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음공부
바쁜 일정을 쪼개서 장을 본다. 조금 비싸도 아이들이 먹을 재료니까 유기농이나 무농약을 고른다.
어제 회사 일 때문에 늦게 잠들었더라도 아이들 아침을 맛있게 차려주려고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이렇게 해야 더 맛있다는 유튜버의 지시대로 안 하던 조리과정도 추가해 본다.
요리를 하는 내내 맛있게 먹을 아이의 모습을 상상한다.
자, 이제 다 차렸다. 아이가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이가 안 먹는다.
내가 만든 음식은 그냥 그렇게 남겨진다.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가능한 조리과정을 단순화하고, 먹지 않아도 화가 나지 않을 만큼의 정성만 기울여왔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나는 두 딸의 엄마다.
큰 딸은 생후 1년에도 또래 아이들보다 말 그대로 머리 하나가 컸다.
1세 아이의 전체 몸에서 머리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봤을 때 평균보다 많이 컸다는 뜻이다.
그 이후에도 반에서 제일 큰 아이는 우리 큰 딸이었다.
본인 입장에서는 키가 제일 큰 여자아이가 되는 것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키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을 때 눈에 잘 띄는 것도 실용적면에서 좋은 점이었다.
둘째 딸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평균보다 작지 않아서 역시 걱정을 안 했다.
아빠도 평균 이상이니까, '작은 키 유전자'는 없다고 믿었다.
서 있는 나를 본 사람들이 내가 큰 편이 아니라서 이 부분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도 있다.
내 키는 160이 안된다. 한국 여성 평균키를 찾아보면 158.17이라고 검색되는데, 내가 딱 그 정도 키다.
그러면 '키 작은 유전자'가 나에게서 비롯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동생은 나보다 크고, 내 사촌들도 모두 키가 평균 이상으로 크다.
그래서 나는 내 키 유전자는 평균 이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길게 설명했지만, 짧게 요약하자면 아이들 키에 대한 걱정은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둘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돼서 학기 초 자기 번호가 3번이라고 이야기하는 거다.
성이 "유"씨인데 어떻게 그렇게 앞 번호인가 궁금해하니, 이름 순이 아니고 키순이라고 했다.
"뭐라고? 반에서 너 보다 작은 아니가 단지 2명이라고?"
그때 처음 우리 아이 키와 신체 발달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 아이들 인바디를 측정해서 근육량과 섭취하는 영양에 대해 알려주는 검사를 받게 되었다.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근육량이 매우 부족하고, 단백질 섭취량이 아주 부족해서 영양 부족 상태로 진단된 것이다.
내 딸이 키가 안 큰 것은 유전자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엄마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가 잘 먹이는 것이 아니던가!
이때 내가 출퇴근이 바빠서 아이들 먹거리를 신경 못 쓰고 있었던 상황이라면 마음이 더 아팠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는 내가 회계사로의 내 커리어를 개발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가정과 육아에 두고 아이들을 잘 케어하는 것이 나의 우선순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이기 때문에 우리 아이가 영양 부족 상태라는 사실이 의아했다. 놀랐지만 자괴감이라기보다는 어떤 부분 때문에 영양이 부족할까에 대한 의아함이 더 컸다.
마침 요리를 알려준다는 후배가 있어서, 일단 요리를 배워보기로 했다.
나도 그전에 요리를 하긴 했었다.
내 요리를 지금 평가해 보자면 "자기중심적 요리"였다.
서두에 말한 이유로 요리에 큰 정성을 쏟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고, 내 입맛이 까다롭지 않다 보니 그렇게 해도 맛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닭고기로 요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닭고기를 마늘과 같이 냄비에 넣고 삶는다. 요리 끝!
김치나 밑반찬과 같이 먹으면 그게 건강한 음식이고, 내가 편한 요리였다.
아이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아마도 괜찮지 않았었던 것 같다. 표현을 할만한 다른 경험이나 언어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먹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둘째는 입이 짧은 편이라 음식에 따라먹는 양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때였다.
갓 지은 따뜻한 밥에, 간이 잘 맞는 다양한 반찬, 다양한 재료로 정성스럽게 우려낸 국물로 만든 된장찌개가 있는 밥상에서 아이는 평소보다 밥을 아주 많이 먹었다.
그래서 요리를 더욱 열심히 배웠고, 열심히 해 주었다.
닭고기 요리도 달라졌다. 집에서 교촌치킨 맛을 내는 닭 요리를 하기 위해 닭을 튀겼다.
꿀과 간장 다진 마늘 등으로 양념장도 따로 만들어서, 튀긴 닭에 소스를 버무렸다.
건강한 간식을 만들기 위해 집에서 빵과 케이크, 과자도 만들었다.
요리를 열심히 하고, 아이가 크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면서 문제가 생겼다.
차려놓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화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건강하게 만들려고 좋은 음식을 만들어 놓고, 안 먹는다고 화를 내며 아이가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엄마가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때 한 TV프로에서 여러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내시는 분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리는 것은 제 마음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 음식을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상대방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아, 그렇구나. 음식을 차리는 마음까지만 내 마음이구나..'
엄마들은 음식을 차리면서 맛있게 먹을 아이까지 내 그림에 넣어서 상상한다.
그래서 음식을 차리고 나서 내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맛있게 먹는 아이의 모습까지 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아이 나름의 그림이 있는 것이다.
내가 아침부터 일어나서 재료를 손질하고 양념장을 만든 장면, 며칠 전에 이 음식을 하려고 일부러 마트에 다녀온 장면은 내가 그린 그림에는 있지만, 아이의 그림 속에는 없는 것이다.
아이의 그림에는 그저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먹지 않았을 뿐인데, 화를 내는 엄마만 있을 뿐이다.
아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내가 기대했다고, 아이가 맛있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이는 그저 음식이 먹고 싶으면 먹을 것이고, 맛이 있다면 맛있게 먹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먹고 싶지 않다면 먹지 않아도 되며, 맛이 없다면 맛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아이가 자기는 맛이 없어도 남을 위해 늘 맛있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기를 원하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즐겁게 요리를 하면서 늘 생각한다. 이렇게 즐거운 마음은 딱 여기까지다.
이 음식을 먹든 말든, 맛있게 먹든 맛없게 먹든, 그것은 그들의 마음일 뿐이니 음식을 차린 이후에는 내 마음을 거두어들이자.
물론 지금도 시간과 정성을 쏟은 요리를 내놓으면서 아이의 "맛있다"는 소리를 기대하고, 안 먹고 가버리면 서운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다스릴 내 마음이란 것을 안다.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 계속 반에서 작은 편에 속해있더니, 중학교 가면서 키가 크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금은 엄마보다 큰 키로 대한민국 평균 여성의 신장보다 5센티 이상 크다.
내가 열심히 요리를 해주고, 내음식이 아닌 불량식품도 맘껏 먹도록 해 주어서 큰 것일까?
그저 클 때가 되어 큰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아이를 위한 요리를 해 주면서 내 마음이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엄마가 키우지만, 엄마의 마음은 아이가 키워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