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권위? 그게 뭔데
누구에게나 '처음'은 매번 강렬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스타트업 경험 자체뿐만 아니라 처음 해보는 리더 역할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스타트업에서 내 포지션은 PO이자 제품팀의 Lead였다. 당시 회사가 조직 규모를 빠르게 키우고 있었던지라 조금씩 늘어난 팀원은 어느덧 총 15명이 되었다. 이 중에는 외국인도 있었고, 나보다 경력/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다. 그 점이 팀을 이끄는데 방해가 된 건 아니지만 문제는 내가 초보 팀장이라는 데에 있었다.
'좋은 팀장이 되어야지.'
당시 내가 생각한 좋은 팀장의 모습은, 그동안 내가 겪은 모든 리더들의 장점만 모아놓은 것이었다.
모두에게 사랑과 신뢰를 받는 리더
팀원에게 책임을 미루지 않는 리더
기합이 잔뜩 들어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원하는 리더의 모습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것이었음을 속 아프도록 깨닫게 되었다.
요즘 학교 안팎으로 교사의 권위와 훈육 문제가 사회적 화두다. 특히 가정에서의 훈육 방법을 보자면 꼭 언급되는 것이 오은영 박사의 <마음 읽어주기> 같은 내용인데, 아이 행동의 원인을 이해하고 훈육해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이해한 부모들이 아이의 잘못된 점을 냉정히 혼내야 할 때에도 '다 이유가 있겠지.' 식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아이들이 점점 더 버릇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비꼬는 '하지 않아요~'라는 밈까지 생겨버렸다.
모두에게 사랑과 신뢰를 받고 싶었던 초보 팀장인 나도 이런 부모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매번 지나치게 포용적이려고 애썼다. C 레벨의 의견에는 반박하기가 쉬운데, 오히려 팀원들에게는 약간의 쓴소리를 하는 것도 마음의 짐이 되어 돌아왔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팀장이 반드시 좋은 리더가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느 날 팀의 '일잘러'로 손 꼽히는 윈터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클로이님, 조금 더 직설적으로 해주셔도 될 것 같아요. 저자세로 매번 받아주시니까 팀원들이 말을 안 들어요..."
이게 각성의 계기가 되어 리더의 권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또 헨리다. 팀 전체가 참여한 제품 일정 관련 회의가 한창이었다. C 레벨이 원하는 일정과 현실적인 일정의 갭을 메꾸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C 레벨이 정한 일정은 투자 일정에 맞춘 것이라 바꾸기 어려웠다. 이 부분에 대한 검토는 내 선에서 이미 마친 터였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일정 역시도 탑다운으로 떨어지는 일이 부지기수니까 사실 크게 스트레스 받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그저 이 기한 내에 어떻게 해야 현실적으로 업무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가 고민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일정 부분이 개발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경영진들이 또 탑다운으로 일정을 고지한다고 볼멘소리가 나왔다. 물론 그들의 심경을 이해했다. 하지만 내가 입사하기 전에 벌어진 일들로 왈가왈부하기보다는 현 상황에서의 최선을 찾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의미 있고 급한 과제였다. 그래서 이러한 일정이 정해진 배경을 설명하고 우리의 일정이 빠듯함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대신 실현 가능성을 위해 일부 기능은 스펙 아웃(Spec out; 업무 기획 범위에서 제외하는 것) 하는 결정을 내린 참이었다. 그러나 역시 헨리는 참지 않았다.
“개발자가 안 된다는 일정을 C 레벨에게 설득시키는 것이 PO가 할 일 아닌가요?”
순간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치려나. 그런데 실제로 내 기분이 그랬다. 그때 윈터의 말이 스치며 '이번만큼은 그냥 웃으며 넘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헨리의 말처럼 PO가 단순히 커뮤니케이터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O는 일이 되게 만들어야 하는 포지션이지, 개발자의 입장을 무조건 대변하는 포지션이 아닙니다. 물론 일정 조율을 하는 것도 제 업무이지만, 그게 반드시 특정 포지션이나 팀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PO에게는 제품이 가장 중요합니다."
헨리도 지지 않았다.
"그런데 클로이님은 우리 팀 PO이신 거잖아요? 그러면 저희 편을 들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그래서 굳이 우리 팀에 PO를 뽑았다고 생각했는데요."
시건방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난 9년간의 사회생활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다수 앞에서는 화내야 할 때도 화내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교훈이었다. 녀석, 짬바가 뭔지 보여주마.
"저는 팀과 회사의 가운데에 있는 사람입니다. 또, 우리 팀 역시도 제품을 만들기 위한 이 자리에 있단 점을 기억해 주세요. 저는 지금 해야만 하는 과제를 잘 끝내기 위해 상의하고자 여러분을 모집한 것이지, 이 일을 할지 말지에 대해 토론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의 방향은 이미 결정됐습니다. 우리는 지금 투자가 필요하고, 그 투자사들을 설득하기 위한 기능 개발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모두 동감하실 텐데요, 그러기 위해 현실적으로 어디까지를 MVP(Minimum viable product; 핵심 기능만을 최소한으로 개발한 제품) 스펙으로 결정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무조건 안된다는 말보다 이 기한 내에 할 수 있는 스펙을 의논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예전이라면 '그러시군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라고 팀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공들였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땅땅땅! 고지하고, 그 이후의 스텝을 의논하기 위해 의견을 구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후일담으로, '그때 아주 속이 후련했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리더의 권위가 무너진 상태에서 일을 진행하는 것은 리더 본인뿐만 아니라 팀원들에게도 불안하고 답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리더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 걸까? 여기에 대한 답은 아직도 찾는 중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례들을 겪으며 나름의 실마리를 찾았다. 리더의 권위는 어떤 한 가지 계기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팀원들이 '저 사람 일 잘하네'라고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었다.
즉, 리더는 팀원들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리더의 권위를 찾기 위한 여정이 약간은 간단해진다. 왜냐하면 누구나가 팀원인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내가 리더한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내 팀원들의 경우 아래와 같은 공통된 요구사항이 있었다.
업무 목표와 계획은 가급적 변경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가 항상 분명했으면 해요.
수정할 사항에 대해서는 빠르고 꼼꼼하게 이야기 해주시는 편이 도움이 됩니다.
리더가 결정해야 할 것은 가급적 빠르게 결정해서 공지해 주시면 좋겠어요.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일감을 분배해 주셨으면 합니다. 운영 업무만 하는 것은 피하고 싶어요.
다양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서포트 해주세요.
제가 일하는 방식과 특성을 이해해 주세요.
마이크로 매니징은 싫어요.
우리 팀만큼은 으쌰으쌰 즐겁게 일하고 싶어요.
파트끼리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시면 좋겠어요.
리더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가감 없이 들려주세요.
스타트업이라 회사의 미래가 걱정되는데, 투자 정보 같은 내용들은 빠르게 공유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 요구사항들을 반영해 내가 노력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데일리 스크럼을 십분 활용했다. 특히 구두로 논의한 내용을 잊지 않도록 슬랙에 데일리 스크럼 스레드를 만들어 다시 한번 공지했다.
PO는 업무 특성상 피드백을 줄 일이 많기 때문에, 중요도 및 데드라인에 따라 구분해서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만약 피드백에 충분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해당 팀원에게 미리 이 점을 알렸고, 중요한 피드백의 경우 미팅을 잡아 피드백을 진행했다.
각 업무 및 팀원 특성에 맞추어 유용한 아티클이나 유무료 교육 프로그램을 공유했다.
노션 페이지를 제작해 위 내용을 계속해서 축적할 수 있도록 했는데, 나중에는 전사 교육 페이지로 확대되기도 했다.
팀 내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프로젝트 시작과 끝 즈음 각각 워크숍을 진행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는 우리 팀의 목표를 상기하고 앞으로의 업무 일정을 확정할 수 있는 내용으로 진행했고, 프로젝트를 마친 뒤에는 성과와 느낀 점을 나누는 회고 시간으로 진행했다.
워크숍 이후에는 회식 시간을 마련해 스트레스도 풀고, 친밀도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슬랙 채널을 통해 제품 업데이트, 오류 등 제품 관련 이슈뿐만 아니라 리더 회의 내용 등을 축약해 공유했다.
특히 확정되지 않은 건이라도 이슈 중요도가 높은 건이 있다면 사전에 공유해 혼란을 줄이고자 했다.
퇴사할 즈음 마지막으로 진행한 리더 평가에서 회사 내 최고점을 받았다는 C 레벨의 피드백을 들었다. 그렇지만 이 평가 하나로 내가 좋은 리더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많이 부족한 리더를 훌륭한 팀원들이 많이 도와주었다고도 생각한다. 서툴렀던 탓에 조금 더 능숙한 PO이자 리더이지 못했던 점은 못내 부끄럽고 미안하다.
하지만 항상 노력했던 리더였던 것은 맞다. 되도록이면 가장 많이 고민하고 가장 오래 일하고자 했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리더이고자 노력했던 점이 팀원들의 마음에도 닿았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