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의 페르소나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영화의 여자 주인공 중 기억에 남는 캐릭터가 있다면 단연코 '들장미 소녀 캔디'일 것이다. 솜사탕처럼 풍성한 금색 모발을 머리 양쪽에 탑재하고, 얼굴의 반에 육박하는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서도 입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들판을 내달리던 아이. 그녀의 독백과도 같은 테마송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 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이럴 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 속의 나하고. 웃어라. 캔디야. 들장미 소녀야. 울면 바보다. 들장미 소녀야!
이러한 삶의 태도는 '매사에 긍정적이면서도 씩씩해서 웬만한 장애물 따위를 만나도 주저앉지 않을 것 같은 멘털의 상징'과도 같았다. 어찌 보면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은 그녀가 일찌감치 선택한 삶의 전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전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제법 잘 먹히기 때문. 옛말에도 웃으면 복이 오고, 웃는 얼굴에는 침도 못 뱉으며, 국제적인 인싸인 산타클로스마저도 울면 선물 따위는 국물도 없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사랑받는 캐릭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나도 이 전략을 선택했고 꽤나 유용했다.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반장 또는 부반장을 놓쳐 본 일이 없고, 대학 입시도 무난하게 통과했으며, 당시에는 드물었던 여성 임원의 자리까지 올랐으니까. 가난으로 인해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던 부모 밑에서 불안에 떨며 자라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캠버스의 낭만 따위는 1도 느낄 수 없었으며, 월세 35만 원짜리 신혼생활과 야간근무나 철야를 밥 먹듯 하는 회사생활을 오가는 현실에서도 늘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아냈던 셈이다.
이때의 나는
매사에 활력이 넘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며 늘 뭔가 거대한 야망을 꿈꾸며 내 안의 모든 에너지를 분출하고자 했다. 불굴의 의지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가고 있다고 여겼고 그것을 위해 잠을 자는 것도 잊고 일에 몰두하곤 했다. 스스로 자신감이 충만하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타인을 설득하는데도 능했는데 특히 "정말 카리스마 있으시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온몸에 전율이 오고 세상의 승자가 되는 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이러한 느낌을 일컫는 말이 있다. 바로 '경조증'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면 짜증과 불안이 올라와 '여전히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어 한다면,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괜찮다가도 혼자 있는 시간에는 허망함과 무기력에 우울해져서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밤이 유달리 싫어진다면 십중팔구는 그럴 것이다.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면 분명 나쁘지 않게 나아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는 아이러니함의 연속 말이다. 그 궤적에서 벗어나면 그동안 지켜온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 같아서 하루하루를 버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결단을 미루는 자기 자신에게 지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 같은 상태.
그런데 찬찬히 다시 생각해 보자. 사랑받는 캐릭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현실에서 그런 캐릭터가 차고 넘쳐 일반화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동경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롭고 슬프면 우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고, 혼자 있을 때 어쩐지 쓸쓸해지면 거울 속에 나하고 얘기를 나눌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며, 웃을 줄만 알고 울 줄은 모르는 게 제대로 된 바보다. 대부분의 동네 바보 형아들은 빙구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복이 오는 것은 삶에서 복불복이고,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지만 우는 얼굴에도 침을 뱉기는 쉽지 않다. 산타클로스가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주는 것은 우는 아이 달랠 시간에 웃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는 게 일을 더 빨리 처리하는데 효율적이라서 인지도 모른다. 준비한 선물이 한정적이라 일찍 품절이 되었을 수도. 요컨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받기 위해 부득이하게 캔디를 차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캔디였기 때문이다. 정작 그때는 자신을 속이며 모른 척했지만 말이다. 몰랐다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분명 알고 있었던 게 맞다. '이건 아닌데...'싶어도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아 선뜻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 힘들었던 것뿐. 박차고 나와야 왜 나와야 했는지가 분명 해지는 것이 있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했던 건 바로 그 찜찜함에 둔감하지 않는 습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