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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Oct 18. 2020

비 일기

written by 다온



비 일기               



이것은 내가 며칠 전까지 겪은 일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다.      


가을비가 내리 이어지며 화창한 하늘이 어떤 색이었는지도 잊을 만큼의 기간이었다. 비가 오는 도시는 온통 회색빛인 듯하고, 무채색의 물감통을 흥건히 엎질러 놓은 것과도 같아 보여서, 어쩐지 나를 공허하게 만들곤 했다. 

화방에 갈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다. 저 빗속에 물들면 나조차도 색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밖에는, 습한 날씨 속에서 캔버스 관리에 조금 더 신경을 쓰며 지냈고, 우중충한 기분이 아닌 청량한 마음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날씨나 주변 환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타입이라 그림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손이 잘 움직여주지 않을 땐 푹 쉬어주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비가 내리는 동안 무의미하게 창밖을 보면서 종종 시간을 채우곤 했다. 

처음에는 하늘을 보다가, 빗방울을 보다가, 웅덩이를 보다가, 지붕을 보다가, 나무를 보는 등… 그런 것들을 바라보았는데, 그 모든 것들까지도 빗속에서 무채색으로 물든 것처럼 보이는 바람에, 거리로 눈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내가 지내는 곳은 그다지 시끄럽고 번잡한 동네는 아니지만 오가는 주민들이 적당히 있는 동네라, 빗속의 행인을 구경하는 일은 나름의 소소한 환기가 되어주었다. 물론 모두가 우산을 쓰고 걷고 있거나 우산이 없어 빠르게 뛰어가기에, 지나가는 사람 모두를 뚫어져라 관찰하는 일까지도 못하거니와, 그렇게나 개인을 침범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적당히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풍경 정도였으니, 내가 스쳐온 그 풍경들은 그저 한가롭거나 지루하거나 평범한 모습이었다. 으레 어디에나 있듯이 장바구니를 들고 움직이는 사람이나, 누군가는 갑작스런 비바람에 우산과 함께 휘청인다든지, 삼삼오오 색색의 우산들이 무리 지어 이동한다든지, 한 우산 속에 두엇이 함께 옹기종기 어깨를 적시며 걷는다든지, 그런 모습들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조금 눈에 띄는 행인을 하나 발견했다. 

사실 눈에 띈다고 하기에도 뭐한 게, 누구나 들고 있을 것 같은 검은색 우산을 쓴, 그냥 행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날 유독 그 사람에게 내 시선이 이끌렸을 뿐이다. 

특별할 것 없는 그 행인을 앞으로 ‘그’라고 지칭해두려고 한다. 

그는 내가 보고 있던 무료한 풍경 속에 나타났다. 보통은 들어온 방향으로부터 그의 목적지 쪽을 향해 걸어갔어야 했을 텐데, 그의 걸음은 길 한 편에서 뚝 멈추었다. 여전한 빗방울 사이로 그 검은 우산은 어느 집의 벽돌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상 우산에 가려진 그의 시선이 그쪽에 머무르는 게 맞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신발코가 향하고 있던 그 담장이 그의 풍경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원래 저 집에 살던 사람인가, 아니면 누굴 만나러 왔나. 

어떠한 질문을 떠올려 보아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일까, 무의미한 질문들은 금세 빗소리 사이로 흐릿해지고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대로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가만히 앉아 있던 다리가 얼마나 저렸는지, 깜빡 정신을 차린 뒤에는 이미 한 시간도 넘게 훌쩍 지난 상태였다. 그동안 그는, 마치 나처럼, 미동도 없이 그 벽돌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으려는 건가, 하는 생각을 떠올릴 때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의 풍경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검은 우산의 인영은 사라졌지만, 그가 머물렀던 길 위의 그 자리만 빗방울이 덜 닿아서, 주변보다 조금 더 맑게 보이는 그런 공간이 남아있었다. 

나에게 그 공간은, 하늘이 빗방울을 물감 삼아 세상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고 남은 여백과도 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여백’이 진회색의 빗방울로 다 물들 때까지 계속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머무름으로써 비로소 탄생한 ‘여백’에, 나는 조금 더 집중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이제야 생각해 본다.      


다음 날도 그는 나의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전날의 집을 보러 왔나 했더니 신발코는 나의 예상을 깨고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고개를 약간 숙인 듯이 앞쪽으로 기울어진 검은 우산까지. 

뭘 보는 걸까, 왜 저러고 있을까, 고양이라도 있나, 아니면 풀꽃? 

이런 생각도 잠시,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저 응시하는 것 외에 다른 건 금세 잊히게 된다. 어떻게 하려고 애를 쓰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계속, 어느 순간부터 ‘바라보기’라는 행동 외에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또한 그가 나의 풍경 속에 만들고 간 ‘여백’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전부 바라보고 난 뒤에야 나는 남은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매일 달랐다. 어느 날은 어떤 집을, 어느 날은 어떤 광고지를, 어느 날은 어떤 쓰레기를. 

나는 매일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남는 여백을, 여백을, 여백을.           



그런 나날들이 며칠 지난 또 어느 날, 그날의 신발코가 가리킨 곳은 나였다. 

당연하게도 그가 굳이 고개를 들어 비를 맞아가면서 나를 올려다볼 일은 없었다. 그저 그 신발코의 방향이 이쪽이었을 뿐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그와 눈이 마주친 것도, 그에 대해 무언가 더 알게 된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방향이 내 쪽을 향한 순간, 심장을 놓치는 바람에 발밑으로 쿵 떨어뜨려 버린 것 같았다.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해 내려앉아 버린 심장은 어디에서 쿵쾅거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손끝인지 귀 옆인지 종아리인지 목 안쪽인지, 정말로 알 수 없었다. 

미처 추스르지 못한 그 감정 그대로 나는 움직였다. 그 순간의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창가에서 물러나 자연스럽게 캔버스 앞에 앉았다. 당연한 수순인 듯 붓으로 손이 갔다.      


새하얀 캔버스 위로 하나둘, 색이 채워져 간다.      


꼭 쥐었던 붓을 물통에 담그며 손에서 놓는 순간, 창밖에서 햇빛 한 줄기가 방으로 새어들어 왔다. 나의 공간에 나타났다. 

긴 비가 그친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며칠 전까지 내가 겪은 일에 대한 기록이다. 

그날 완성된 그림은 내 방 한편에서 그 빛을 머금고 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그에게 이 그림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도한다. 만약 그와 대화를 나누고 그의 감상까지 담을 수 있는 날까지 온다면 나는 이 기록의 다음 장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이만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20nn년 10월 18일 오후 5시 27분





____ 다온 writerda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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