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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Jun 21. 2020

여유(雓迶)

written by 다온




화창한 봄의 어느 날, 병아리가 바위에 기대어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그마한 부리에서 한숨이 폭 새어 나오기도 하고,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병아리만큼 작은 햇살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가 병아리의 뺨을 간지럽혔다. 무슨 일이냐고 넌지시 묻는 듯했다. 병아리는 또 한 번 한숨을 포옥 내쉬며 햇살에게 목소릴 들려주었다.      


“집이란 건 뭘까? 나는 나의 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     


문득 생겨난 고민 탓에 병아리는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 병아리야, 산책을 나가 머리를 식혀보지 않을래? 작은 제안을 건네준 작은 햇살은 병아리의 대답을 듣기 전에 큰 햇살의 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산책…. 병아리는 고개를 들고 저 너머에 늘어선 많은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 건물들도 모두 누군가의 집이겠지? 병아리는 햇살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복잡한 생각들로 무거워진 것 같은 몸이 가벼워지기를 바라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긴다.           



열심히 걷고 걷다가 만난 첫 번째 집은 책으로 된 집이었다. 수많은 책등과 표지들이 병아리의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에 읽은 명작 동화의 제목도, 읽기 싫다고 밀어두었던 기억이 나는 유명인의 자서전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내용이 궁금해지는 제목의 책도 보였다. 그렇게 책과 책이 이리저리 겹쳐진 채 잔뜩 쌓여 있었다. 차곡차곡 몸을 맞댄 책들이 어엿한 건물을 이루고 그 건물은 이렇게, 누군가의 집이 된다. 병아리는 현관이라고 적힌 단단한 책의 표지를 조심스레 똑똑똑 두드렸다. 머지않아 책이 열리고 안에서 나온 사슴이 병아리를 반겨주었다.      

“안녕, 병아리야. 무슨 일이니?”

“안녕, 사슴아. 나는 산책을 하고 있었어.”

“그렇구나. 괜찮다면 쉬어가지 않을래?”     


사슴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활짝 열고 병아리가 집 안으로 들어오길 기다려 주었다. 집 안으로 총총 들어가니 바깥처럼 많은 책이 겹겹이 펼쳐져 벽이 되고 천장이 되어 있다. 바깥은 표지와 책등만 보였으나, 집 안으로 들어오니 펼쳐진 책의 속지가 가득하게 보인다. 병아리가 읽을 수 있는 글자도 많았고, 읽을 수 없는 글자도 많이 있었다. 그것들을 따라 병아리의 눈이 바쁘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사슴아, 너는 이 책을 다 읽은 거야?”

“응, 맞아. 모두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거든.”

“넌 정말 대단하구나.”     


병아리는 어지러우면서도 새로운 집의 모습에 감탄하며 사슴의 집을 구경했다. 이 책은 음악가의 이야기이고, 이 책은 추리소설이야. 그리고 이건 누군가의 여행을 기록한 수필이고, 이것은 여러 시를 엮은 시집이지. 사슴은 병아리의 옆에서 집을 소개했다. 병아리는 사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새로운 사실을 야금야금 알아갔다. 사슴은 이곳에 있는 책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었고, 병아리가 처음 듣는 이야기여도 금방 이해할 수 있게끔 쉽게 설명할 줄도 알았다.      


“사슴아, 넌 너의 집이 마음에 들어?”

“그럼, 당연하지. 나는 집에 돌아왔을 때 마음이 놓여. 새롭게 좋아하는 책이 생겨서 그 책을 우리 집에 가져올 때에도 기분이 좋아져.”     


병아리는 사슴의 기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기꺼이 마주 웃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병아리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잘 쉰 것 같아.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정말 고마워. 병아리는 사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상냥한 태도로 배웅까지 해준 사슴에게 손을 흔들며 다음을 기약하고, 병아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작은 걸음이 차근차근 모여서 꽤 걸어왔다 싶을 즈음 또 다른 집이 나왔다. 이번엔 폭신폭신 부드러운 이불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이불 집이었다. 병아리는 보기만 해도 포근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은 색색의 이불들을 빙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나요? 현관이 어디인지 찾을 수 없어서 곤란했다. 노크 없이 목소리부터 내서 집주인이 놀란 것은 아닐까 걱정하던 찰나에 이불 더미 사이에서 펭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병아리구나, 어서 와.”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 펭귄아.”

“아냐, 다들 우리 집 문이 어디인지 잘 못 찾더라고.”     


햇빛 냄새가 나는 따뜻한 이불을 열어준 펭귄 덕분에 병아리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집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보드랍고 아늑했다. 펭귄은 병아리의 몸 크기에 맞는 작은 담요를 찾아와 병아리에게 둘러주었다. 그러고 보니 펭귄은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지만 가장 폭신해 보이는 이불을 두르고 병아리와 함께 집 안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병아리는 담요의 부드러운 감촉에 파묻혀 있어서 그런지 마음까지 살살 녹는 기분이었다.      


“펭귄아, 너의 집은 정말 아늑하고 따스한 곳인 것 같아.”

“그리 느껴주니 고마워. 나는 우리 집을 참 좋아해.”

“어떤 점이 가장 마음에 들어?”

“나는 햇빛의 포근한 냄새를 잔뜩 머금은 이불 속이 너무 좋아. 낮잠을 정말 좋아하기도 하고. 우리 집에 있으면 가장 행복하게 잠들 수 있어.”     


두르고 있는 이불을 더 꼭 여미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펭귄의 모습에, 병아리도 펭귄이 둘러준 담요를 슥슥 손으로 만져 그 따스함을 느꼈다. 이만 가 봐야겠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며 담요를 돌려주려던 병아리에게 펭귄은 고개를 내저었다. 거기 끈으로 담요를 묶어서, 망토처럼 두르고 다니렴. 저녁에 산책을 나가도 추운 바람을 막아줄 거야. 뜻밖의 선물에 병아리는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다시 부지런히 걸어 세 번째로 도착한 곳은 화려한 호텔이었다. 반짝반짝 시선을 끄는 멋진 건물에 병아리는 우와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그 순간 커다란 유리문이 매끄럽게 열리며 깔끔한 정장을 입은 곰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잠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곰은 무거워 보이는 큰 유리문을 거뜬히 열고 병아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먼지 한 톨 없을 것 같은 깨끗한 내부는 바깥처럼 반짝이고 멋있었다. 로비에 일정하게 배치된 푹신한 소파 위로 병아리를 안내한 곰은 병아리에게 예의를 갖추며, 연신 친절한 얼굴을 한 채 병아리의 맞은편에 반듯하게 앉았다.      


“여긴 곰 씨의 집인가요?”

“그렇습니다. 이따금 손님들이 머물다 가기도 하지만, 엄연히 저의 집이지요.”

“이 커다란 곳을 전부 곰 씨가 관리하시나요?”

“그럼요. 그게 제가 해야 할 일이랍니다.”     


이렇게나 넓은 공간을 관리하면 힘들 법도 한데 곰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은은한 미소로 병아리에게 대답했다. 저는 이렇게 친절을 베풀고 누군가가 편안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기쁩니다. 누구든 힘들 때마다 마음 놓고 쉬어갈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이 공간이 저의 집이기에 열심히 가꾸는 것이긴 하나, 동시에 저의 집이 다른 이에게 휴식처가 될 수도 있다면, 꽤 보람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답니다.      


“말이 너무 길었군요. 병아리 손님께선 오늘 하루 쉬다 가실 생각이신가요?”

“아니에요. 오늘은 이만큼 앉았다 가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된 것 같아요. 다음에 더 쉬고 싶어질 때 다시 찾아올게요. 그땐 근사한 방을 안내해주세요.”

“물론이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곰은 빙긋 웃으며 끝까지 친절하게 병아리를 배웅해주었다. 병아리는 또 열심히, 친절을 받은 만큼 열심히 걸어가 네 번째 건물에 도착했다. 문이라고 할 것 없이 열린 입구가 넝쿨 식물에 빙빙 감겨 있었다. 작고 예쁜 꽃이 곳곳에 핀 그 입구를 지났더니 촘촘한 돌담이 양쪽에 좁게 늘어서 있었다. 그대로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꺾이는 길이 나왔고, 그 꺾인 길을 따라 방향을 틀어 또 걷다 보면 갈림길이 나왔다. 내키는 쪽으로 갔더니 막다른 길이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보면 아까와 비슷하게 생긴 갈림길이 나타났다. 병아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여기가 미로라는 것을.      


“어쩌면 좋지…? 어디로 가는 게 맞는 걸까?”

“병아리야, 길을 잃었니?”     


여유로운 목소리가 돌담 너머에서 들려왔다. 담은 병아리보다 한참 높아서 폴짝 뛰어봐도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 어려운 미로는 아니니, 조금만 더 헤매어 봐도 좋을 거야. 나긋한 응원을 건네는 목소리에 병아리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지 않아도 그는 병아리의 걸음을 듣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온 건 처음이지만 병아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미로를 풀어보고 싶어졌다.      


그 목소리의 말대로 막다른 길을 만나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같은 곳을 여러 번 지나기도 하면서 조금 더 헤매어 보았다. 길이 돌담에 막혀 뚝 멈추게 될 때면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힘을 내 움직였다. 헤매는 일이 크게 힘들지만은 않았다. 병아리는 결국 구불구불한 미로의 끝에 다다라 놀이터를 찾아냈다. 놀이터 중앙의 미끄럼틀 위에는 고양이가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엎드려 있었다. 수고 많았어, 병아리야.      


“고양이야, 여기는 너의 집이니?”

“그런 셈이야. 어때, 별로 어렵지 않았지?”

“맞아, 네 응원 덕분에 괜찮았어. 용기를 주어서 고마워.”

“내가 뭘 했다고. 이 미로를 푼 건 너야.”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이며 병아리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우리 집에 들어와선 갈팡질팡하다가 금세 나가버리는 사람들도 많아. 하지만 너는 너의 힘으로 해냈잖아. 헤매는 것도, 결국 이곳에 온 것도.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내려놓는 말투 속에는 고양이의 진심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병아리는 웃을 수 있었다.      


“온 김에 좀 놀다 가도 돼.”

“고맙지만 다음에 다시 놀러 올게. 그래도 될까?”

“헤맬 용기만 있다면 언제든.”     


다음에 보자. 고양이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잠을 청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예민한 귀를 쫑긋거리며 병아리의 발소리를 다 듣고 있으리라. 여전히 촘촘하게 이어진 돌담길에서는 기분 좋은 풀잎의 향기가 났다. 병아리는 처음 미로를 발견했을 때보다 용감해진 걸음으로 출구를 찾아냈다. 또 올게. 혼잣말로 인사를 건네곤 마저 산책을 잇는다.           



점점 해가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살금살금 물들어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며 걷다가 도착한 곳에는 정원이 있었다. 곳곳에 수풀이 몽글몽글 예쁘게 늘어서 있고, 색색의 꽃이 핀 사랑스러운 정원이었다. 하얀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은 원한다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병아리는 예의상 걸쇠가 있는 곳을 똑똑똑 노크했다. 울타리를 조심스레 두드리고 몇 분이 지나도 아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의아해할 즈음 타박타박 느린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코알라가 울타리 문을 열어주었다.      


“기다렸지? 미안해. 분갈이를 하는 중이어서 손을 씻고 왔어.”

“아니야,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 여기는 너의 집이니?”

“맞아. 여기가 우리 집이야. 들어오렴.”     


병아리는 푸른 풀밭 위를 걸어 코알라가 가꾸어 놓은 정원에 들어섰다. 정원 중앙의 작은 통나무집 주변에는 작은 나무들이 가득했다. 코알라를 따라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어느 나무에서 어떤 열매가 열리고 어떤 꽃이 피는지에 대해 천천히 설명을 들었다. 통나무집 뒤편에 이르자, 코알라가 하고 있었다던 분갈이 중인 화분들이 보였다.      

“혹시 괜찮으면 같이 분갈이를 하지 않을래?”

“같이 하면 나야 좋지. 너의 집을 소개해준 보답으로 열심히 도와줄게.”     


코알라는 익숙한 움직임으로 작은 화분에서 조심히 나무를 옮겨 큰 화분에 놓고 고운 흙을 새 화분에 가득 부어주었다. 그 흙 위를 톡톡 고르고 꾹꾹 눌러주는 코알라의 두 손을 따라, 병아리도 흙을 톡톡 꾹꾹 두드려주었다. 비옥한 흙 사이로 조그만 자갈도 느껴졌다. 무럭무럭 예쁜 꽃을 피우렴. 햇살 같은 마음을 담아 나무를 향해 격려의 말을 심어주었다.      


“병아리야, 저길 봐.”     


분갈이를 끝내고 흙투성이가 된 손을 보며 기쁘게 웃던 병아리는 코알라의 목소리에 고갤 들어 너른 풀밭의 지평선 너머로 예쁘게 빛나는 노을을 마주 보았다. 분홍과 주홍의 빛이 이리저리 섞여 아름답고 눈부셨다.      


“탁 트인 하늘을 보고 싶으면 언제든 놀러와.”

“그래도 될까?”

“당연하지. 정원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맛있는 것을 나눠 먹자. 그런 다음 드러누워서 하늘을 실컷 보는 거야.”

“벌써 기대되는 것 같아. 꼭 다시 올게.”     


병아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다시 길을 걸었다. 조금씩 쌀쌀해지는 저녁이지만 펭귄이 준 담요 덕분에 바람이 불어도 괜찮았다.      


병아리는 천천히 걸으며 오늘의 산책은 정말 즐거웠다고, 다음에도 산책을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병아리 자신의 집이 생기면 친구들을 꼭 초대하겠다고 다짐했다.      


가장 행복해할 수 있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사랑할 집을 향해, 병아리는 걸어갔다.



____ 다온 writerda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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