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스럽지만, 말하지 않고는 지날 수 없는
별거진행중 - 1. 그날 밤, 아이와 집을 나왔다.
물질적인 조건과 나의 한 부분을 등가교환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두면,
무엇과 무엇으로 교환해야 합당할까.
휴가철의 해외여행은 스무 번쯤의 자괴감으로
깨끗한 집은 서른 번쯤의 외면으로 그 값이 같아질까.
깨끗한 동네의 신축 30평대 아파트, 외동 아들과 강아지 한 마리, 외제차 한 대, 중형차 한 대, 여름휴가 철의 해외여행, 1년에 한 번 명품백 하나, 남편과 아내 모두 대학원 수료, 생활비 걱정없는 여유로운 생활, 안정적인 양가 부모님들.
누군가 겉으로 보았을 때 편안한 삶이라고, 누구나 고민 하나씩은 가지고 산다고 자위하며
표준화된 가족의 형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정도면 괜찮다고, 세상에 단점 없는 사람 없다고 반복되는 상황을 못본척 했다.
그날 밤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그 가족의 형태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날 밤이 아니었다면.
여느 3살 아이처럼 자기 싫어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겨우 재웠다.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방문을 닫고 나와 대충 거실을 치우고 반찬 몇 가지를 하니 이미 새벽 한시였다.
아직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가슴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저녁 무렵, 남편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 후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었다.
"나 거래처 사람이랑 저녁 먹고 들어가"
삐삐삐삐- 현관문 도어락이 오작동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방으로 들어가 자는 척을 했다.
문을 잠궈 놓으면 더 화를 낼께 뻔하니 방문을 잠그지 않고 아이와 자는 척을 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역시나 거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뭐라뭐라 크게 욕을 하는 소리, 이리저리 부딪히는 소리. 하지만 나는 애써 자는 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발 아이가 깨지 않길 바라면서.
그때 방문이 열렸다.
거칠게 나를 흔들어 깨우고는 이야기를 하자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술과 담배과 뒤섞인 냄새, 거친 목소리, 풀린 듯한 이상한 눈빛. 몇 번을 봐도 도저히 익숙해 질 수 없는 모습이었다.
평소에 가진 불만을 욕과 함께 말하기 시작했고, 이야기는 그 대상이 나에서 다른 누군가로 옮겨갔다. 그러다 내가 대꾸를 하지 않으니 식탁 의자를 던지고, 아이의 장난감을 발로 차고, 청소기를 부셨다.
정말 너무 무서웠다.
이것을 무섭다고 밖에 달리 표현 할 수 없다.
그러다가 내 머리채를 잡고 말했다.
"너 남자있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정체가 없는 남편의 분노가, 폭력이 그리고 나의 무력함이 무서웠다.
남편은 묻고도 어떤 답도 원하지 않았다. 무서워하는 내 표정에 더 화가나는 듯했다. 몇 시간이나 더 분풀이를 하고, 나를 이리 잡았다가, 저리 끌었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남편이 잠시 화장실에 가있는 사이 아이가 잠든 방에 들어갔다. 잠에서 깼지만 눈을 꼭 감고 있는,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이 자는 척을 하는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뒤돌아 보지 않고 이불 속에서 더듬더듬 아이의 애착인형을 찾아 잠옷 위에 점퍼만 걸친 채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들어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