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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 Feb 16. 2023

다운그레이드된 나의 집

서울로 상경해서 살게 된 첫 보금자리는 병원에서 제공해 주었던 기숙사였다. 큰방과 작은방, 거실과 분리된 주방으로 4명이서 살기에 부족함 없는 넉넉한 크기의 빌라였다. 퇴사를 하면서 구하게 된 나의 첫 번째 자취방은 1.5룸으로 방과 분리된 거실 겸 주방으로 그래도 방이라는 나의 공간이 있었는데, 현재 나의 집은 그보다 좁아진 원룸이다. 5평 남짓한 코딱지만 한 크기로 현관에 들어서면 방안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원룸이라고 하면 타지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대학교 근처에 구한 방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막상 내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방을 구하려고 보니 원룸이 학생들만을 위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통장잔고로 깨닫게 되었다. 방을 구할 때 사람마다 원하는 우선순위가 있을 텐데, 나는 그래도 넓은 집을 원했다. 1.5룸도 좁다고 느꼈다. 좁아서 뭘 어떻게 꾸밀 각이 떠오르질 않아 그냥 그렇게 잡다한 인테리어로 계약기간을 버텼다. 새로 이사할 집에서는 낡지만 넓다고 하면 직접 페인트칠까지 해볼 각오로 내 취향으로 꾸밀 공간을 찾고 있었다.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이라도 주택이라도 상관없었다. 무옵션이라도 우선은 방 하나 거실 하나 정도를 원했는데, 정작 지금 살고 있는 집은 풀옵션에 1층에는 경비실이 있는 도시생활형 아파트다.


아침 10시, 오전 반차를 쓰고서 둘러본 현재의 집에 첫눈에 반했다. 정말 일주일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2~3개의 집을 보러 다니고 있었는데, 그때 살고 있었던 세입자분이 '오늘의 집'에 나올 것 같은 원룸의 정석 인테리어로 살고 계셨다. 그때 공간을 취향으로 꾸밀 때 집의 크기는 상관이 없다는 걸 눈으로 봤다. 벽면 한 군데, 침대 이부자리, 화장대의 모빌 하나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던 거였는데 나는 왜 집 전체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집을 둘러본 아침 10시에 바로 가계약금을 걸어놓고 오후 출근을 했다. 그때부터 14층의 빛이 잘 들어오는 화이트톤의 붙박이장이 빌트인 된 원룸을 어떻게 내 취향껏 꾸며볼까 이리저리 기분 좋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좌식생활을 해왔지만 이제는 입식생활을 해볼 심산으로 무조건적으로 1인용 소파를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원룸이라 다인용은 사치겠지만 1인용은, 나의 집에 내가 원하는 사치 하나쯤은 부릴 다짐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렇게 이삿날을 기다리면서 공간에 맞는 화장대와 부엌장을 고르다가 이삿날을 3일 남겨놓고 코로나에 확진되어 병원으로 격리되어 버렸다. 이삿날에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와 대신 이사와 대출을 정리해 주고 당일에 내려가셨다. 이삿날로부터 15일이 지난 후에야 새로운 나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진짜 개판이더라.


이사하고 한 달 동안은 끊임없이 택배가 도착했다. 새로운 물품이 들어오면 헌 물품은 집밖으로 나갔다. 수납장에 물건들이 정리가 되고 점차 내가 꿈꿨던 나의 방 모습이 완성되는 걸 지켜봤다. 집을 둘러봤을 때 이상적이었던 세입자의 인테리어를 보고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했었는데, 그 다짐을 이룬 것 같았다. 여기서 '이렇게'는 세입자와 같은 인테리어가 아니라 자신의 취향을 맘껏 표현해 보자는 거였다. 


15일 동안 창문 한번 열리지 않아 먼지가 케케묵은 이사박스들 사이에 도저히 입원생활 짐까지 풀 순 없었다. 언제 퇴원할지 몰라 가구하나도 주문하지 못해 정리할 수 없는 짐들을 한쪽으로 밀어 두고 여전히 남아있는 미열을 품고서 새로운 나의 집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가구는 일반 택배랑 다르게 오늘 주문한다고 해서 내일 오는 게 아니더라. 화장대와 부엌장이 도착할 동안 옷도 부엌가전도 풀지 못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그 엉망진창 속에서 오늘 입을 옷가지하나는 기가 막히게 꺼내어 살아지더라. 


화장대가 도착하고 부엌장이 도착하고 1인용 소파가 도착하는데 거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붙박이 옷장에 다 들어가지 못한 잡화의류들은 화장대겸용수납함으로 들어가고 밥솥, 전자레인지, 미니토스터기, 티팟포트가 부엌장으로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면서 그제야 바닥 장판이 보였다. 그제야 사람이 살 수 있는 집 같았다. 먼지구덩이 속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내가 그렸던 나의 집에 한 군데씩 완성되어 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되도록이면 아주 천천히 완성시키고 싶었다. 가구 하나가 들어오면서 짐이 정리가 되고 필요 없어진 가구를 당근으로 팔았다. 가지고 있던 잡다한 인테리어를 모두 다 헐값에 팔거나, 안 팔리는 것들은 무료 나눔으로 모든 걸 정리했다. 부엌의 물컵하나, 욕실의 수건하나 새롭게 다 맞췄다. 


현관문과 테이블밑에 쌓인 박스들이 안 그래도 좁은 집을 더 좁게 만든다. 주말 내도록 택배와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 집이 완전 개판이다. 아직 걷지 못한 건조대의 세탁물과 화장대 위에 쌓아두기만 한 자질구레한 것들이 지저분함의 정점을 찍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하다. 병가를 끝내고 정상복귀한 직장에서 오랜만에 탈탈 털리고 돌아와 손하나 까딱 안 하고 뻗어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아마 주말이 오기 전까지는 매일매일 그 정점의 기록을 깰 테지만. 내 취향이 덕지덕지 묻은 공간을 오로지 나만이 책임질 수 있어서 뿌듯함이라는 성취감을 발견한 것 같다. 나는 요번 주말에 얼마나 큰 성취감을 느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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