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진정한 소명
마음속에 커다란 가위를 품고 살았던 것 같아요. 관계를 재단하기 위한 용도의 가위. "너는 마음이 여려서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현혹되니까 항상 조심해야 할 거야"라고 엄마는 말하곤 했죠. 맞아요. 쉽게 믿었다가 상처를 받곤 했으니까요. '다시는 함부로 대하거나 이용하려 들지 못하게 만들 거야'라는 다짐을 할 때마다 가위는 조금씩 자랐나 봅니다. 앞뒤가 다른 사람, 필요한 때만 찾는 사람, 나쁘게 이용하려는 사람, 단점만 보려는 사람 등 많은 이들을 잘라냈어요. 누군가도 내게 그랬겠죠. 사정을 얘기하기도 전에, 오해를 풀기도 전에, 잠깐 힘들어서 잘못된 판단을 했던 것뿐일 때도 변호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잘려 나갔겠죠. 이해해요. 그 사람도 여려서 조심하고 있는 것일 테니.
하지만 조금 벌레 먹거나 시든다고 해서 잎을 모두 잘라 버리면 나무는 제대로 자라지 못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도 힘들어지지 않을까요? 나의 자존감이 뿌리라면 잎은 내 안에 존재하는 타인인 것 같아요. 뿌리가 물기를 흡수해서 병약한 잎까지 공급하면 잎은 고사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햇빛의 에너지를 뿌리로 보내려 애쓸 거예요. 뿌리는 취한 적 없었던 새로운 땅의 물을 찾아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건강한 잎이 풍성해지면 병약한 잎이 더러 있어도 나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되겠죠. 내가 더 자라면 돼요. 더 높고 넓게. 어쩌면 소식을 듣고 더 많은 새와 나비가 찾아와 열매를 만들고 씨앗을 주워 나를지도 모르죠. 새로운 땅에서 씨앗은 더 울창한 나무로 자라나게 될 거예요.
이제는 가위를 내려놓으려고 해요. 마음에 품기에는 너무 무겁고 날카로워 내게도 위험한 흉기가 되어버렸거든요. 우리가 직접 조경사가 되어 재단하려 애쓸 필요는 없겠죠. 그건 나무의 소명이 아닐 테니까요. "마음이 여리다면 스스로 더 튼튼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웅크리고 앉아 조심한다고 해서 타인의 나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는 없어요. 엄마"
아마도 엄마는 어리고 어리숙한 딸이 세상에 나가 다치는 것이 걱정스러워서 내게 당부를 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그랬던 것이 맞을 수도 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내가 여전히 여리고 타인의 말과 행동에 큰 영향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어느새 내게 그 말을 해주던 엄마보다도 더 나이가 많아져 버렸고 이런 나를 엄마는 본 적이 없으니까.
다만 어렴풋한 생각에, 나무가 자신의 뿌리를 뻗어 스스로 더 튼튼하게 자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소명은 연리지가 될 다른 나무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두 그루의 나무이지만 뿌리와 가지가 맞닿아 마치 하나의 거대한 나무인 것처럼 보이는, 거센 바람 앞에서는 서로를 더 견고하게 잡아주고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며 공생해가는 그런 관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