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이 품은 '쉼'의 땅
지리산 연곡사
3년 차 여름 휴가지로 템플스테이를 다녀오겠다고 결심한 후 계획을 짰다. 템플스테이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만 한 지 10년 만에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며칠 동안 2박 3일 동안 있을 절에 대해 전국적으로 리스트를 꼼꼼히 살피면서 찾아보았다. 정리된 조건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권, 전라권에 있는 절
체험형 말고 아무것도 안 하는 휴식형 프로그램이 있는 절
산 골짜기 깊숙이 있는 절 (핸드폰 전파가 안 터지면 더더욱 좋음)
별로 유명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는 절
이런 조건이었는데 좁혀진 곳은 지리산 권역으로 산청이나 구례 쪽에 있는 절이었다. 산청에 있는 대원사는 너무 유명해서 이미 8월 예약이 다 찼고, 구례의 화엄사는 1박에 무려 10만 원이었다. 그럼 구례의 천은사냐 연곡 사냐인데, 왠지 연곡사가 답인 것 같았으나 절의 연식이 오래되지 않은 느낌이라 먼저 천은사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저 혹시 8월 9일에 템플스테이 예약할 수 있나요??”
“음 그날에 여기 100명 단체 예약이 있어서요, 힘들 것 같네요~”
“아 네…”
그리하여 결정한 연곡사는 친절하게 나를 받아주었고, 머무는 동안 내 자취방보다 더 큰 방을 혼자 쓰면서 내가 이렇게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7년 만에 다시 내려온 구례는 바뀐 것이 있는 듯… 없는 듯… 아리송했지만 특별하게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단지 내 기억 속에 사라졌을 뿐. 이제 채소만 먹어야 하니 가기 전에 고기를 먹고 가자 하여 1시간 후에 오는 버스 시간 사이에 제육볶음을 거하게 먹고 피아골 골짜기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골짜기를 들어가면서 제발 멈추지 말고 깊숙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속세와는 이제 드디어 이별이다.
입실시간인 3시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하여 고요한 산사를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을 냈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당황했는데, 곧이어 템플스테이를 담당하시는 법제 스님이 나타나 사람이 있는 것에 깜짝 놀라시고는 곧 숙소를 안내해주셨다. 그리고 옷이나 식사시간 등을 전달받았다. 문득 들었던 의문이 입 밖으로 나왔는데, “저는 이제 뭘 하면 될까요??”
“허허허 글쎄요 저녁 식사시간까지는 자유롭게 있으시면 되어요. 요 밑에 계곡도 나가보셔요~”
성격상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 하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해야 했던 나에게 ‘오로지 쉼’이란 도전과도 같았다. 과연 내가 쉴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하루밖에 없는 휴무날에도 일하느라 돌보지 못했던 집안일을 해야 하고, 나 자신이 나일 수 있도록 개인정비 시간도 가져야 한다. 내 삶은 보이지 않는 시간차 계획에 얽매여 있었다. 그때는 전화 연락과 카톡 메시지 조차 싫어져서 핸드폰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놓여있었다. 여름휴가를 앞두고 있던 나에게는 깊숙한 자연 속에서 좋은 공기 마시며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가 정당화될 수 있는 템플스테이가 유일한 답이었다.
스치듯 들어만 보았던 지리산 피아골과 노고단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연곡사는 맑은 공기는 물론이요 상류에 위치해 있어 유속이 센 계곡이 바로 아래에 있다. 고무신을 신고 계곡 아래로 내려가 발을 담그고 책을 펴니 이곳이 무릉도원이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이 좋은 곳을 놓칠 리없는 속세인들을 멍하니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껴보았다.
식사는 내가 왜 제육볶음을 먹고 왔나 후회스러울 정도로 맛있는 음식들이 나왔다. 우동부터 시작해서 절에서 직접 기른 산나물로 만든 반찬까지 매 끼마다 어떻게 이렇게 잘 나올 수 있을까, 혼자 차려먹던 빈약한 자취 음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전국으로 템플스테이를 다니시는 어느 보살님에 의하면 연곡사 밥이 최고라고 하셨다.
핸드폰 멀리하기 체험 중이라 사진은 없습니다.
저녁을 먹고 배가 부르니 피아골 끝자락 직전마을로 쉬엄쉬엄 올라가 보았다. 거리는 산길 입구까지 2km 정도로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였다. 속세에서 파는 아카시아 꿀과 여러 담금주들이 유혹했지만 피아골탐방지원센터 입구까지만 올라가 보고 다시 내려왔다. 언제쯤 이 산의 가장 꼭대기에서 밑을 내려다볼 수 있을지 항상 그 시기에 대해 고민만 하게 된다.
핸드폰 멀리하기 체험 중이라 사진은 없습니다.
8시가 되어 온 사방에 어둠이 내리고 주위에 불빛이라고는 내 방에 켜진 형광등 불빛 하나뿐이니 벌레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와 창가를 에워쌌다. 행여라도 방에 모기나 벌레가 들어올까 조바심에 저녁 밤하늘을 제대로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핸드폰 데이터도 꺼 놓은 상태라 알람 기능만 켜놓고 책을 펴서 몇 구절 읽으니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하루 더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자고, 점심 먹고, 계곡에 내려가서 책을 읽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을 먹고, 직전마을까지 산책하고, 씻고 잤다. 템플스테이에 가서 새벽 예불 때문에 꼭 일찍 일어나야 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 날에는 연곡사를 한 바퀴 돌면서 사찰의 국보와 보물을 자세히 살펴보고 아침식사 후에 스님과 차담도 했는데, 일을 하다 오는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를 어루만져주는 유익한 대화였다. 맑은 하늘 아래 지리산 골짜기에 안겨있는 연곡사를 한번 더 둘러보고 점심을 먹은 후 구례 시내로 내려왔다. 너무 쉬기만 했는지 다음에는 사찰과 관련된 체험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연곡사는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유홍준 교수님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도 나올 정도로 가치 있는 산사 중 하나이다. 분명 본편을 학부시절 읽었을 터인데 완전히 잊어버린 마당에 재편집된 ‘산사’ 편에 다시 나오니 괜히 반가웠다. 연곡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참고하길 바란다.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는 나에게 있어 구례는 ‘나’라는 굴레를 벗어나게 해 준 도시이다. 왜인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특별한 계획을 세우고 싶지도 않았고, 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의식이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계획이 없어도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는 신기한 경험을 안겨주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쉼’이라는 개념을 일깨워 주었다. 21살 이후로 다시 철저한 인생 계획에 맞춰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였고, 여행도 시간과 목적을 철저히 계획하여 다녔지만, 7년 만에 다시 구례를 만난 것은 이제는 마음에 여유를 가져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함인가 한다. 이게 다 지리산이 부리는 마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산(靈山)에는 분명히 우리가 모르는 어떤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