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하루 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 동안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한 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렇다면 보다 지속적이고 평생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내 짧은 인생의 경험으로 비춰 봤을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를 들 수 있겠다. 하나는 나 자신을 성찰하는 일과 다른 하나는 이웃을 이한 나눔의 실천이 그것이다.
우선 나눔이라고 하면 꼭 유형의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물질을 나눠도 좋겠지만 관심과 시간, 그리고 내 재능과 노동력을 나누는 것도 의미 있는 나눔이며 누군가에게 큰 위로와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불우한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일만큼 보람된 일이 없다 할 것이다.
10년 전, 파주에 소재하고 있는 장애인복지센터에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그곳은 중증장애인이 많았는데, 지적장애와 신체장애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까닭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들이었다. 한 번은 뇌성마비 장애에 정신 장애를 앓고 있는 분들을 목욕을 시키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돼며, 몸을 가누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지를 않으니 옷을 벗기는데도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고,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세명은 달라붙어야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 힘든 일이었지만, 봉사를 하고 난 후의 뿌듯함은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감을 주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나눈 만큼 몇 배로 다시 돌아오겠지 하는 보상심리로 하기도 한다지만 나는 불편해질 것을 각오하고 나눈다. 진정한 나눔은 내가 쓰고 남은 것을 적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걸 포기하는 것이며 그만큼 나는 불편해짐을 의미한다. 그걸 알고 하는 거다. 나눈 만큼 덜 가져야 하고 덜 써야 한다. 또 덜 먹어야 하고 내가 개인적으로 누릴 수 있는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불편해질수록 마음은 반대로 편해지고 즐거워진다. 사람은 관계적 존재이고 더불어 함께 살아야 행복해지는 존재인 까닭에 그렇다.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면 주변엔 소외된 이웃이 너무도 많다.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부모로부터 버려진 고아, 6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는 국제 기아들이 있다.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다. 우리 집 거실엔 우리 아이들 사진보다 내가 후원하는 기아들이 더 많다. 얼마 안 되는 나눔이지만 그 아이들에 희망이 되어줄 거라 믿는다. 또 그런 아이들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드는 것임을 의미하지만 나의 행복지수는 높아짐을 느낀다. 그걸 보고 자란 우리 아이들도 그런 나눔을 실천하며 행복한 인생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평생 즐거운 인생이 되기 위한 것이 또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두 번째로 글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시나 소설, 수필처럼 꼭 문학 형식을 갖춘 글이 아니어도 글을 쓴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쓸 때의 유익함이야 밤새워 얘기해도 모자라겠지만 일단 내 삶을 성찰할 수 있어서 좋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후회 없이 살고는 있는지를 점검하고, 보다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한 내일을 모색할 수 있어서 즐거움을 준다. 글 쓰기에 몰입하다 보면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또한 글을 쓴다는 건 무에서 유로 창조하는 것이기에 그 창작의 고통을 이겨내고 나온 결과물을 대할 때는 이 세상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과 희열을 만끽하게 된다. 나는 어떤 계기로 15년 동안 절필을 했었다. 돌이켜보면 방황하는 시기였고 무질서한 생활이었음을 고백해 본다. 다시 펜을 든 지 일 년이 되어가지만 이 좋은 취미를 왜 내려놓았을까라는 아쉬움이 있다.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사는 시대에 돈으로 쾌락은 살 수 있겠지만 진정한 기쁨은 살 수 없을 것이다. 육체적, 물질적 쾌락으로써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정신적인 쾌락을 글쓰기가 가져다준다. 명품가방이나 삐까뻔적한 차를 갖거나 으리으리한 저택을 소유한들 이런 정신적인 쾌락은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하여, 찰나의 쾌락을 위해서 애쓰기보다는 지속적인 쾌락을 위해서 열정을 쏟는 것이 보다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성경 시편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하였다. 생명공학이 발전하여 백세시대에 산다 손 치더라도 인생은 결코 길다 할 수 없다. 지구 상에 행복을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이왕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 하는 나그네 인생을 좀 더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나는 이 두 가지를 실천하며 살고자 한다.
나눔과 글쓰기.. 생명이 붙어있는 한 내가 해야 할 소명이자 사명이 아닌가 한다. 이런 내 인생이 평생 즐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2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