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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Feb 03. 2021

어렵게 듣는 음악

요즘 '옛날'의 기준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2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내가 중고등학생 때 유행했던 것들이 '그 시절' 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걸 자주 보면서 시작된 생각이다. 특히 숨듣명이라고 불리는 음악을 들을 때 더욱 그러하다. 10대였던 아이돌 스타가 30대가 된 걸 보면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자꾸 그렇게 오래된 게 아니라고 말하고픈 반발심이 든다. 아직도 나한텐 너무나 생생한 일인데, 10년이 그렇게 영겁의 세월인 건 아닌데.. 그러고보니 내가 10대였을 때는 그 당시로부터 10년 전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는 1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당연한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건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어리면 어릴수록 사건을 더 촘촘하게 기억하고, 나이들면 들수록 사건을 띄엄띄엄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왜 시간이 빠르다며 한탄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정말 너무 빠르다. 나보다 어린 친구를 보면 '나도 (N년 전에는) 너와 동갑이었어.' 같은 터무니없는 생각도 든다.


빛보다 빠르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나마 덜 억울할 수 있는 방법은 옛날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N년 전에 유행했던 것들이 지금 기준에선 촌스러워보여도 그때 당시에는 현재진행형이었다는 것, 늙어가는 누군가도 한때는 청춘이었다는 것, '요즘 것들'이라고 불리는 우리도 언제든지 과거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시간의 흐름이 덜 야속하게 느껴진다.


요즘들어 옛날 음악을 자주 듣는다. 원래도 오래 전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걸 즐겼지만, 옛날은 그게 단순히 흥미롭게만 느껴졌다면 지금은 음악에 깃든 그 시대 특유의 낭만이 소중하다. 옛날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나니 옛날 것들이 오히려 새롭게 다가온다.


중학생 때 신경숙 작가의 자전적 소설 <외딴 방>을 감명깊게 읽었다. 소설은  '나'가 라디오에서 샌드 페블즈의 '나 어떡해'를 듣고 놀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지금 나오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비하면..." 이라고 말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도 나한텐 옛날 사람인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했던 그 시절도 지금 기준에서 옛날이 되었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현재와 옛날의 굴레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렇게 새로운 거, 더 새로운 거, 더 더 새로운 거의 연속을 경험하다보면 오히려 태초로 돌아가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이 된다. 지금 나로서는 '나 어떡해'를 듣고 놀라던 때가, 좋아하는 음악을 라디오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때가 가장 신기하다.


나는 인터넷과 함께 유년시절을 시작했다. 거의 기억이 시작될 때부터 집에 컴퓨터가 있었다. 게임은 물론 좋아하는 음악도 자유롭게 들을 수 있었다. 몇 년 뒤 나에게도 핸드폰이 생겼고 이제 집이 아니어도 어디에서든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인터넷과 핸드폰을 벗삼아 성장한 나에게도 음악이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바로 기숙사에서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전교생이 의무로 기숙사에 살아야 했는데, 일요일 저녁에 등교해서 금요일 저녁에 하교하는 일정이었다. 학교에 갇혀 지내는 평일 동안 당연히 핸드폰은 금지였다. 그땐 이미 여러 전자기기가 등장한 이후라서 많은 아이들은 태블릿PC나 공기계 등으로 핸드폰의 빈자리를 달랬지만, 전자사전 마저도 갖지 못한 나는 예외였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기기로 자유롭게 음악을 들었지만, 문명의 이기와 가장 멀리 위치했던 나는 평일 내내 음악을 듣고 싶은 마음을 자기 전 마음속으로 읊조리는 것으로 해소하곤 했다. 그렇게 해소될 리가 있나. 금요일 저녁, 며칠 만에 핸드폰을 받으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주말 내내 미친 듯이 음악을 들으며 턱 끝 까지 차오른 음악을 향한 갈증을 해결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 기숙사에 들어갈 때면 진한 아쉬움을 담고 핸드폰을 반납했다.


이렇게 얌전히 교칙을 준수해가며 (생각해보니 나처럼 교칙 지키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음악을 참은 나인데 고등학교 2학년 겨울의 그날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록 음악에 막 눈을 뜬 상태여서 수업 내용보다 록밴드 아티스트의 역사를 더 자세히 외우곤 했다. 이제 막 록에 심취한 10대에게 주말에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현실은 형벌에 가까웠다. 야간자율학습을 시작하려는데 (말이 자율이지...) 며칠 전 집에서 들은 그 음악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꼭 그 음악을 들어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평일엔 제 역할이 없는 이어폰을 챙기고 몰래 컴퓨터실에 들어가 유튜브로 그토록 염원했던 음악 딱 한 곡을 듣고 자습을 시작했다. 그 노래가 바로 롤링스톤스의 'Let's spend the night together'였다.


누군가는 고작 컴퓨터실에 간 걸로 유난이냐며 비웃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 내가 그렇다.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그런데 고등학생의 나한테만큼은 큰일이 맞았다. 그때 나는 모든 교칙을 준수하는 모범생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정말 사소한 교칙 하나하나 절대 어기려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음악 한 곡을 듣겠다고 선생님이 금지한 컴퓨터실에 몰래 들어간 것이다!


뭐든 시작이 어렵다고 한 번 그렇게 하고나니 몰래 음악을 듣는 일이 더 이상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3 때는 아예 자습시간 내내 몰래 교실 컴퓨터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Let's spend the night together'를 들었을 때만큼의 짜릿함은 다시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난 김에 롤링스톤스의 노래를 다시 들었다. 유튜브 뮤직 앱에 들어가 검색하니 곧바로 재생이 가능했다. 1960년대에 이 노래를 부르던 롤링스톤스는 알았을까. 자신들의 음악을 그보다 몇 십 년 뒤에 태어난 내가 이토록 쉽게 들으리란 걸.


최근에 이동진 평론가의 아지트 파이아키아와 그곳에 보관된 수집품에 관한 에세이, <파이아키아, 이야기가 남았다>를 읽었다. 유년 시절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구한 덕질의 역사가 담긴 책이었다. 좋아하는 작품을 향한 순수한 애정으로 가득한 이 책에서 '걸어서 도착한 천국의 해변'이라는 목차가 기억에 남는다. 세운상가에서 LP판을 사는데 좋아하는 음반을 발견했지만 다른 음반을 잔뜩 사느라 수중에 차비밖에 없어 결국 음반을 사는 대가로 집까지 걸어갔다는 내용이었다. 이동진 평론가가 두 다리와 맞바꾼 앨범은 바로 샬린의 'Rainbow'였다. 청계천에서 성수동까지, 늦은 오후에 출발해 저녁까지 굶으며 몇 시간을 걸은 끝에 들은 음악을 이동진은 '걸어서 도착한 천국의 해변'이라고 표현했다.


검색 몇 번으로 음악 듣는 게 일상인 우리 세대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음악을 듣기 위해 몇 시간을 걸었다는 이 비효율적인 일화가 나에게는 몹시 낭만적으로 들린다. <남자의 자격>이라는 예능에서 이윤석이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편리해진 거지 좋아진 건 아니라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편하다. 너무 편하다. 특히 문화예술 향유하기가 이보다 더 편할 수가 없다. 음악은 어플로 들으면 되고, 책은 전자책으로 사면되고, 영화는 OTT 서비스로 즐기면 된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문화예술을 (특히 지역격차 없이) 보다 평등하고 보편적으로 즐길 수 있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예술을 즐기는 시절의 낭만이 신기하고 부럽다. 즐기는 방식이 쉬워졌다고 예술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LP판으로 힘들게 음악을 듣는 건 지금도 충분히 가능한 경험이다. 턴테이블과 LP판만 구하면 된다. 하지만 일단 너무 비싸고.. 이미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게 디폴트가 되어버린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여건이 된다면 꼭 그 낭만을 실현해보고 싶다. LP판 만큼이나 경험해보고픈 옛날이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시리즈를 <비포 선라이즈>가 나온 1995년, <비포 선셋>이 나온 2004년, <비포 미드나잇>이 나온 2013년 . 이렇게 9년 격차로 보는 것과 유치원 시절이었던, 그래서 빨간 티셔츠가 유행했다는 것밖에 기억 나지 않는 2002년 월드컵의 열기를 느껴보는 것이다. 나도 이게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임을 안다. 시간의 흐름을 어찌 거스르겠는가. 어쩌면 그 불가능성 때문에 옛날이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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