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깜냥깜냥 Dec 17. 2020

관계 복용 기록

written by 다온



나는 어려서부터 무수히 많은 약을 먹으며 살아왔다. 

두통이 없는 날이 없었고, 환경이 바뀌면 바뀔 때마다, 혹은 새로운 무언가를 접할 때마다. 그것이 사람이든 뭐든 그 스트레스로 곧장 몸살이 나는 아이였다. 조그마한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은지, 여리고 작은 몸에 무엇을 그렇게나 담아내려 했는지. 아이의 몸이 아픈 이유는, 내면의 성장 속도가 물리적 성장 속도를 한참이나 앞질러 달아난 탓으로 추정되었다. 나는 그렇게 번번이 앓으며 병원에 가거나 상비약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리고 아픈 내가 미처 아픈 줄도 몰랐을 때, 본능적으로 내가 찾아낸 약은 사람, 즉 친구였다. 꼭 같은 나이 같은 학년의 친구만이 아니라, 비슷한 또래의 언니 오빠 동생들, 그리고 좋은 선생님들까지. 그들은 모두 나의 친구였고 약이었다. 몸도 마음도, 내게 와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면 아픔을 잠시 잊을 수 있었고, 그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울고 웃으면 아픔을 조금은 덜어낼 수도 있었다. 곁에 있던 사람과의 즐거운 시간. 아픈 나에게는 그것이 곧 약이 되어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마냥 영원하고 행복할 수만은 없다. 나는 수많은 ‘약’을 만났고, 약이란 건 저마다 내게 잘 맞는 약이 있고 맞지 않는 약이 있기에, 나와 맞지 않는 약에서 오는 부작용도 당연히 감수해야 했다.           



그만큼 여러 약들과 만나고 스치고 작별하는 자연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음이 앞지른 길을 육체가 간신히 따라잡았을 때도, 나의 아픔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각해져 있었다. 예전처럼 두통이나 몸살이 잦은 것은 물론, 틈만 나면 탈이 나고, 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게워내고, 가만히 누워서 끙끙대는 것밖엔 할 수 없고, 이따금 쓰러지는 날도 있었다. 

몸에서 아픈 데가 늘어난 것도 모자라, 알고 보니 마음마저 병들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어쩌면 몸이 아프기 전부터, 아주 깊고 오래도록. 

내 몸이 계속 아파지는 이유가 대부분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그렇게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당시에는 사정이 있어 곧바로 확실한 치료를 진행할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오래도록 병든 채 살아왔는지 정확하게 알게 된 것도 꽤 최근의 일이다. 현재는 약 6개월째 정기적으로 치료를 진행하고 있고, 예전보다는 차도를 보이며 호전되어가는 첫발을 내디딘 정도이다.           



어릴 때는 뭐랄까, 그저 곁에 있어 줄 사람이면 다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내가 나를 상처 내기도 했을 테고, 타인이 주는 부작용에 실컷 아파하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셀 수 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온 현재의 나는 나에게 맞는 ‘약’이 무엇인지 잘 알게 됐고, 상황마다 적절한 ‘약’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가끔은 그렇게 머리로 인지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마음이 생각대로 안 돼 괴로워 앓는 날도 존재한다. 너무 오래도록 곪아왔던 병이라서, 낫는 데에도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런 나를 잘 받아들여 인지할 줄 알게 되었고, 그런 순간의 나에게 필요한 ‘약’까지도 잘 알고 있다. 부작용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방법까지 터득한 것이다.           



예전과 비교해 변화된 지금은,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소중한 나의 사람들이 나에게 약이 되어줄 수 있으며, 내게는 그들이라는 사람 자체, 또는 그 온기 자체가 너무나 소중한 약이라는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체감하고 있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관계란 건 영원하지 않지만, 거기서 올 부작용을 잘 이겨낼 방법도 알고 있고, 그만큼 나에게 맞는 처방전과 복용법을 마음에 잘 새기고서 지내는 중이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내 사람들이 약이 되어주고 있다. 다만 옛날과는 조금 다르게, 나를 위할 줄 알면서, 더 나은 방법으로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나만의 약이 되어주는 내 곁의 사람들이나 내가 처방받아 복용 중인 진짜 약물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책과 글, 좋아하는 장소와 풍경과 하늘 같은 것들도 나에게 충분한 약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약과 ‘약’이 존재하며, 모두가 저마다 다른 ‘약’을 복용하며 살고 있을 것을, 나는 믿고 싶다.           



저는, 오늘도 당신만의 약과 함께 하루를 보냈을 당신에게 이 글을 바치고자 합니다. 당신만의 복용법을 꼭꼭 잊지 않기를 바라며, 저의 글 또한 당신에게 괜찮은 약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____ 다온 writerdaon@gmail.com

매거진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