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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Sep 01. 2020

마음의 곳간

어느 가난한 노부부의 행복나눔 이야기


옛말에 '곳간에 인심 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때 주위를 돌아보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는 뜻이다. 평소에 아무리 너그럽고 인심이 좋은 사람이라도 상황이 궁핍해지면 주위 사람들한테 옹색해질 수 있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다. 내가 그리 생각하는 건, 근자에 훈훈한 어느 노부부의 사연 때문이다.

'1만 9천262개'

제주시에 거주하는 김정선(80)·배연임(76) 부부가 3년간 모아서 판 빈병 개수다. 노부부의 집 마당 한쪽에는 늘 빈병이 쌓여있다고 한다. 무슨 사연일까. 언듯 보면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어느 노부부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폐휴지를 줍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나 이 숫자는 동네 곳곳에서 빈병을 수집해 모은 돈으로 기부금을 전달한 빈병 개수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전라남도 해남이 고향인 노부부는 1982년 일을 하기 위해 제주로 넘어가 살기 시작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공사장 일과 농사짓는 일을 병행하면서 2남 1녀를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 하지만 오랫동안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해오면서 노부부 모두 건강이 악화되었다. 특히 할머니는 8년 전부터 당뇨를 앓고, 다리도 불편해 네 차례나 수술을 받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노부부는 힘든 시기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꿋꿋이 버텨낼 수 있었는데 그건 이런 힘든 시기에 주변 이웃들이 버팀목이 돼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본인도 남은 여생 동안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성당을 다니면서 장애인 가정 등 거동이 불편한 이웃의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청소를 도와주며 선행을 이어오고 있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2015년 겨울, 처음 기부를 시작했다. 그는 연말이 되면 이웃 돕기 성금을 모으던 것이 생각나, 무작정 하나로마트 마을 농협을 찾아가 아껴놓았던 8만 원을 어려운 이웃에 사용해 달라며 전달했다. 이듬해에는 10만 원으로 액수를 늘려 전달했다. 1년에 한 번이었지만, 몸이 불편하여 일을 쉬면서 기초연금 등 두 사람이 합쳐 60만 원으로 한 달 생활을 꾸리던 노부부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할아버지는 기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 KBS 이웃 돕기 성금 모금 방송을 보고 무작정 하나로마트를 방문하여 직원을 붙잡고 이웃 돕기 성금으로 사용해 달라며 기부금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렇게 2년간은 아껴둔 돈을 기부하다가 2017년부터는 빈병을 모아 기부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빈병 수집은 남편의 기부활동에 힘을 보태고 싶었던 할머니가 먼저 생각해냈다. 그는 아팠던 몸이 점차 괜찮아지니 본인도 좋은 일을 하고 싶어진 그때 마침 빈병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는 산책 겸 가까운 동네를 돌아다니며 병을 모았다. 다리가 아픈 탓에 한 번 산책하러 나가면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남편 할아버지는 거리가 먼 옆 동네나 주변 클린하우스를 돌면서 병을 수집하고는 이를 손수레에 싣고 농협에 가져가 되팔아 왔다. 부창부수( 夫唱婦隨)가 따로 없었다.

주변 이웃들도 이런 노부부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일부러 빈병을 모아 노부부에게 전하면서 이웃 사랑에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1년간 빈병을 팔아 모은 꼬깃꼬깃해진 1천 원짜리와 색이 바랜 500원, 100원짜리 동전은 연말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전달되었다.

이 노부부는 2017년 11만 6천 원, 2018년 35만 4천 원, 2019년 73만 6천 원. 점점 기부금이 늘어났다. 올해도 노부부는 어김없이 지난 1년간 빈병을 수집해 마련한 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써달라며 제주사회복지 공동모금회에 기탁했다. 전달된 돈은 모두 102만 원. 이번 기부금은 부부가 빈병을 수집해 모은 돈뿐만 아니라 신종 코로나 19 재난지원금으로 받은 30만 원까지 포함됐다.

할아버지는 매번 100만 원을 채우지 못하고 기부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올해 드디어 100만 원을 전달하게 돼 마음이 한결 편하다며, 이 기부금이 보탬이 돼 어려운 이웃이 희망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날씨도 덥고 점점 빈병을 찾기도 어려워져, 멈추고 싶을 때도 있지만 본인들의 선행이 힘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덩달아 힘이 났다고 한다. 앞으로도 힘이 닿는 데까지 나눔을 이어가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십시일반, 열개를 내기는 힘들지만 한 개는 낼 수 있는 형편이 되어, 여럿이 하나씩 모아서 여러 개를 모아 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나만 혼자서 살아남기보다는 여럿이 함께 살아야 한다. 나눌 때에는 남아서 버리기 아까워 주는 게 아니라, 소중한 것을 함께 나눈다는 마음으로 좋은 것을 남에게 주어야 한다. 너와 내가 하나인 까닭이다.

살다 보니 곳간이 차있다고 꼭 인심이 나는 건 아닌 거 같다. 인심은 곳간에 곡식의 유무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마음과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곳간이 비더라도 여전히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 있고 곳간이 차고 비어짐에 따라 마음이 좌지우지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곳간이 차더라도 마음이 여전히 허전한 사람이 있다.

노부부의 따뜻한 선행을 보며 나는 과연 어떤 마음의 곳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반추해 보았다. 앞으로 그 흔한 빈병을 볼 때마다 노부부가 생각나서 빈병을 가볍게 여기지 못할 거 같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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