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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Jul 26. 2021

집안일하는여성은 어떻게 서사의 주인공이 되었나

반려동물, 집안일, 가정부, 1인분의 책임감, 영화 <로마>


매일 1인분의 책임을 수행하며 지탱하는 삶 


반려동물의 존재는 삭막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한 생명을 키운다는 것, 그 생명이 나에게 온전히 충성하고 기댈 때면 잃어버린 삶의 감각이 돋아난다. 하지만 그 감각은 집을 벗어나면 곧바로 사라진다. 일터, 학교, 친구들과의 약속 등 외출할 수밖에 없는 수만 가지 이유를 대며 ‘집 잘 지키고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나고, 오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자신을 반기는 동물과 마주하면 그제야 다시 자신을 기다려준 반려동물의 존재감을 상기한다. 그럼 주인이 없는 동안 반려동물의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인간인 내가 알 리가 없다. 나 역시 항상 ‘조금만 기다려’라는 형식적인 한 마디만 남기고 떠나는 존재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없던 배설물이 생겨난 것을 보면서 내가 없는 시간 동안 반려동물도 살아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는 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는 1971년, 멕시코의 한 중산층 가정과 가정부 클레오에게 생긴 변화를 일상적인 감각으로 다루었다. 영화는 클레오라는 가정부가 자신이 일하는 집의 반려동물 ‘보라스’가 남긴 개똥을 치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관객은 처음엔 이 장면이 정확히 어떤 장면인지 파악하기 어려워한다. 물을 끼얹는 부분이 강하게 클로즈업되어 있기 때문에 물이 어디에서 오는지, 물이 끼얹어지는 공간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물이 끼얹어짐으로써 불투명한 바닥에 투명성이 생기고 비행기가 나는 하늘이 보이는 모습은 어딘가 환상적이기도 하다.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감상에 젖을 무렵 하수구로 물이 빨려 들어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리가 개입하고 곧바로 물을 끼얹은 주체가 집안의 가정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의 첫 장면은 몹시 상징적이다. 영화가 어떤 흐름으로 진행될지, 인물은 어떤 사람인지 등등 감상에 중요한 정보를 함축적으로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로마>의 첫 장면은 단순히 주인공 클레오가 가정부라는 사실만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개똥으로 가득했던 복도를 청소하는 것. 이 풍경을 멀리서 찍었더라면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아마 더 볼 가치도 없다며 외면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영화는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물결에 비치는 비행기’라는 낭만적인 이미지까지 선사한 뒤에야 장면의 정체를 밝힌다. 영화는 이 한 장면으로써 관객에게 누구나 외면할 사소한 일이 사실은 삶의 진리와 더불어 아름다움까지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반려동물 얘기로 돌아가자. 동물을 키운다는 건 치우는 일의 반복이다. 시도 때도 없이 생겨나는 배설물은 물론 무엇이든 입에 넣고 보는 특성 때문에 어떤 물건도 함부로 널브러져 있으면 안 된다. 게다가 그들이 제공하는 엄청난 양의 털로 쉴 새 없이 방 전체를 청소해야 한다. 너무도 번거로운 과정이지만 피할 수는 없다. 집을 버릴 수도, 반려동물을 내보낼 수도 없으니 부지런히 치우는 수밖에. 반려동물과 살아가는 주인의 의무는 우리의 삶과도 닮아있다.


<로마>에서 반려견 ‘보라스’의 비중은 지극히 낮다. 단독으로 클로즈업되는 장면조차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 존재한다. 외출했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 통통 몸을 튀기는 것으로, 복도에 배설물을 남기는 것으로 존재를 알린다. 그런 보라스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클레오다. 오직 클레오만이 그의 흔적을 치우고 이름을 불러준다. 반려동물과 지내다 보면 귀찮은 마음에 외면하고 싶은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오래간만에 얻게 된 휴식에 누워있고만 싶은데 사정을 모르는 동물은 자꾸 놀아달라고, 산책하자고 보챈다. 그러나 나에겐 잠깐의 휴식이 그에겐 고독의 터널 끝에 간절히 기다렸던 시간임을 알기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요청에 응한다. 내가 데려온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이다. <로마>에서 클레오는 그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인물이다.


반면 클레오가 일하는 가정의 가장 안토니오는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자신만의 욕구를 충족한다. 그는 거대한 차를 타고 등장한 뒤 곧바로 차를 타고 떠나버리면서 (이후 한 장면에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영화에서 퇴장한다. 


등장과 퇴장 장면 사이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집에 들어올 때는 차의 바퀴로, 집에서 나갈 때는 구둣발로 보라스의 배설물을 밟는다는 것이다. 안토니오가 떠나자 실의에 잠긴 안주인 소피아는 클레오에게 ‘망할 개똥 좀 치우’라고 화풀이를 한다. 클레오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묵묵히 소피아의 말에 따른다. 


가장에게 집은 마음대로 들락날락거리는 곳이 아니다. 가족들과 소통하겠다는 마음으로 들어서야 하고, 밖에선 집을 위해 책무를 다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서야 한다. 개똥은 그가 저버린 책임감이다. 하지만 고작 그런 하찮은 것에 안토니오가 붙잡힐 리 없다. 잠깐 성가실 뿐, 그에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결국 이를 처리하는 건 남겨진 클레오의 몫이다. 


삶에는 거대한 행복과 불행만 있는 게 아니다. 큰 사건들 사이의 공백에는 1인분의 책임이 있다. 너무 사소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한 번만 저버려도 삶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마치 수시로 치워주지 않으면 금세 더러워지는 소피아네 집의 복도처럼 말이다. 


영화는 왜 하필 가정부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기존 매체에서 묘사되는 가정부는 집안의 부유함을 나타내는 척도로만 기능한다.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직업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른 영화라면 편집되었을) 집안일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더라도 우리는 매일 하루치의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며 부지런히 살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 집안일이 이미 사용한 것을 다시 쓰기 위해 고치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더러워진 것을 방치하거나 매일 새 것으로 바꾸며 살아갈 수도 있다. 집안일처럼 티도 안 나고 고된 노동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소외된 자리에서 티 안 나는 노동을 수행하며 꿋꿋이 책임을 다하는 클레오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집안일하는 여성도 역사를 쓸 수 있다 


미시사가 거시사를 상징하는 작품들이 많다.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에서 관객은 은희를 통해 한국의 1994년을 체험하고, 신경숙 작가의 소설 <외딴 방>에서 독자는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을 통해 70년대 말 80년대 초의 노동현실을 알게 된다. 


그러는 <로마>는 클레오가 일하는 집안 문제와 혼란스러운 멕시코의 70년대 모습이 같이 보여주지만, 미시사가 거시사를 나타내는 작품은 아니다. 오로지 클레오를 중심으로 한 집안의 문제에만 집중할 뿐, 멕시코의 사회 현실은 풍경처럼 단편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영화의 배경인 1971년의 멕시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968년 10월 2일,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시위한 학생들과 반정부 시위대를 대상으로 학살 사건이 일어나 그 결과로 2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로부터 3년 뒤 1971년 6월 10일에는 사복경찰과 살인청부업자로 구성된 준군사조직이 거리를 행진하던 30여 명의 학생을 살해했으며, 그 뒤 무장운동을 전개하던 수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각종 실종 범죄가 자행됐다. <로마>는 바로 이 혼돈의 시기를 배경으로 삼았다. 


하지만 <로마>에서 이와 같은 사실이 자세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없다. 대사에 언급되지 않았더라면 배경이 1971년이라는 사실도 인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영화가 거리로 나가 현대사를 보여주는 대신 집안의 가정사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버려진 소피아와 임신한 아이의 남자에게 버려진 클레오의 삶은 시대의 격류와는 상관없지만, 그 자체로 험난하고 치열하다. 


여기서 클레오의 일이 가사 노동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가사 노동은 여성의 전유물이었고 노동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바깥에서 남성이 하는 일만이 중요하다는 사회 인식이 팽배했다. 역사에 기록된 인물 중 여성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남성들의 업적과 고통이 기록되는 동안 어떤 여성은 집안일로써 매일 삶이라는 전쟁을 치렀을 것이다. <로마>는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책임을 다 하는 안토니오에게 버려진 소피아와 페르민에게 버려진 클레오를 존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여성이 가정에 기울이는 노력을 절대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몇몇 대사를 통해 클레오가 고향을 떠나온 이방인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소피아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클레오와 소피아는 함께 연대하며 집안을 지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사이의 계급 격차는 공기처럼 은은하게 존재한다. 갑작스럽게 양수가 터진 클레오는 집안 할머니의 도움으로 어렵게 병원에 도착한다. 그러나 할머니와 병원 직원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클레오에게 호의적인 할머니도 그녀의 중간 이름과 나이조차도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소피아와 클레오가 고통을 토로하는 방식에서도 알 수 있다. 클레오는 소피아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며 해고할 것이냐며 불안해하고 소피아는 자신의 고민을 친한 친구와 병원 관계자 등에게만 털어놓는다. 남성 가장이 떠난 뒤 새롭게 쓰이는 집안의 역사는 소피아의 역사가 될 순 있지만, 클레오의 역사가 될 수는 없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아이 역시 살아온 시간이 짧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에서 배제된다. 소피아의 자식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페페는 영화에서 두 번 클레오에게 ‘내가 늙었을 때….’로 시작하는 기이한 말을 건넨다. 미래를 말하는 것이냐는 클레오의 물음에 페페는 단호하게 예전 자신이 늙었을 때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자신이 늙었을 때 파일럿이라고 하고 두 번째에는 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한다. 처음엔 아이가 흔히 내뱉는 허무맹랑한 말처럼 들리지만, 두 번째에는 예언처럼 들린다. 페페가 물에 빠져 죽는 상황을 묘사할 때 눈앞에서 파코와 소피가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는 페페의 예언을 뒤로하고 수영도 못하는 몸으로 두 아이를 구함으로써 이방인임에도 집안의 역사를 지켜낸다. 


역사가 외면한 여성 클레오는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으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역사가 부재한 아이 페페는 이야기를 꾸며냄으로써 자신만의 역사를 창조해나간다.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이 어린 시절 자신을 길러준 가정부 리보 로드리게즈를 모델로 완성한 자전적 영화이다. 가장 순수하게 클레오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페페는 알폰소 쿠아론의 페르소나이다. 


역사서를 빼곡히 채우는 건 전쟁이다. 우리는 뺏고 죽이며 경쟁하는 남성들의 이야기를 배우며 성장했다. 한없이 잔잔하기만 한 평화로운 일상은 기록되지 않는다. <로마>는 평화로운 일상을 지탱하기 위해 여성들의 노력을 역사에 기록한다. 


<로마>가 뛰어난 걸작이라는 말에 이견이 없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클레오의 가정부 동료 아델라를 다루는 방식이다. 어쩌면 그 집에서 클레오에게 비슷한 처지이면서 고향의 언어를 공유하는 아델라만큼 심적으로 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델라 역시 고향을 떠나 일하면서 고뇌가 있을 텐데 항상 기계적으로 클레오를 위로해주거나 격려한다. 소피아가 클레오를 가족 여행에 데려갈 때도 사람 좋은 미소로 가도 된다고, 자신이 집을 지키겠다고 말할 뿐이다. 집에 종속된 여성에게 보내는 영화의 찬사가 아델라에게까지는 닿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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