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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Nov 17. 2020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written by 다온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소녀는 어느 날 소년을 만났고, 

소년은 어느 날 소녀를 만났다. 

여느 날과는 조금 달랐던, 어느 날이었다.           



─          



“누구예요?”

“마을 초입에 빈집 있었잖어, 거기 이사 온 사람들.”

“이번에도 귀농?”

“아니, 그냥 잠깐 쉬다 간대.”     


그게 뭐야. 평범하고 나른한 일요일, 엄마 아빠와 함께 점심을 먹고 늘어져 있는데, 누군가가 찾아와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고 갔다. 이런 시골에 굳이 이사 올 사람이라곤 퇴직 후 조용한 인생을 꿈꾸며 오는 여유로운 노부부가 다인데, 귀농이 아니면 뭐지?     


“우리 또래의 부부였어.”

“시골 체험? 뭐 그런 거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치만 정확하게는 아니야.”     


엄마는 소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호기심 가득한 제 딸을 알고서 일부러 그러는 것이다. 소녀는 엄마의 등에 답싹 매달리듯 붙어서 뭔데, 뭔데에, 하며 애교를 부렸다.      


“그럼 대체 뭔데, 응? 나 궁금하단 말야!”

“아이, 참, 알겠어. 말해줄게.”     


아들이 좀 아프대.      


“잠깐이라도 맑은 공기 쐬면서, 쉬게 해주려고 온 거래.”     


아. 

소녀는 단순하게 올랐던 호기심을 가라앉히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순수한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정히 말을 건넸다. 그렇게 크게 아픈 건 아니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 걱정되면 네가 친구가 되어주는 건 어떠니?           



다음 날 저녁, 소녀는 단출한 정류장에서 내려 타박타박 마을로 걸어오고 있었다. 낡고 작은 버스는 아침저녁으로 소녀를 학교까지 실어다 주었기에, 소녀에겐 이 모든 길이 익숙했다. 꽤 닳아버린 운동화 밑창이 불규칙한 길을 긁어댔다. 등 뒤에서 달그락거리는 가방도 곧 해가 질 듯 붉어지기 시작하는 저 산 너머의 하늘도, 너무나 익숙한 날이었다. 

다만 평소보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요즘 들어 예쁘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아니었을까. 빨강 주황 노랑 등 노을의 빛을 닮아가는 나무들이 산 곳곳에 보였다. 마치 녹색의 도화지에 물감을 한 방울씩 풀어놓은 것처럼. 소녀는 머지않아 산이 더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면 엄마에게 산에 놀러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얼른 그날이 오기를 바라며 멀찍한 산과 하늘을 바라보고 걷던 소녀가 마을 초입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소년이 있었다. 

무료한 듯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옆모습이 참 작아 보였다. 

소녀는 어제 엄마가 건네주었던 다정한 말을 그리 깊게 새겨두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마음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 그냥, 이유 없이.      



“…안녕?”     



그저, 말을 걸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소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년이 쭈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키기 전에, 소녀는 소년과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소녀의 시선은 소년에서 소년의 낙서로, 소년의 낙서에서 다시 소년으로 돌아왔다. 


“나는 저어기, 이 길 따라 쭉 가면 나오는 파란 지붕 집에 살아. 너는 어제 이사 왔다며?”

“응…….”

“이 마을에 네 또래는 나뿐이니까, 심심하면 놀러와.”

“고마워. 근데 나…, 금방 갈 거야.”

“괜찮아, 나도 내년이면 고등학교 때문에 멀리 가거든.”     


소녀는 내년에 고등학생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랑 나이가 같구나,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아파 이곳저곳으로 이사하거나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던 소년에게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소녀는 소년에게 특별했다. 

그러나 특별한 사람일수록 특별하지 않은 말도 쉬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소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만 꾹꾹 눌렀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말을 못 하는 사람은 아닌데. 그렇게 속으로만 중얼거리던 순간,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림 좋아해?”

“옛날에 그냥, 미술 학원 조금 다녔어.”

“그럼 내가 다음에 스케치북 가져올 테니까 같이 그림 그리고 놀자.”

“어, 어?”

“아, 나 이제 가야겠다. 저녁 맛있게 먹고, 다음에 봐!”     


소녀는 대화 도중 문득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더니 이크, 하며 벌떡 일어났다. 엄마의 저녁 준비를 도와주어야 할 시간이 조금 지나있었다. 어쩐지 하늘이 많이 붉어졌다 했어. 소년이 왠지 발갛게 보였어. 

얼결에 성사된 다음의 만남에 소년이 긴장하는 줄도 모르고, 소년에게 얼른 인사를 건넨 소녀가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 길에서 소녀는 마냥 신이 나 있었다. 새 친구가 생기는 게 좋았고, 왠지 마음이 들떴다. 팔레트, 붓, 색연필…, 아, 4B 연필도 챙겨야지! 또 무엇을 챙기면 좋을지 손으로 꼽으며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반면 뉘엿뉘엿 지던 해가 모습을 완전히 감출 때까지, 이 시골 마을에 반짝이는 별님이 한가득 찾아올 때까지, 소년의 부모가 귀가할 때까지, 소년은 손에서 나뭇가지를 놓지 않은 채 마루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소녀와 다시 만났을 때 무슨 그림을 그리게 될지, 어떤 그림을 보여주게 될지, 소년도 조금 들뜬 듯했다.           



─          



“안녕!”     


소녀는 그림 도구가 가득 들어 통통해진 책가방을 들고 소년의 집 앞에 도달했다. 조심스럽던 어제의 인사보다 훨씬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또한, 어제의 소년은 소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오늘의 소년은 소녀를 향해 ‘안녕’이라는 인사를 마주 건넬 수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손과 가방을 슬쩍 살펴보다가 먼저 말문도 열어보았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으음, 저기! 저 산 보여?”     


소녀는 가까우면서도 꽤 거리가 있는 듯한 산을 검지로 가리켜 보였다. 소년은 소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소녀가 말한 산을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산이 예쁜데, 걸어가면 좀 오래 걸릴지도 몰라.”

“그럼 자전거로 가자.”     


소녀가 의아해하는 사이, 소년은 자신의 집 안으로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깔끔하고 세련된 자전거를 이끌고. 핸들 앞에는 물건을 담을 수 있는 엷은 갈색의 바구니가 있었고, 검은색 안장 뒤에는 물건을 올리거나 사람을 태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원래 단단한 철로 된 짐받이였으나, 폭신한 담요를 둘러놓고 끈으로 꼭꼭 고정해 사람이 앉기 좋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네 거야?”

“응. 가방은 앞에 놓을게.”     


소년은 소녀에게서 가방을 받아 앞쪽 바구니에 꾹꾹 넣어두었다. 달각이는 작은 돌에 자전거가 덜컹거려도 가방이 쏟아지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그리고 안장에 올라앉으며 한 발로 페달 한쪽을, 다른 한 발은 아직 땅을 디딘 채 소녀를 돌아보았다.      


“뒤에 타서, 내 허리 잡으면 돼.”     


소녀는 잠시 멈칫하며 소년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교복 치마 뒤를 두 손으로 쓸어 가지런히 모으며 동시에 뒤쪽 안장에 올라탔다. 그다음엔 땅에서 발을 떼고, 소년의 옷자락을 꾹꾹 쥐고, 소년의 등을 바라보았다.      


“출발할게.”     


소년은 그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마을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소녀가 가리킨 산과는 점점 가까워졌다. 산과 훌쩍 더 가까워졌다고 느낀 순간부터 길 양쪽에서 코스모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달리는 길을 따라 한가득 피어 있는 분홍빛 코스모스는 가을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두 사람을 환영하고 있었다.      


“코스모스 예쁘네.”

“응. 그러니까 이따가 그림에도 그려줘.”

“알겠어.”     


소녀의 부탁에 가볍게 긍정한 소년이 조금 더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조금 밀리는 몸에 놀란 소녀는 무심코, 옷자락 대신 소년의 허리를 덥석 잡아버렸다.      


“아야….”

“앗, 미안해…! 잠깐 놀라서….”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팔로 허리를 감아줘. 아마 그게 더 안전할 거야.”     


소녀는 조용히 소년의 말을 따랐다. 소녀의 두 팔이 소년의 허리를 감싸며, 소녀는 소년의 등에 거의 기댄 듯이 보였다. 확실히 소년이 자전거를 몰기에는 한결 안정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마음은 차마 안정되지 못했다. 어제의 소녀에게는 작게만 보이던 소년이, 오늘 소녀에게 등을 보인 순간부터. 소녀는 소년의 등을 바라볼 때마다 그에게서 듬직함을 느꼈다. 조금 전 엉겁결에 붙들어버렸던 허리도 꽤 단단했다. 게다가 지금은 팔로 안고 있기까지 하니, 그 단단함은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도 앉은 자세 덕에 옆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 등에 시선을 고정할 필요는 없어서, 그것 하나는 참 다행이었다. 소녀는 대신 환하게 피어 살랑대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서 그런지 그 꽃길이 마치 제 마음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며.      


마냥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지.      


자전거를 모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듯하던 소년도 자꾸만 바짝 마르는 입술을 꾹꾹 깨물며 페달을 밟았다. 소년은 그때, 심장이 허리가 아니라 가슴에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근두근하는 소리가 심장에서부터 점점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아서, 그게 소녀에게까지 닿으면 어쩌지, 걱정하기도 했다. 

코스모스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소년의 등을 바라본 소녀는, 소년의 목덜미가 불그스름해진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무게까지 감당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렇게 넘겨짚었다.      


“나 무겁지? 너 안 힘들어? 나랑 자리 바꿀래?”

“너 안 무거워. 하나도 안 힘들어.”     


괜찮아. 가볍게 말하는 소년의 목소리에는 정말 힘든 기색이 없었다. 아프다더니, 아프다는 사실을 깜빡 잊을 만큼, 소년은 소녀가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데 목 뒤는 왜 그렇게 발간 걸까. 코스모스 색이 여기까지 온 걸까. 

소녀는 다시 제 마음 같은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소년의 온기와 함께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이윽고 도착한 산 입구에서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 두 사람의 마을이 자그맣게 보였다. 마을 앞에 늘어선 너른 밭들까지 탁 트여 시원해 보이고, 산 입구 주변 곳곳에 옹기종기 모인 나무들이 곧고 예뻤다. 벌써 노란색이나 주황색으로 물들어 길바닥 곳곳에 퍼즐의 조각처럼 흩어진 낙엽들이 사그락거렸다. 

소녀가 먼저 자전거에서 내려 저들끼리 모인 낙엽 더미에 가까이 다가갔다. 폭신폭신하게 모인 낙엽을 밟아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소녀는 하얀 운동화 밑으로 가을의 촉감을 즐겼다. 

소년은 자전거를 세워 고정해두면서 그런 소녀를 바라보았다. 참 그리고 싶은 풍경이라고 생각했지만, 소녀가 코스모스를 그려달라고 했으니 그 부탁을 들어주어야 했다. 소년은 바구니에서 소녀의 가방을 꺼내 소녀에게로 향했다. 소년의 발밑에서도 가을이 바스러진다.           



두 사람은 적당히 평평한 풀밭 위에 자리한 채 소녀가 가져온 스케치북을 한 장씩 찢어다 각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수채화 물감과 붓을 사용해서, 코스모스 길과 그 길 한 편에 놓인 자전거 하나, 그리고 전체적으로 파아란 가을 하늘을 담았다. 소녀는 아까 밟았던 낙엽의 색과 같은 색의 색연필, 크레파스, 물감들로 슥슥슥 이리저리 색칠하며 스케치북을 빈틈없이 채워나갔다. 두 사람의 그림은 달랐지만 모두 가을을 품고 있어 제법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소년의 그림은 아름다웠다. 소녀가 소년의 그림 솜씨를 칭찬했지만, 소년은 소녀의 그림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림을 서로 교환해 간직하기로 약속했다. 

소녀가 하교한 뒤에나 함께 놀기 시작한 터라, 그림을 다 그리고 나니 하늘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 조금씩 푸른 기운을 데려오고 있었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에게 받은 그림을 소중히 말아 고무줄로 고정해두고, 자전거의 바구니에 가방과 함께 꼭꼭, 잘 넣어두었다. 

산 입구에 왔을 때처럼 자전거에 함께 올라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소녀는 소년의 등을 향해 말했다.      


“아까 그 산 말이야.”

“응.”

“거기 중턱에 나만 아는 곳이 있어.”

“정말?”

“응. 중간쯤에. 근데 금방 올라. 별로 안 높아.”

“그렇구나.”

“거기 풍경이 진짜 예뻐. 그래서 나만 알고 있으려고 했는데, 너만 괜찮으면…, 같이 안 갈래?”     


오늘 만나자마자 활기찬 인사를 하거나, 조금 전 소년보다 먼저 그림을 다 그리고 다시 낙엽 사이를 총총거리던, 그런 소녀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조심스러움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혼자만의 비밀을 공유해서 그런 걸까, 소년은 넘겨짚는다. 

소년과 한 번 더 놀고 싶었던 소녀의 용기, 그리고 소년과 함께한다는 데에서 오는 소녀의 수줍음. 

그것들은 소년과 소녀가, 소년과 소녀라서, 그래서 아직은 모르는 것이었다.      


“같이 갈게. 같이, 가고 싶어.”

“…그러면, 이번 주 주말.”

“응.”

“주말에 가자, 어때?”

“좋아.”     


학교가 끝난 뒤엔 해가 너무 빨리 져서, 산에 오를 수 없을 거야. 

소녀의 부연 설명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누군가와의 약속이 얼마 만인지. 소년은 약속의 상대가 소녀여서, 그리고 그 약속이 소녀와의 추억을 하나 더 쌓을 수 있는 약속이어서, 속으로 잔뜩 기뻐하고 있었다. 

같이 가고 싶다고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표현한 소년의 용기도, 둘만의 시간이 생긴다는 사실이 가져오는 소년의 수줍음도. 

이 또한 그때의 소녀와 소년이기에, 두 사람은 잘 모르는 것이었다.           



─          



소녀는 열여섯 해를 살면서 처음으로 원피스를 입고, 소풍 바구니를 들어 보았다. 

하얀 레이스 칼라가 동그랗게 소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칼라가 모이는 중앙, 즉 소녀의 목 아래쪽에는 흰색의 얇은 끈 리본이 곱게 묶여 있었다. 원피스는 전체적으로 남색이었고 그 색을 바탕으로 하얀색 꽃이 작게 총총 그려져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손등을 덮을락 말락 하며 살랑이는 소녀의 소매, 그 아래의 고운 두 손에는 등나무를 엮어 만든 듯한 연갈색의 소풍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 원피스나 소풍 바구니나 모두 소녀의 엄마가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지만, 엄마는 어떻게든 예쁘게 단장하고 싶어 하면서 예쁜 것을 빌려달라 조르는 딸의 모습이 마냥 자신의 어릴 적과 닮아 있었기에, 기꺼이 제 물건들을 내어주고 소녀의 머리칼도 양쪽으로 곱게 쫑쫑 땋아주기까지 했다. 소풍 바구니 속에는 (물론 이것도 엄마의 것 중 하나인) 다홍색 체크 무늬 피크닉 매트도 들어 있었고, (아침 일찍 엄마의 도움을 받아) 정성을 가득 들여 만든 신선한 샌드위치도 고이 담겨 있었다. 

소녀는 그렇게 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 틈틈이 소년의 집 방향을 흘긋대며, 새하얀 운동화 끝을 바닥으로 톡톡 두드리곤 했다. 톡톡, 톡톡, 그 소리에 맞춰 심장이 도닥도닥, 그렇게 소녀의 마음에 설렘이 차오르는 중이라는 걸, 소녀는 아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게 설렘이구나, 소년에게 곱게 보이고 싶고 더 좋은 추억을 주고 싶은 이 마음이 그런 것이구나, 하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 소년은 금방 소녀에게 도착했다. 반듯한 하얀색 남방과 일자로 뚝 떨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온 소년은 소녀를 보고 아주 잠시 넋을 잃었다. 미동 없이 멈추어 선 소년을 위해 먼저 입을 열어준 것은 소녀였다.      


“…안녕?”

“…아, 안녕.”

“왜 그래? …나 이상해…?”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옷이, 잘 어울려서.”

“으응, 다행이다.”     


소녀의 뽀얀 뺨이 분홍색 코스모스와 같은 빛으로 물들어가는 것까지 눈에 꼭 담아 기억해둔 소년은 며칠 전처럼 먼저 자전거에 올라 소녀를 돌아보았다.      


“갈까?”          



─          



나란히 그림을 그렸던 산 입구를 지나, 앞장서 걸어가는 소녀의 뒤를 차근차근 따르며 산길을 오르던 소년은 소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숨을 쉬었다. 산행이 익숙할 리 없는 소년이라, 그래서 조금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만의 비밀 장소를 소년에게 기꺼이 알려주고자 애를 쓴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힘든 숨결까지도 다 나아지는 듯했다.      


“다 왔다!”     


소녀의 외침에 고갤 들어보니 곳곳의 나무들이 예쁜 색으로 물들어 아름다운 가을의 경치를 보이며 소년과 소녀를 반겨주었다. 소녀만 아는 이곳은 너른 평지의 풀밭이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는 그런 장소였다. 소녀는 소풍 바구니에서 피크닉 매트를 꺼내 중앙의 가장 좋은 자리에 펼쳐놓았다. 돗자리가 가을바람에 살랑이자 중앙에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신발을 벗고 그 신발도 한 짝씩 모서리에 놓았다. 자신이 마련한 자리가 만족스러운지 뿌듯하게 웃던 소녀는 고개를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소년에게 손짓해 보였다. 

소년은 그것을 본 뒤에야 소녀의 장소로 발을 들였다. 천천히 걷고 걸어 중앙까지 도달해서는 소녀처럼 모서리에 신발을 한 짝씩 놓아 매트를 고정하는 걸 돕고는, 폭신하고 예쁜 매트 위로 살포시 앉았다. 소녀도 그 옆에 함께 털썩 앉아 소년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함께 활짝 웃었다.           



샌드위치를 나눠 먹고 두 사람의 풍경 사이로 살랑살랑 떨어진 단풍을 주워다 모으기도 하던 소녀와 소년은 이제 돗자리 위에 드러누워 도란도란 작은 수다를 떨기도 하면서 푸르른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과 적당히 포근한 햇살, 그 아래에서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편안히 서로의 곁에 머무르는 두 사람. 둘만의 추억이 될 즐거운 가을 소풍이었다. 그때 소년이 물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 으음, 아직은 잘 모르겠어. 너는?”

“난 선생님. 선생님이 되고 싶어.”

“너랑 잘 어울린다. 하지만 책도 많이많이 읽어야 할 텐데, 괜찮겠어?”

“응, 당연하지. 네가 모르는 것도 내가 다 가르쳐줄게.”     


소녀는 소년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조금 얄밉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소녀는 금세 웃었다. 소년이 선생님이 된 먼 미래에도 소년의 곁에 있고 싶었으니까. 소년의 말은 마치 그때까지도 쭉 함께하자는 약속처럼 들렸으니까. 


“다음 주 주말에도 놀러 갈까? 하고 싶은 거 있어?”

“…학교?”

“응?”

“학교에 가보고 싶어. 네가 다니는 학교.”

“그거 좋다. 주말이라 사람도 없을 거고, 운동장에서 그네도 탈까?”

“응, 좋지. 이왕이면 교복도 입고 만날래? 나도 우리 학교 교복이 있긴 하니까.”

“응응! 매일 나만 교복 차림이었잖아, 나 네 교복도 궁금했어.”

“그럼 다음 주에 교복 입고 만나기로, 약속.”

“응, 약속.”     


올려다보던 하늘에 붉은빛이 돌기 시작할 즈음 두 사람은 매트와 바구니를 정리해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왔다. 산 입구에 세워두었던 자전거에 함께 오르는 일이 제법 익숙해지고 있었다. 며칠 전 소녀가 사박사박 밟고 놀던 낙엽의 양은 그날보다 더 많아져 있었다. 

두 사람은 노을 지는 하늘 아래를 달려 마을로 향했다. 저번보다 더 차가워진 바람을 가르며 나아가는 자전거의 양쪽으로는 여전히 코스모스가 있었지만, 그들은 벌써 조금씩 시들해지고 있었다. 작년에는 더 오래 피어 있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좀 빨리 추워지려나. 소녀가 스치듯이 생각했다.      


소년의 자전거는 소녀를 실은 채 소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파란 지붕 아래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소녀의 앞에 앉아 있던 소년의 뺨은 한기로 조금 붉어진 듯이 보였다. 소녀는 무심코 소년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질 뻔했지만 아차, 하며 집으로 급하게 들어가더니 금방 다시 쏙 나와선 남색의 목도리를 소년에게 둘러주었다.      


“괜찮은데….”

“괜찮긴, 가만히 있어 봐.”     


다음에 볼 때 돌려주면 되지. 목도리에 포근하게 감싸진 소년을 보고 씩 웃는 소녀를 보면, 소년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고마워. 목도리만큼 따뜻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소년은 소녀에게 등을 보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소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전거 바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소년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어주던 소녀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 소녀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은 소년과 약속한 날이기 때문에 교복을 더욱 가지런히 다려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면 자꾸만 피슬피슬 웃음이 났다. 교복을 입은 소년은 또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고, 마치 우리가 같은 학교의 학생들 같아 보일 것이었다. 설렘과 기대를 가득 안고 이불을 뒤집어쓴 소녀는 추위를 다 막아주는 포근함 속에서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집 앞 나무의 잎들도 다 낙엽이 되어가는 중이었고, 겨울이 문을 두드리듯 소녀의 집 대문이 덜컹거렸다. 훌쩍 추워지기 전에 소년과의 추억이 더 생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녀는 눈을 감았다.      


그날 새벽엔 다급하게 내달리는 자동차의 소리가 창밖을 빠르게 스쳤다. 기대감 때문에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던 소녀는 그 소리에 깨서, 가물가물한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잠결에 들은 것이라 그 차 소리가 꿈에서 난 건지 현실에서 들린 소리인지 제대로 구분되지 않았다. 그렇게 소녀는 당연하게도, 스르륵 다시 꿈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소녀가 다음 날 아침 분명하게 들은 현실의 소식은, 그 애가 여기를 떠났다는 것이었다. 

새벽에 갑작스레 병세가 나빠져 급히 실려 갔다고, 아마 늘 그랬듯 병원에서 머무르다가 원래 소년이 가야 했던 곳으로 갈 거라고, 남겨진 집은 그들이 이사를 왔던 날처럼 부모님이 와서 이삿짐을 꾸려갈 것이라고.      


며칠 뒤 들은 대로 짐을 가지러 온 소년의 부모는 마을을 돌며 작별 인사를 했다. 소녀는 조용히 방에 틀어박혀서, 소풍 날 주워와 지금은 갈색이 되어버린 단풍잎을 쥐고 옷걸이에 걸린 교복을 바라보았다. 단풍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바스라질 것만 같이 말라 있어서, 소녀는 그것을 자신의 일기장 사이에 조심히 끼워 넣었다. 그때 누군가가 소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너에게 전해달라고 했다는구나.”     


소녀의 엄마는 소녀의 손에 쪽지를 쥐여주었다. 하얀 종이 위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그 애가 있게 될 곳인가 보다. 소녀의 엄마는 더 많은 것을 묻지 않은 채 소녀에게 시간을 주었다. 달칵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바라보던 소녀는 의자에 앉아 그 주소를 가만히 바라보며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소년이 떠났다는 소식에도 울지 않던 소녀는 이제야 울음이 나왔다. 자신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소년에겐 추억이 되지 못했을까 봐. 함께인 게 좋아서 보냈던 순간들이 소년의 몸에 독이 되었을까 봐. 소녀는 죄책감을 느끼며 마구 울었다.      


더는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운 다음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책장에 꽂힌 교과서였다.      


선생님이 되고 싶어.

네가 모르는 것도 내가 다 가르쳐줄게.      


소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모든 교과서를 읽고 집에 있는 다른 책도 모두 매일매일 읽기 시작했다. 나중엔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까지 잔뜩 읽었고, 담임 선생님과도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 

소년이 주었던 쪽지는 더욱 색이 짙어지는 단풍의 옆, 그 일기장 사이에 자리한 채 오랜 시간을 흘려보냈다. 소년의 소식을 듣는 것이 지레 겁나기도 했고, 소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다. 소년에게는 쉬이 연락하지 못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대신, 언젠가 만날지도 모를 소년에게 떳떳하기 위함인지, 소년의 꿈을 함께 이루기 위함인지, 소녀는 선생님이 되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다.      


두 사람의 시월은, 그렇게 저물었다.           



─          



“너 또 여기 있었구나?”

“아, 왔어?”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폭신한 풀밭 위의 어느 나무에 기대어서 책을 읽던 남자는 제 옆에 두었던 가방 속에 낡은 책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추웠어?”

“응,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거 하고 있어, 너.”     


여자는 제 목에 둘렀던 남색 목도리를 풀고 그것을 남자의 목에 빙 감아주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가 같이 웃은 뒤에야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밥은?”

“너랑 먹으려고 기다렸지.”

“아니, 교감이 자꾸 이야길 질질 끌잖아.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교감 쌤은 항상 그러시더라.”

“몰라, 됐어. 우리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난 따뜻한 거 아무거나.”

“너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거 알지.”

“그럼, 잘 알지.”

“못 됐어.”

“아, 맞다.”     


우리 주말에 코스모스 보러 가자.      


대화하며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발치에는 노란 낙엽이 사그락사그락, 가을바람에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____ 다온 writerda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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