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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연 Nov 20. 2024

개근 거지의 세상에서 선택한 자발적 가난의 가치

개근 거지의 세상에서 선택한 자발적 가난의 가치

                                                                                                                           -나연-     

최근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개근 거지’라는 신조어가 있다. 해외여행을 가지 않고 학교를 꾸준히 다녀 개근상을 받는 학생들을 지칭하는 혐오 발언이다. 요즘은 가정체험학습 제도가 있어 학기 중에 해외여행을 가는 아이들이 많아져 오히려 개근하는 아이들을 ‘개근 거지’라고 비하하는 말이 생겼다.

이 신조어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심각하게 슬펐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때는 6년 개근상이 모든 상을 통틀어 최고로 꼽혔다. 6년, 그 긴 기간의 ‘개근’에는 많은 가치가 내포되어 있었다. 근면, 성실함의 표본이며, 본받아 마땅할 최상급 모범으로 학력 우수상보다 높이 샀다.

내 어린 시절의 가치 기준들-근면, 성실, 모범-이 돈으로 대표되는 여가생활인 해외여행에 밀려 사라졌다면 차라리 나으련만, 비하 지경에 이른 사실 뿐 아니라 그런 가치 상실의 장이 초등 교육 현장이라는 점이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곧 ‘은퇴 거지’라는 신조어도 탄생하지 않을까? 은퇴 후 버킷리스트 1호로 제주도 한 달 살기가 한동안 유행하더니 최근엔 해외 각국을 떠도는 일 년 살이로 진화중이다.

나는 몸이 약해서 6년 개근상을 타지 못해 슬펐는데, 곧 해외 살이를 다니지 못해 슬플 운명이다.     


개근거지와 은퇴거지, 그 ‘가난’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너도 나도 생계형이라고 징징대며 열심히 직장을 다닌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생계형 가난은 있을지 몰라도 생존형 가난은 없다.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6년 개근이 미덕이던 시절과 비교하면 복지국가로 비상했다. 

이 시대의 가난은 개근거지나 은퇴거지와 같은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가치 기준’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현대인들은 사소한 것(예를 들면, BMW 자동차)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요한 것(예를 들면, 건강)을 사소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을 잃고 나서야 올바른 사실을 깨닫는다. 이 상징적 비교 잣대인 해외여행은 사소한 것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것인지도 모른다. 돈본주의 사회구조의 팽창으로 정말 소중한 가치 체계가 무너지고, 선량한 대중들이 시장원리의 노예로 희생당하는 사회화가 끝없이 강화되고 있는 현실이 아프고, 절망적이다. 가치 체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던 중요한 덕목들이 돈만 있으면 되는 하찮은 것들로 대체되었다.    

  

'만사돈통'의 경고, 한국이 위험하다,라는 헤드라인으로 기사화된 임의진의 『숫자사회』라는 책은 ‘순자산 10억원이 목표가 된 사회는 어떻게 붕괴되는가?’라는 부제로 시작된다. 그리고 돈과 숫자에 매몰된 현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며, 우리나라의 구조적 문제점 중 하나의 예로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중산층에 대한 정의를 비교한다.

[중산층에 대한 정의]

우리나라

1.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2. 월 급여 500만원 이상

3. 자동차는 2,000cc급 이상 중형차 보유

4. 예금액 잔고 1억원 이상 보유

5. 해외여행 1년에 1회 이상 다니는 정도

-프랑스

1. 한 개 이상 자유롭게 구사하는 외국어를 할 줄 아는 것

2. 직접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하나가 있을 것

3. 다룰 줄 아는 악기 한 가지가 있을 것

4. 남들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 하나가 있을 것

5.  공분(共分)에 의연히 참여할 것

6.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숫자사회』(임의진 지음, 웨일북스 펴냄, 2023) 63쪽 '한국과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이란 비교표 인용)

우리나라 중산층의 가치 기준은 돈(수단)이다. 프랑스 중산층의 가치 기준은 삶의 질(목적)이다.     


진짜 거지는 내 안에 가치의 중심이 무너진 사람이 아닐까? 정말 가난해진다는 것은 나 자신, 사람, 인생 이런 존재의 가치가 소유의 가치에 의해 침해되는 일이다. 가치의 중심을 세워나가야 할 교육의 장에서 탄생한 돈이면 다 되는 ‘개근거지’라는 신조어는 웃자고 나온 소리라고 가벼이 흘리기엔 너무 무겁다. 물론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안정된 직업과 고소득을 향한 성실한 노력을 해야겠지만 가치 체계의 주객(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사회에서 돈이 과연 행복을 보장할까? 개근거지를 비하하는 경쟁적인 조기 해외여행 문화를 건강한 경제성장으로 볼 수 있을까?     


개근상이 미덕인 시절에서 자라나 개근거지 시대에 은퇴거지 도달에 임박한 나는 정신 바짝 차리고, 나만의 가치를 지켜가려 한다.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면서.      


[나의 자발적 가난의 가치 실천 항목들]     


1. 미니멀리즘: 내가 가진 물건의 숫자만큼 자유는 줄어든다. 이것이 정말 필요한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고쳐 생각하며 버리고, 또 버린다. 이것이 진정 필요한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고쳐 생각하며 절실히 필요한 것만 신중히 사려한다. 집 평수부터 줄여가고 있다.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물건씨의 집세를 내지 말라.’ 갈 길은 멀지만 매일 매일 조금씩 무소유를 실천하며 자유의 가치를 선택하려 한다.     


2. 비거니즘: 육식 찬양, 단백질 필요성의 강조 광고 등이 그대로 진실은 아니다. 의사, 약사, 영양사 단체는 자본주의 시장 원리에 따라 축산·낙농·제약 업계의 연구비 지원을 받고, 그들이 돈을 더 벌 수 있는 연구 성과를 도출해낸다. 돈은 진실을 앞선다. 하비 다이아몬드의 『나는 질병없이 살기로 했다.』, 존 맥두걸의 『어느 채식의사의 고백』이란 두 권의 책을 읽고, 돈에 가려진 많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영역에서 불가피하게 작용하는 자본주의 시장원리보다 내게 더 치명적으로 다가왔던 점은 동물복지다. 환경을 파괴하며 과잉 생산되는 수많은 동물들이 우리 식탁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끔찍한 지옥을 겪고 있는지 그 현장을 담은 「도미니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말았다. 19금이다. 아이들은 보지도 말아야 할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어른들은 범죄도 아닌 직업으로 마구 저질러도 무방한 아이러니를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두 권의 책으로 유연한 채식주의자가,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좀 더 강화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환경, 동물복지, 건강, 양심의 가치를 선택했다.

[ 한 나라의 도덕적 성숙도를 알고 싶다면 그 나라 사람들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 ] (← 다큐멘터리 「도미니언」: 도미니언(지배자들) Dominion 2018 full documentary (youtube.com))     


3. 병원 검진과 진료의 미니멀리즘: “당신은 의사인데 어째서 다른 의사들과 의견이 다르죠?” 대답은 간단하다. 돈 버는 의사를 그만두기로 맹세했기 때문이다. 존 맥두걸의 『어느 채식의사의 고백』 서문에 담긴 내용이다. ‘초등의대반 방지법’이 발의되고,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에 한 의사 단체가 "당신들은 어떤 의사에게 진료받고 싶습니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만 전념한 의사인가요, 아니면 실력은 한참 모자라지만 추천에 의해 공공병원 의사가 된 의사인가요?“라고 묻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대비된다. 『병의 90%는 걷기만해도 낫는다』의 저자 나가오 가즈히로는 대학시절부터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의사가 이렇게 약만 잔뜩 주는 사람인가? 의사란 병이 걸리지 않게 하고, 약을 덜 먹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나를 고객으로 오래 뫼시고 싶어하는 내 앞의 친절한 의사들보다 양심선언을 하고, 의학계에서 배척당한 먼나라 이웃나라 진심 의사들의 돈 안 되는 처방을 따르기로 했다. 잔뜩 주는 약을 휴지통에 구겨 넣었다. 의족처럼 부리던 차도 버렸다. 환경과 건강의 가치를 선택하며 걷는 인간으로 거듭났다. ‘You are what you eat. 음식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는 말을 믿고, 바른 먹거리에 더 진심이 되었다. 병원 쇼핑 중독과 건강 염려증에 감염되지 않고, 오만가지 화학성분의 영양제와 건강보조식품 맹신교에 전도되지 않은 채 내 안의 신성한 면역력과 자연치유력을 믿고, 키워나가는 신념을 건강관리의 중심으로 삼으려 한다. 장기요양보험료를 알뜰히 쓰며, 요양병원에서 장수하지 않으려고 존엄사 유언장도 작성해서 공증받아 두었다. 블로그에 공유하여 「2,500만 존엄사 유언장 쓰기 대국민 운동」을 시작했다. (←https://blog.naver.com/feelingmark0/222528357569)     


4. 피부 단식: 히라노 교쿄의 『피부도 단식이 필요하다』를 읽고, 기초화장품이 피부를 개선하기는커녕 파괴하지만 우리는 산소같이 화장품을 소비하며, 수억대의 모델료와 대기업의 이윤 창출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알고 말았다. 그 이후 피부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는다.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네 피부가 왜 그 모냥이냐는 질문조차 받은 일도 없다. 피부 건강, 불필요한 소비 중단, 동물복지의 가치를 선택했다. (화장품 생산과정에서도 생체 실험으로 수많은 동물들이 끔찍한 학대속에 죽어가고 있다.)

(←「랄프를 구해줘」 3분영상을 통해 국내에서 매년 실험으로 죽어가는 수백만 마리의 동물에 대해 인식하고, 더 나아가 동물대체시험법제정안통과를 촉구하는데 기여하고자 만들어진 영상입니다.

https://youtu.be/I3tta73m6Vg?si=jgG-Rv1KpcncGTSP)     


5. 소비 단식: 휴대폰을 손에 놓치 못한 채 생활하느라 스마트한 알고리즘의 덫에 조정되며, 터치 몇 번이면 12시간 내에 요술램트 지니처럼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 내 앞에 척척 갖다 놓는 편리함에 길들여진 우리는 필요 판단보다 구매 행위가 선행되는 뇌구조로 변화되고 있다. 쇼핑 중독 탈출기인 서박하의 『소비단식 일기』를 읽고, 주1회 소비단식의 날을 실천하며, 횟수를 점차 늘여보려 한다. 소비 절약과 부록으로 따르는 시간과 노력 절약의 가치를 선택했다.     


6. 옷 소비 단식:  2022년 방송대상을 수상한 KBS환경스페셜 「오늘 당신이 버린 옷, 어디로 갔을까?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 」를 시청하며 깜짝 놀랐다. 내가 무심코 수거함에 던져버린 헌 옷의 대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수출업체를 통해 개발도상국 등 해외에 수출된다. 그런데 헌 옷의 양이 많아도 많아도 너무 많은 까닭에, 그 절반 가까이는 다시 버려지고 있다. 어디에? 바다 건너 어딘가에는 우리가 버린 옷들이 헌 옷 쓰레기로 된 강을 이루고 있었다. 옷을 유난히 좋아해서 많아도 많아도 너무 많은 헌 옷 양산에 크게 기여하며 살아온 나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옷 소비 중단을 결심했다. 환경과 소비 절약의 가치를 선택했다

(←KBS환경스페셜 「오늘 당신이 버린 옷, 어디로 갔을까?」요약 3분 영상 : [국경없는의사회환자와 희망을 나누는 일 박지혜 활동가 (youtube.com)).     


7. 정치·사회적 관심과 참여: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사회적 문제다.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인  제임스 길리건의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위험한가』라는 책은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인 보고서다. 저자는 1900년부터 미국 정부가 매년 공식적으로 펴낸 살인과 자살율 통계를 분석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살인과 자살의 발생률이 보수(공화당) 취임 직후부터 늘기 시작해 임기 말에 최고점에 늘 도달한다는 사실이다. 이 발견에 놀란 제임스 길리건 교수는 이 결과가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지 여러 면으로 확인하기 위해 정권교체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모조리 분석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19세기 위대한 의사로 꼽히는 루돌프 히르호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마무리한다. ‘인간을 다루는 과학으로서 의학은 사회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의학은 사회과학이고, 정치는 규모를 키운 의학일 뿐이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투표일이 다가오면 SNS에서 떠도는 플라톤의 명언이다. 나는 투표권이 생긴 이후 단 한 번도 신성한 권리를 포기한 적은 없다. 내 가치의 중심에 따른 선택을 더 적극적이고, 신중하게 행사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SNS 덕분에 유명인, 언론인이나 작가가 아니어도 1인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이다.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지 않고, 설교나 전도 따위 하지 않고, 내가 믿는 올바른 가치가 나비효과로 움트게 할 1인분의 실천에 대한 고민을 놓치 않고 살려한다.

〔진보의 성패는 많이 가진 사람의 풍요에 우리가 더 얹어주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너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우리가 충분히 베풀어주는가 여부에 달렸다.-루스벨트-〕

(←「착한 소비, 내 지갑속의 투표 용지/명견만리」 소비가 정치보다 강력하다. : https://www.youtube.com/watch?v=YBuX76pu9aQ&t=1590)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면서 깨달은 인생의 大진리가 있다. 주변 지인들은 유난 떤다고, 그래서 얼마나 오래 살거냐고, 또는 얼마나 산다고 즐길 거 즐기지, 그리 출가 생활을 하냐고, 유명인도 아닌 너 하나 별나게 굴어봤자 세상 안 바뀐다고 설교를 늘어 놓는다. 그들은 모른다. 내가 포기한 사소한 것들의 자리에 어마무시하게 자라나고 있는 내가 선택한 중요한 가치를. 그것은 자유다. 가난해도 되는 만큼 자유로와진다. 마찬가지로 이것만은 꼭, 하고 움켜쥐어야 하는 만큼 속박된다. 또 하나를 놓는 것은 두 번 째 내려놓음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킨다. 나는 나의 자발적 가난을 전도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사람이 곧 세상이고, 우주다,라는 신념으로 1인분의 가난을 선택하려 한다.      



꽃 피는 말

-박노해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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