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숲길은 지나칠 수 없다.
해남은 한반도의 서쪽에 있는 땅끝이라, 동쪽 끝에 살았던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쯤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인생의 첫 기차여행에서 기차역이 없는 해남에 굳이 버스를 타고 들어갔던 것은 내가 서 있는 이 한반도 땅끝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TV 예능 ‘1박 2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아온 지금까지 해남에 3번이나 갔는데, 의외로 이 많은 기회에서 매 번 같은 장소에 간 것은 그만큼 해남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에게도 20대의 극 초반, 중반, 후반부에 걸쳐 그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두륜산의 기억이 각 시기를 대변하는 상징처럼 남아있다.
유선관
20년간 경상도에서만 살았던 나에게 전라도 지역이란 거의 남과 북의 관계처럼 가까이 있으나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연고가 전혀 없는 데다 좋지 않은 감정까지 있어서 지역과 사람에게 ‘벽’처럼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두 다리로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가장 먼저 그 벽을 부수고 싶었다. 5일짜리 첫 내일로 여행에서 담양을 여행한 후 광주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간 두 번째 여행지는 해남이었다. 기차가 다니지 않고 버스 배차도 많지 않아 뚜벅이 여행자에게는 난이도가 높은 여행지이지만, 그때는 단 하나의 목적지를 위해 모든 것을 도전해볼 수 있는 열정이 있었다.
해남의 두륜산 중턱에 있는 대흥사로 가는 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이 있다. 지어진지 100년이 다 되어가던 한옥 여관을 ‘1박 2일’을 통해 처음 알게 되면서 저 여관에서 하룻밤이라도 지내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한옥 체험이야 마음만 먹으면 서울의 북촌도 그렇고 안동이나 경주 등 어느 지역에서도 가능하지만, ‘여관’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수십 년 동안 객들에게 잠자리를 내어준 한옥은 요즘 시대에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이라, 유독 흥미롭게 다가온 ‘1박 2일’의 회차였다.
여행지를 결정하면서 해남행을 마음먹고 유선관을 예약하려고 했더니, 다행히 새내기 대학생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방도 남아있어 방송의 여파에 대한 우려와는 달리 어렵지 않게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다. 여행 당일 일정 때문에 저녁 늦게 합류하기로 한 친구를 뒤로하고 혼자 먼저 해남 터미널에 내려 대흥사 입구까지는 버스를 타고 내렸는데, 버스가 대흥사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대흥사 쉼터에서 유선관까지 2.5km나 되는 거리를 5일 치 배낭을 메고 걸어 들어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선택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는지 열정과 체력이 가상하다. 만약 지금이었다면 택시를 탔거나 여전히 가난한 경우 히치하이킹에 도전했을지도.
유선관에 도착해서 방을 안내받고 친구가 오기 전까지 바로 옆에 흐르는 계곡 물에 발을 담그거나, 방 안에서 뒹굴뒹굴하며 쉬었다. 친구는 어둠이 내리고서야 택시를 타고 유선관 문 앞으로 오게 되었는데, 아마 얼마나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왔는지 그때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 조차도 그때 걸었던 대흥사로 가는 길고 긴 숲길이 지금에 와서 얼마나 ‘일적으로’ 의미 있는 곳인가 (소위 그림빨이 되는 곳인가)까지 생각하진 못했지만, 하늘이 살짝살짝 보이는 숲으로 우거진 도로를 직접 걸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동차’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지금은 의도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오래 걸을 일이 없어졌지만, 유선관에 묵는 것 이상으로 그 숲길을 만나고 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100년 된 여관에서의 하룻밤은 고택체험 이상으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조금만 올라가면 나오는 대흥사를 깊은 산 맑은 공기 속에서 한 바퀴 산책하고 돌아오면 아침식사 시간이다. 미리 신청해놓은 10첩 놋그릇 반상을 아침으로 먹으니 여행의 첫 아침식사 치고는 호화 그 자체였다. 그 후로는 게스트하우스의 간단한 아침이 익숙해졌지만. 배를 든든히 채우고 이불을 개고 짐을 싸서 나오니 주인 부부께서 산 아래로 내려갈 일이 있으시다며 우리를 태워주겠다고 하시고는 친절히 두륜산 케이블카 앞까지 데려다주셨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정’이란 무엇인지 서서히 알아가게 해 주었던 첫 번째 경험이었다.
해남 패키지여행
두 번째 해남은 백수로 집에 있는 동안 지금도 그렇지만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든 조합인 엄마와 동생과의 관광버스 대절 여행이었다. 동생은 그때 해병대 휴가 중이었다. 주말 아침 부산 서면에서 출발하는 관광버스를 타고 당일 치기로 해남과 장흥을 둘러보고 왔다. 여행사의 국내여행 코스에는 많은 지역이 있었지만, 굳이 갔던 곳을 다시 보고 오려는 것은 첫 여행에서 느꼈던 아쉬움과 다른 사람이 내가 보고 온 것을 같이 보고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처음 두륜산에 올랐을 때 흐린 날씨에다 아침 안개 때문에 주변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첫 여행 때는 날씨와 상관없이 그저 정해진 대로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내려와서 땅끝마을로 향해야 했는데, 우리는 폭우와 함께 땅끝 전망대에 서 있었다.
따뜻하고 싱그러웠던 유선관에서의 기억과는 달리 첫 해남은 비 때문에 좋지 않았는데, 다행히 가족들과의 국내 패키지여행은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물론 정해진 시간에 버스를 다시 타야 하는 긴박감은 있었지만, 버스가 대흥사 앞마당에 내려주고, 케이블카 주차장까지 데려다 주니 그때 왜 그렇게 고생했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간 오로지 내가 가고 싶은 곳만 가겠다는 자발적 뚜벅이 여행만 고집했던 나에게 패키지에 대한 오해(?)를 해소해주는 여행이었다. 비록 아름다운 숲길은 오래 느낄 수 없었지만 편하게 멀고 먼 해남까지 갔다 왔으니 뚜벅이도 그렇듯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대흥사 숲길
마지막으로 해남을 찾은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2년 차일 때였다. 어느 회사의 한식제품을 알리는 광고 제작을 위해 충청도 ~ 전라도 지역을 돌면서 필요한 장소를 찾는 일이었는데, 약 2년 만에 해남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오래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던 유선관을 일적으로 둘러봤지만 내가 묵었던 방을 슬쩍 찾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쓰일지도 모르는 대흥사의 풍경을 담아갔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걸었던 대흥사 숲길을 이제는 자가용을 타고 지나가면서 자동차 광고에 쓰일 법한 장소로서 카메라 앵글에 담았다. 숲 속에 있는 2차선 도로는 여전히 하늘색이 힐끔힐끔 보이고 끝이 어딘지 모를 만큼 굽이 굽이 이어져있었지만, 미적 감각이 필요했던 그때 한 앵글마다 담기는 모습에 그제야 이 숲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에 들어왔다. 직접 그 길을 걸을 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무거운 가방에 처지는 발걸음이 힘겨웠을 뿐 한국의 아름다운 도로를 찾아야 했던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만큼의 보는 눈은 없었던 것이다.
직접 마주하는 장소들은 어떤 상황에 놓이냐에 따라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이 일을 하면서 항상 드는 생각이다. 여행지로서는 아름답게 느껴졌던 장소들도 촬영 장소로 보면 그저 일터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라던가, 일을 하면서도 가장 멋있는 앵글을 카메라에 담아 가야 하는 직업적 소명으로 인해 그 장소가 멋지게 보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체할 공간이 없는 두륜산의 대흥사 숲길은 그 광고 이미지적 가치로 인해 앞으로도 찾게 될 것 같아 해남과의 인연이 더 이상 끝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