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도 하면 안 되는 이유
회계사인 남편과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가 만약 회계사가 안 되었다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시작은 남편이 변호사 업무가 참 힘들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였다.
남편은 회계사이긴 하지만 지금은 투자 관련 업무를 하면서 회계사와 변호사를 고용하는 입장이 되었다.
남편의 역할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일종의 중개인이다.
앞으로 성장할 회사, 그런데 초기 투자자금이 모자란 회사(A)를 찾는다.
그리고 투자할 돈은 많은데, 어디에 투자할지 고민인 사람이나 회사(B)도 찾는다.
그리고 이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어준다는 것은 단순 소개가 아니다.
두 회사가 서루 윈윈 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를 지원해 준다.
예를 들어 투자대상 회사(A)의 새로운 경영진을 찾아서 보내주기도 하고, 투자의 형태를 주식으로 할 것인지 채권 또는 전환사채로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 B에게 조언한다. 그러다 보니 변호사와 회계사에게 용역을 맡기는 입장이 되었는데, 객관적으로 회계사의 라이프가 더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 부부 모두 회계사이니 그런 거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회계사의 장점을 또 서로 마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개업 의사처럼 한 곳으로 매일 출근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 좋다.
변호사보다는 숫자와 회계라는 장벽이 있다 보니 전문성을 키우기에도 더 좋다.
아픈 사람, 힘든 사람이 주 고객이 아니라서 좋다. 등 등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고, 자기 분야의 전문성이 탁월한 변호사님들에게는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지만, 뭐 어떤가 우리끼리(회계사 지들끼리) 기분 좋자고 하는 이야기인 것을 말이다.
신나게 회계사 예찬론을 피다가 문득 '내가 20대에 회계사를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남편에게 먼저 물어봤다.
남편은 고등학교 성적이 워낙 좋아서 어디든 골라 갈 수 있는, 그러나 (아쉽게도?) 문과를 선택했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의대보다 법대나 경제학과를 더 쳐주었다고 한다.
남편은 법학보다는 경제학이 좋았는데, 대학교 가서 재경 행정고시를 볼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육계에 계셨던 아버님이 그런 일은 "옷 벗고 나오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에 마음을 바꾸어 회계사 시험을 준비했다고 한다. 만약 행정고시나 사법고시를 준비했다면 어땠을까?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동기이니까 잘 나갔다면 그 언저리쯤에 있으려나?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을 것 같다. 남편 사주는 "돈을 만지는"사주라고 했다. 지금처럼 투자업에 있는 것이 딱 팔자인 것 같다.
그럼 나는 어땠을까?
수학과 4학년 시절에 탁구수업을 안 들었다면? 그래서 경영학과 오빠들에게 회계사 시험에 대해 들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냥 수학과4학년 마치고 바로 졸업했다면? 그럼 아마도 내 수학과 여자 동기들처럼 당시 IT회사에 취직되었을 것 같다. 전산동아리(예전엔 컴퓨터 사용하는 동아리를 전산동아리라고 불렀다. 도스 시절이다. 도스는 윈도 이전 운영시스템이다) 출신이니까 개연성이 높다.
당시 수학과를 나온 친구들은 IT관련 회사에 취직하거나(삼성, 대우 등), 중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교직을 이수하고 교생까지 마쳤지만, 수학을 가르치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똑같은 내용을 여러 반에 가서 여러 번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지겹게 느껴졌다.(지금은 강의가 재밌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도움이 된다는 확신, 그래서 어떻게든 잘 알려주고 싶은 욕구가 그때는 없었다)
IT회사를 간 다음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오래 못 견디고 퇴사했을 것이다.
당시 IT업계의 업무 강도는 높고 근무환경은 좋지 않았다. 당시 입사했던 친구들 중 하나는 차라리 의사가 되겠다며 의대에 진학했다. 또 한 친구는 다시 시험 보고 교대1학년으로 입학해서 지금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또 다른 두 친구도 퇴사하고 수학공부를 더 하겠다고 유학을 갔다. (물론 모두 퇴사한 건 아니다. 남자 동기중 한 명은 네이버 입사해서, 아직도 다닌다.)
나는 대학을 다시 가지는 않았을 것 같고, 해외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던 시기라 유학을 갔을 것이다. 배움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같이 공부하면서 만난 누군가와 결혼해서 해외에 살고 있으려나?
유학 간 수학과의 두 절친은 모두 그렇게 해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한 명은 바이오사이언스 관련 교수로 한 명은 구글 개발자로 일한다.
그런 상상을 하다 보니 숨이 막혔다. 우리말로 하고 싶은 말이 너무너무 많은데, 영어로 공부하고 가르치려면 얼마나 답답한 상황을 많이 만나게 될까? 실제로 교수하는 친구에게 그런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 들었던 터라 막연한 걱정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나라에 살면서 내 나라 말로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상상조차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아이가 태어나기 이전의 과거는 어느 한순간도 후회하거나 변화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바웃타임이란 영화가 있다. 그 집안 남자들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냥 그 능력을 쓸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주인공의 여동생이 크게 다친 날, 그 일을 막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다가 현재로 돌아왔더니.. 내 아이가 다른 아이로 변해있었다. 그 장면에서 나도 충격을 받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과거에 변화를 주면 내 아이가 바뀌어 태어나는 것이다.
내가 회계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남편이 회계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못 만났을 확률이 크다.
그러면 지금 우리 딸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끔찍하지 않은가?
결국 회계사의 장점이고 뭐고, 우리는 그냥 회계사 팔자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