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늙지 않고, 나는 그냥 늙을 것이니
- 아무것도 아닌 나머지 날들 -
나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무게중심이 옮겨간다. 나머지 날들로
달력에 동그라미, 별표, 메모, 그 무엇도 없는 시간들로
중요한 날이나 특별한 시간이 아닌 ‘나머지들’속에서 내 나이테는 자라왔다는 걸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결의를 다져 운동하는 1시간 말고, 나머지 23시간을 바른 자세로 앉아 일하고, 싱크대 앞에서도 복근에 힘을 주고, 자꾸 허물어지려는 척추를 뽑아 올려 모델처럼 도도하게 걷고, 똑바로 누워 잠들며 내 몸을 아끼는 것이「진짜 운동」이다.
일 년에 한두 번의 해외 여행, 한 달에 두세 번의 국내 여행, 빛의 속도로 예매한 공연, 친구들과의 기분 좋은 만남 등 할 일이 잔뜩 적힌 날들 말고, 수첩이 빈칸인 나머지 300일. 그날들도 여행일 수 있을 때 「진짜 여행」은 시작된다. 이제 봄가을은 없다고들 하지만 사계절뿐 아니라 24절기의 마디마디를 숨은 그림처럼 찾아낼 때, 출퇴근 길 위의 지나치던 들꽃, 산책 나온 강아지의 호기심에 찬 눈빛, 매일 다른 하늘 풍경이 눈에 들어올 때.
설렘의 연애 시절 몇 년이 아니라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는, 길고 지루한 70년의 결혼 생활이「평균 수명의 질」을 결정하듯이.
24시간 중 1시간을 위해, 365일 중 65일을 위해, 연애가 지상 최대의 가치인 줄 알고 살았던 젊은 날들은 딱 그 만큼의 산수도 채우지 못한 채 끝났다. ‘남의 날’들로.
반세기쯤 살고서야 ‘나머지 날들’이 보이고, 그 속에서 서먹한 ‘나’를 만났다. 오랫동안 연락 못해 미안한 친구와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나는 이제 예쁜 색상의 펜들로 수첩이 빈칸인 ‘나머지 날들’에 빼곡히 적어보려 한다.
나 자신을 충만하게 만나 갈 300일의 여정, ‘나의 날’들을 위해.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면 충분하다.
하지만 아마 매일 걷고, 홈트 하고, 읽고, 쓸 것이다. 음악도 듣고, 차도 마시고, 명상하며 살겠지. 좀은 심심하고, 쓸쓸하게.
누군가 지켜 본다면 ‘아무 것도 안하네? 심심하겠다.’하겠지만 모든 걸 다 하면서.
나는 이제껏 주목받지 못했던 ‘나머지 날들’을, 지금껏 자주 연락하지 못했던 나 자신과 제대로 살아보려 한다.
“독거 노인이 되면 글을 안 읽어서가 아니라 말할 데가 없어서 입안에 가시가 돋는데. 더 늦기 전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레포츠를 배워둬야 해. 혼자하는 홈트나 독서 같은 거 말고. 구기 종목.”
십수 년째 경을 읊는, 동생을 챙기는 언니의 은혜로운 말씀에 나는 괄호 열고 답한다.
‘좀 지루하고, 외롭게 살면 어때? 뭐 그렇게 매순간이 재밌고, 한순간도 외로우면 안되는 거야.’
나는 생각한다. 나이 드는 일은 한 발짝, 한 발짝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일이 아닐까,하고.
중요하고, 특별한 날들에서 아무것도 아닌 나머지 날들로. 재밌고, 혼잡한 시간들에서 지루하고, 외로운 시간들로. 밖을 향하던 시선으로 내 안을 비추며.
나이가 들어가며 점차 더하기를 중단하고, 빼기만 하려 한다. 욕심도, 물건도, 힘도 다 빼고 최대한 자유로워지고 싶다. 『나이 공부』, 『느리게 나이드는 습관』, 『시니어 프라이드』 이런 힘이 들어간 제목의 책을 읽으며, 덜 늙기 위해, 잘 늙기 위해 뭔가를 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덜 중요한 것들,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며 내 삶에 아주 조금 남은 것들로 있는 그대로 살고 싶다.
「삶을 살지 않은 채로 죽지 않으리라」라는 제목의 詩에 밑줄을 긋는다. 오십대 중반의 어느 오후에야 문득 ‘내가 살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봄비처럼 스며 들었다. 생존 활동, 집안일 같은 건 후딱 해치우고, 뭔가 고차원적인 일을 쫓으며 살 때는 몰랐다. 먹고, 자는 일이 더 쉽게 삶의 질을 높인다는 것을. 소중하고 즐겁다는 것을. 또 충분하다는 것을. 그 속에도 책이 있고, 음악이 있고, 여행이 있다는 것을. 정지 영상 같은 우리집 고양이가 4배속 동영상으로 허둥대는 나보다 더 충만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만국의 열심주의자들이여. 나에게 잘 늙어야 한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그냥 늙을 것이니. ‘잘’은 젊은 날에 지나치게 했다. 내게서 점점 멀어지면서.
잘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연의 일부로 나이 들어가고 싶다. 더 좁힐 공간이 없을 때까지 바짝 내 곁에 다가서면서.
혼자만의 시간, 자유, 여유, 평화, 휴식, 홀가분함, 비움
아등바등 살던 젊은 날에 우리가 얼마나 그리던 미래인가? 그런데 정작 그날이 다가오니 또 뭔가로 채워야 한다고, 고독사 한다고 난리다. 생의 마지막은 누구나 고독사이지 않은가? 혼자 가는 길 위에 누운 그 시신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두려움 없이 고독과 함께 사라지고 싶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게 아니다. 보다 자기다워지는 것이다. -린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