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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Jun 07. 2022

굶을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바뀔 힘도 있다

인간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영양분을 섭취한다. 제때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영양실조가 오고 이는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인간에게 권장되는 영양분 섭취의 횟수는 하루에 세 번.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에게 먹는 것은 생존이다. 


굳이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이 사실이 전혀 당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본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해서가 아니다. 굶어서 아픈 것보다 먹어서 살이 찌는 게 더 두려워서다. 


내가 그 당연한 진리를 외면한 적은 없었다. 살이 찌는 건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지만, 그게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을 거부할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TV나 화보에서 날씬한 몸매를 보면 부러워하긴 했지만, 굳이 내가 저들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들이니 나는 나의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2년 전 어느 여름, 거대한 스트레스에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음식과 거리두기


원래 나는 먹기 위해 산다는 표현이 정확할 만큼 먹는 것을 좋아했다.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을 때면 행복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고, 무언가를 먹기에 부담스러운 새벽이 되면 마음껏 먹어도 되는 아침이 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저녁을 먹고 그 배부름이 가시기도 전에 내일 먹을 점심을 계획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스트레스 역시 기름지고 매운, 자극적인 배달 음식을 먹어 치우면서 해소하곤 했다. 


그랬던 내가 상상도 못 했던 종류의 스트레스를 마주하고 음식 앞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2년 전 어느 여름, 번아웃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동시에 찾아오면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입맛이 없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동안은 적정량의 스트레스만 받아서 몰랐을 뿐, 사실 나는 힘들면 입맛이 없어지는 타입이었다. 


입맛이 없는 감각은 그리 낯설고 기괴한 느낌은 아니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다. 문제는 항상 아무렇지 않다는 점이다. 허기와 식욕을 느껴야 하는 타이밍에도 음식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먹은 게 없으면 다급해져야 하는데 끝까지 아무런 위기의식도 느끼지 못한 채 하루를 마무리한다. 한 끼만 놓쳐도 배고프다며 호들갑을 떨던 내가 점점 끼니를 거르는 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식욕의 부재가 음식에 대한 거부감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꽤 오랫동안 입맛 없는 상태로 방치됐을 땐 음식을 먹는 것은 물론 음식을 보는 것, 생각하는 것에도 거부감이 들었다. 배가 고파서 이젠 정말 먹어야겠다고 생각해도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다가 속이 울렁거려 식사를 포기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입맛이 없고, 입맛이 없으니 먹지 않고, 먹지 않으니 무기력하고, 무기력하니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자책하고, 자책하니 스트레스를 받고, 그래서 또 입맛이 사라지는 악순환이 몇 개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어느 날은 베이글 반 개로 하루를 보냈고, 심한 날은 하루에 아메리카노 한 잔만 마시기도 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란 쉽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도 누가 챙겨주지 않는 이상 내 힘으로 음식을 찾는 일이 그렇게 버거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약속 장소에 나가서야 간신히 하루의 처음이자 마지막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러던 중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항상 상냥했던 지인이 웃음기를 싹 뺀 진지한 얼굴로 지금 나의 상태가 언제 거식증에 걸릴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라고 경고한 것이다. 게다가 거식증은 폭식증까지 동반한다는 놀라운 말을 전했다. 지인의 입을 통해 먹지 않음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들으면서 애써 외면했던 진실을 천천히 인정했다. 먹지 않는 것은 단순히 살이 빠지는 효과로 포장할 수 없는, 나에 대한 학대였다. 


몇 개월에 걸쳐 겨우겨우 먹는 습관을 되찾았다. 현대인에게 스트레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니 당연히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스트레스가 나를 찾아왔다. 하루하루 열심히 버티다가도 문득 입맛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 또 굶기의 지옥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해지고, 곧바로 끼니를 거르겠다는 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아무리 먹는 즐거움을 잃어도 일단 음식이 눈앞에 있으면 먹게 되어 있다. 그렇게라도 먹고 나면 내가 나를 무사히 돌봤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어느 날은 헛구역질하면서까지 눈앞의 음식을 먹어 치운 적이 있다. 나는 그 헛구역질이 불쾌하지 않고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는 훈장으로 느껴졌다.    

* 입맛이 너무 없을 땐 토핑을 잔뜩 올린 요거트라도 먹으면 든든하다  


어떻게든 먹으면 입에 들어가기는 한다. 그러한 시도가 나의 식욕을, 생에 대한 의욕을 아주 잠깐이라도 연장한다. 그것이 내가 오랫동안 ‘입맛 없는 상태’와 싸우면서 얻은 결론이다. 이 결론을 얻어내자 진작에 고민했어야 할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처음 입맛을 잃었을 때, 대체 왜 나는 그 상태를 몇 개월이나 방치한 걸까? 그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입맛이 없는 내가, 끼니를 거르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맛있게 먹어서 미안한 우리들


‘인간은 먹어야 한다.’라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서 어떻게 굶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놀랍겠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하는 대신 입맛을 잃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여성들의 세계에서 식욕의 부재는 축복이었다. 


주변 친구들은 다이어트라는 목적을 향해 음식과 끝이 없는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누구든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면 ‘이렇게 먹으면 안 되는데’라는 식의 말을 꼭 덧붙이면서 죄책감을 드러냈다. 그 죄책감은 지방이 분해되는 무언가를 먹는다든가 평소라면 대중교통을 타고 갈 곳을 걸어서 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즉시 해소되어야 했다. 


온종일 베이글 반 개만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고 착각했)을 때 내가 식욕에 굴복하지 않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겉으로는 걱정 어린 투로 나의 식욕 부진을 털어놓았지만 실상은 ‘봐, 너희들이 아등바등하며 좇는 목표를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이뤄냈어!’라고 말하며 먹지 않는 나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목표는 당연히 ‘먹지 않아도 먹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나의 상태를 두고 대부분은 잘 챙겨 먹으라며 걱정했지만, 한두 명은 노력하지 않아도 음식과 멀어지는 나를 부러워했다. 자신은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탈이라며 본인의 식욕을 가져가 달라는 반응도 있었다. 80%의 걱정과 20%의 부러움 속에서 내가 선택한 건 20%의 부러움이었다. 머리로는 잘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굶는 시간에 비례하게 가늘어지는 허리를 만지면 그러한 경각심도 빠르게 사라졌다. 무기력보다 뱃살이 더 무서웠던 시기였다. 이 혼돈의 시기에서 빠져나와 가까스로 음식과 극적인 화해를 이뤄냈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격렬하게 먹는 일과 싸우는 여성들이었다. 


2019년 11월, 나는 같은 지면을 빌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진한 화장과 노출 의상을 어른이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한 동영상에서 아주 인상적인 말을 들었다. 어른이 된다고 입술이 갑자기 붉어지거나 허리가 가늘어지거나 아이라인이 생기는 게 아니라고. 결국 아이들이 따라 하는 건 그냥 성인 여성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성인 여성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나의 사적인 폭력, <내겐 너무 불편한 학예회> 중에서


내 눈에 비친 미디어에선 예쁘고 날씬한 여성들이 대부분이고, 보편적인 미의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들은 놀림거리로 소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잘록한 허리가, 가는 팔다리가 인간의 당연한 조건이라고 착각한 채로 성장하게 되었다.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하면서 내가 인간의 조건이라고 여긴 것이 실은 사랑받는 여성의 조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극단적으로 음식을 거부했던 그때, 날이 갈수록 잘록해지는 허리를 본 순간 느낀 건 내가 미의 기준에 다가가고 있다는 기쁨이었다. 위의 글을 쓰고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내 손으로 진한 화장과 날씬한 몸매는 자연스러운 성장의 결과가 아니라고, 사회가 요구하는 성인 여성의 모습이라고 썼으면서 정작 내가 식욕을 잃고 (기분상) 날씬해지자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이다. 


사회는 여전히 날씬한 몸매가 여성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위의 글을 썼을 때보다 날씬함을 갈망하는 연령대는 낮아지고 날씬함의 기준 또한 더욱 가혹해졌다. 그러는 사이 음식을 거부하는, 그 무시무시한 나를 향한 학대 행위는 여성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기본자세로 자리 잡았다. 어느새 여성들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설마 지금 네 상태에 만족하는 거야?’라고 물으며 압박감을 주는 사이가 되었다. 


미디어는 몸매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을 더욱 공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까지 만들어 주었다. 그렇지만 이 기이한 몸매 강박을 단순히 미디어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애초에 미디어가 그러한 내용을 담게 된 것도 이미 사회의 고정관념이 그렇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고, 사회가 날씬한 몸매를 갈망하는 것 외에 여성이 욕망을 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나의 최대 관심사는 최대한 하루에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 한 끼 한 끼 정성 어린 식사를 하는 것이다. 먹는 이유엔 쾌락보다는 의무감이 크지만 중요한 건 어쨌든 굶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 불가피하게 공복의 시간이 길어지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뱃살이 들어간 나의 허리를 만지작거린다. 지금 내 허리가 가는지, 뱃살이 삐져나오진 않았는지 확인하는 이 강박증 같은 행위를 대체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굶을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바뀔 힘도 있다


섭식장애를 겪은 주변인들에게 추천하는 두 권의 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와 <욕구들>이다. <명랑한 은둔자>는 십여 년 동안 냅이 쓴 에세이들을 모아 그가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과 살아가면서 얻은 깨달음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서술한 책이고, <욕구들>은 자신의 섭식장애 경험을 중심으로 이 사회의 여성들이 왜 온 신경을 몸무게에 쏟는지, ‘예쁘고 보기 좋은 나’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거세해 버린 여성들의 욕구는 어디로 갔는지를 다룬 책이다. 


두 권의 책에서 드러나는 캐럴라인은 자신이 겪은 고통이 절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어느 위치에 차지하는지를 명확히 인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알코올과 굶기에 중독되었던 당시 자신이 어떤 심리였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욕구들>의 서문에서 냅은 자신이 마트에서 처음 코티지치즈를 산 순간, 이후 모든 끼니를 그 치즈로 대체하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인데도 겉보기에 너무 평범하고 무해해 보여서 좀처럼 그런 일로 인지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배불리 먹고 난 뒤에 나오는 탄식, 회개리카노('회개'와 '아메리카노'를 합성한 말로, 과식한 뒤에 낮은 칼로리의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과식한 것을 뉘우치는 행위)라는 반성의 의식, 여름을 대비한다거나 예쁜 모습을 기록하겠다는 명목으로 갑자기 맛있는 음식에게 결별을 선언하는 행위 등 얼마든지 날씬함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이 모든 행동들이 여성들의 사회에선 너무나 평범하고 무해해 보여서 아무도 이에 대해 경고음을 울리지 않는다. 


*나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는다  


<명랑한 은둔자>에서 그는 자신의 오랜 거식증 경험 끝에 깨달은 바를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나는 공책을 꺼내어 굶기가 얼마나 유용한 수단이었으며 그것이 나를 실망과 분노와 상실감 같은 감정들로부터 얼마나 잘 막아주었는가 하는 생각을 적어보았다. 그다음 적은 것 위에 가위표를 그어 지워버리고 이렇게 덧붙여 적었다. “이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굶기만큼 어렵진 않다. 결코 굶기만큼 어렵진 않다.”


섭식장애를 겪고 있거나 겪는 사람을 아는 이라면, 이 중요한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굶을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바뀔 힘도 있다.

- P. 176


냅의 글은 전 세계 대부분의 여성이 당연하게 겪어왔던 고통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핀셋처럼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꼬집는다. 당사자조차 외면했던 고통에 맥락을 부여하고 그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한다. 


그러니까 굶기의 지옥에서 허우적댔던 나도, 그런 나에게 부럽다고 말한 친구들도, 지금 이 순간 음식 앞에서 망설이는 어느 여성도 잘못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책하는 대신 한 숟가락이라도 더 건강한 음식을 입에 넣어야 한다. 굶을 힘이 있는 우리에겐 바뀔 힘도 있다.



[나의 사적인 폭력] 18. 굶을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바뀔 힘도 있다 – 아트인사이트 (art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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