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벨의 실체
일이 '성취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일 때는 굳이 삶에 있어서 일이라는 것의 의미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역량과 체력이 지난날에 비해 조금씩 부쳐갈 때, 나 이외의 변수-이를테면 가족과 관계된 일-가 생겨 오직 일에만 전념할 수 없게 되어갈 때, '일이라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를 묻게 된다. 스스로가 "버티고 있다"라고 말하게 될 즈음.
일에 대한 회의감이 엄습해와도 그것이 오직 나라는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라면 견딜만했다. 삶의 동반자가 생겨 각자의 일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랬다. 어떤 면에서는 항상 자신이 보낸 하루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이 도리어 위안이 된 때도 많았다. 하지만 동반자와 같이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닌, 꽤나 오랜 시간 한쪽이 다른 한쪽은 일방적으로 챙겨야만 하는 관계일 때는 달랐다. '워커'가 '워킹맘'이 되는 관계 말이다.
어딘가 조금 모자란 게 아닐까?
대부분의 엄마가 자식에 관한 일에 있어서 취하는 관점은 '넘친다'보다는 '모자라다'가 아닐까? 아이에 관한 크고 작은 사건들 앞에 항상 엄마인 자신을 먼저 저울 위에 세워두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거기에 일로 인해 하루의 특정 시간은 어쩔 수 없이 아이와 분리되어 있어야만 하는 워킹맘에게는 그 모자람에 대한 우려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내가 다른 엄마들보다 아이에게 신경을 못 써주는 게 아닐까?'라는 것.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그건 맞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보편적인 시간과 공간, 그 현실적인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재간이 딱히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 개의 접시를 돌릴 때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가 아니라,
'떨어지지 않을 만큼'이야
워킹맘이 되는 건 가정의 경제적인 여유, 개인의 일에 대한 성향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워킹맘에게 있어서 피치 못할 경험이라는 것이 있다. 일과 가정의 일정이 정확하게 쫑이 나버린 난감한 상황에 봉착하는 것. 어떤 때는 '짜증이 난다' 정도로 그칠 때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내가 왜 결혼이라는 것을 했을까?'와 같이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 '모든 것을 다 멈추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삶이 자신의 통제로 제어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무언가가 내 삶을 쥐고 흔드는 것 같고 그 안에서 나라는 사람이 휘둘리는 것 같다. 그럴 때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가 중요한 듯하다.
초기에 나는 어떻게든 내 안에서 해결을 해 보려고 애를 썼다. 일터에서는 내가 '엄마가 아닌 것'처럼, 가정에서는 내가 '일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척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결국 한계치를 넘어서면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되나'라는 억울함과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내는 게 없는 못난 나'라는 좌절감이 몰려왔다.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무엇보다 그 때문에 생긴 불안정한 감정이 내 주변 모두를 헤집어 놓는 상황이 되는 것, 사실 이것이 더 좋지 않았다. 이때가 첫 번째 변곡점이 되는 것 같다.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가 분명히 드러나는 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야"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말이다. 생각해보면 누구도 내게 '아닌 척'하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아니고 싶었던 것 일뿐.
어쩔 수 없이 척하는 것을 그만둔다. 일터에서나 가정에서 내가 '워킹맘'이라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동료나 가족에게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일터나 가정에서 나는 온전히 100%를 쓸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것은 '누군가는 내가 채우지 못하는 부분을 대신 채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건 나만이 아니었다. 나의 동료도 나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내가 100%로 올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 아닌 타인이 그러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해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때가 두 번째 변곡점이 아닐까. 내 삶에서 일부는 타인이, 타인의 삶에서 일부는 내가 채울 수 있게 두는 일, 이건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게 되는 거다"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여백을 굳이 없애지 않는 것 말이다. 내가 비워 놓지 않으면 타인도 마음 편하게 비우지 못하기 때문에. "괜찮아"라는 말에는 "내가 너와 같을 때 나에게도 그렇게 말해주면 좋겠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미안함은 그런 이유에서 조금씩 덜어져 갈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워킹맘이어서 할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조금씩 자라서 사회에 나가야 하는 시점이 다가올 때, 신입에서 중견 그리고 점점 퇴직이 가까워지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일터와 가정에서 직면하게 될 일들에 대해 일종의 사이클을 이야기해 줄 수 있다는 것. 일에 있어서는 내가 처음 시작해 내 위의 사람들이 포진했을 때와 나와 동년배가 한참 업무를 주도할 때 그리고 나의 아이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연령의 어린 직원들이 하나둘씩 늘어갈 때 느꼈던 것, 가정에 있어서는 각각의 시기에 어떤 상황들과 마주치게 되고 그때 동반자와 함께 겪어야 할 혹은 아이와 함께 겪어야 할 것들에서 어떤 한계에 봉착하게 되는지에 대한 것들 말이다. 워라벨은 생각보다 쉽지 않고 천천히 균형을 맞춰가는 것이지만 필요한 과정이라는 걸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너무 애쓰지 마" 중요한 건 완벽히가 아니라 어느 것도 내 삶 안에서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억지로 지나 칠 정도의 힘을 주지 않는 게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삶은 통제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스스로가 저울이 되어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는다는 기분으로 사는 게 아니라, 파도 위에 서핑보드를 놓고 높낮이가 변할 때마다 자신의 몸을 요령 있게 움직이는 기분에 더 가까운 듯하다. 그 과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타인이 아닐까? 정면에서 돌진하듯 대하면 고꾸라지지만 등 뒤에서 부는 것에 의지하면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어쨌든 누구나 한번 인생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탄다. 파도를 타는 동안에 '이 파도를 타지 않았다면'이라는 건 무의미하다. 내게는 이번 생에 특정 구간에는 워킹맘이라는 파도가 있었던 거다. 그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서퍼가 파도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게 의미가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