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언젠가 '작별'과 '이별'에 대한 차이점을 들었던 적이 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헤어짐에 대한 '능동'과 '수동'의 차이였다. 이 책의 제목이 굳이 '이별인사'가 아닌 것은 헤어짐에 능동성을 가지고 싶었던 작가의 바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헤어짐은 자신이 마음을 주었던 어떤 사람과의 멀어짐일 수도 있고, 자신만의 삶이라는 주제의 이야기에 언젠가 마침표를 찍어야만 하는 운명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헤어짐을 당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그것을 미루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간절한 염원 때문에 결국 헤어짐은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 될 수밖에 없다면 어떨까?
이 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 나는 인공지능의 소재를 빌어 '영생의 존재'를 예측해 보는 것 같았다. 혹은 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기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몸이라는 물리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지식의 한계를 없앤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 주인공 철이가 알게 된 진짜 자기 모습에 대한 기술은 흥미롭게도 죽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기술하는 사후세계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암묵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로 명시되는 '끝'이라는 것이 없는 그 세계 말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중간마다 와닿는 글귀에 마킹을 하고 그것을 옮겨 적은 후 다시 한번 찬찬히 문장에 머물러 보았다. 그리고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문 문장이 이것이었다. '자아의 초월'이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인간의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모든 희로애락의 끈을 끊어버리고 결국 다다른 곳에서 맞이하게 된다는 '해탈'이 '존재의 부재'와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그러고 나니 순간 우스꽝스러운 상상이 얼핏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잠깐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온 이들 말고, 그러니까 잠깐의 무한한 자유를 경험한 이들 말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경험한 이들이 다시 세상에 그 기억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을 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존재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 세계에
다녀오신 소감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좋았냐?"라는 말, 맞다! 그 질문의 요지는 그것이다. 물론 '좋았으니까 다시 돌아오는 자가 없었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되돌아가서 알릴 수 있는 여지를 없앤다'라는 조건으로, 이를테면 그 기억을 모두 지우고 되돌아간다는 조건으로 올 수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기억을 없앴다는 것조차 기억할 수 없다면, 그런 이들이 나이고 또 당신이라면...
내가 하나의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에는 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서두는 이랬다. '자작나무 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지금 그 두 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라는. 내게 이 책을 읽어보고 싶게 만든 동기가 되는 말이었다. 무언가의 끝으로 시작하고 예상했던 것처럼 끝은 이른바 끝이 되고 마는 이야기, 그것을 관통하는 핵에 나는 '몸'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생의 가능성을 확인하고도 주인공 철이는 소멸을 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는 '몸에 대한 선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몸에 대한 선망은 그가 이별이 아닌 작별을 선택할 수 있는 중요한 감정이 된다.
영혼만 사라지지 않으면
괜찮으시겠습니까?
누군가 내게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몸은 사라질 수 있지만, 영혼이 있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을 믿는다'라는 것이 존재의 부재를 초월하는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럴 만큼 영혼은 몸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이제 몸이라고 대변되지만 결국 삶에서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보이는 것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것들에 시선을 두려고 했던 최근의 노력에 발목을 잡히는 기분이었다. 그건 그간의 내 노력에 대한 옳고 그름을 묻는다기보다는, 불분명한 목적에 대한 충분한 동기의 여부에 관해 묻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최근에 느끼던 자유가 주는 여백의 확장만큼 쌓이는 공허의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작별의 고하는 순간을 놓치면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헤어짐의 능동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선제조건은
바로 지금의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바로 지금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에 포함할 이들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대상이면서 또한 그들의 선택이 의문에 묘한 답이 되고 있는 철이와 선이, 그 둘의 공통점에는 '끝을 선택하는 행위'가 있다. 끝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것으로 가는 과정을 선택했다는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끝이 중요한가 아니면 과정이 중요한가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함정은 끝도 있고 과정도 있다는 데 있다. 그것이 없다면 무엇이 남을까? '선택'이라는 것, 그렇기에 이 둘은 같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선택의 유효성이라는 건 무엇일까? '선택했다'와 '선택할 것이다'는 유효하지 않다. 결과에 대한 변동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고, 결과에 대한 확실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바꿀 수 없다는 것과 바뀔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유효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불가항력이 내포되어 있다. 인간 밖의 힘이 인간을 넘어선다. 오직 '선택하다'라는 현재적 관점만이 유효성을 보장할 수 있을 뿐이다. 바뀔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 밖의 힘을 넘어서는 것은 오직 이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