반기에 대한 재설계를 이야기했다.


  이와 같이 삶에서 내 마음속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을 때마다 주변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러한 분위기가 일종의 흐름처럼 부각되곤 했다. 물론 그런 까닭에 내가 개척자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개척해야 할 땅인가 싶어 당도했는데 이미 길이 나 있는 상태라고 할까? 탄탄한 아스팔트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디가 길인지 몰라 들판을 헤매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이 역시도 운인가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세상의 변화에 무심했던 것은 아닌가?"싶기도 하다. 어느 광고처럼, "이런 세상이 온다면 어떨까?" 하는데 "(너만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인데) 이미 그런데......" 하는 상황처럼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삶의 방향이 세상의 흐름을 잘 타서 이거나 세상의 방향은 이미 그렇게 가는데 나만 읽지 못해서 결과적으로는 내게 유리하게 돌아가게 된 것처럼 보였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를 테면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뭔가 그렇게 흘러갈 것 같은 느낌이 내게 있었기 때문에 실현 가능할 것을 희망사항으로 걸고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꽤나 잘 풀리고 있다고 자기 최면을 건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뭐든 내가 바라기만 한다면 세상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자기 암시를 스스로에게 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의 흐름에 숟가락 얹기.



때로는 위안 때로는 무기력인 것은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자존감 탓인가?  


  무난하다는 말이 때때로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나와 다른 삶을 사는 타인을 바라볼 때 어느 날은 나의 무난함이 평온함으로 비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별 볼일 없이 하찮게 비치기도 한다. 무난하다는 말이 주는 함정은 이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로 이리 흔들 저리 흔들린다는 것이다.


  내가 미처 상상해 본 적 없는 불행 속을 사는 사람들을 볼 때면 현재를 다행으로 여겨야 마땅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지 않고 버릇처럼 투덜대다 보면, 줘도 불만인 인간에 대해 염증을 느낀 존재가 내게서 '가져도 가진 줄 모르는 것을 회수해 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온다. 반면에 어린 시절 꿈꾸던 모습과는 너무도 멀어져 버린 듯한 평범함을 마주할 때면 알 수 없는 무기력이 느껴진다. '스스로가 더 많은 세계와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줄여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남은 시간이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생각해보면 나를 제외하고 내 주변에 내 시선이 닿지 않았다면, 주변의 상황을 내 삶의 잣대 중 하나로 활용하지 않았다면 무의미한 감정들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슬금슬금 올라오는 상대적 위안과 무기력 앞에 흔들리는 것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감 부족으로 생각해 볼 것까지는 없었던 것은 흔들리는 그 감정에 오래 머물지 않아서였다. 쉽게 잊는다. 상대적 다행스러움도 상대적인 무기력도. 주변이 신경은 쓰이지만 내가 아니기에 금방 잊는 것이다.


  한때는 주변에 흔들리는 모든 것은 '자존감 부족'으로 해석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거니와, 나 이외에 다른 상대가 있는 세상에서 상대적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스러운 것인 듯도 하다. 잠깐 흔들리다 마는 것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탄성 때문일 것이고 그건 적절한 범위 내에서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나쁜 영향이 되려면 오직 그 상대적인 감정 안에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 처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느끼기 위해 비현실적으로 자신과 가까운 주변을 평가절상 내지는 절하하는 것을 일삼아 결국 관계의 단절을 자초하고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삶으로부터의 완전한 궤도 이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거, 저리 가


  오래전 그날로 돌아가 본다. 멋쩍다는 이유로 지인을 끌고 갔던 그곳. 어쩌면 운세를 알려준다는 사람에게 있어서 내가 그다지 흥미롭거나 공을 들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어서 대충 말하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눈에 나는 '호기심은 있지만 자신의 운세에 대한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거나, 기껏 말해줘 봐야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말 사람'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지인에게 말해 줄 때 너무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다음 순서였던 나에게는 최선을 다할 힘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유가 뭐든 '그런가 보네요'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나의 삶에서 느끼는 무난함이란, 삶이 어떻게 흘러가던 내가 가려는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하던 대로 계속하면 된다는 막연한 생각과 타인이 내게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 마음에 드는 범위 내에서만 취하고 마는 얕은 관계 욕구에서 오는 것 같다. 때로는 무던하게 때로는 무심하게 보일 수 있는 그런 것. 무난, 어려움이 없는, 세상에 나를 맞추거나 타인에게 나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쓰지 않는 까닭에 사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그런 것 말이다. 상대적 평안이 아닌 자기 안의 절대적 평안. 역시나 꿈보다 해석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본다. 늘 그렇듯이 무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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