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2007년에 태국의 치앙마이라는 곳으로 가기위해서모든 리서치를 마치고 M단체의 마지막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쯤 M단체의 아프리카 케냐 책임자가 몸이 아프다면서 본부에 후임을 급히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하루아침에 발령지가 동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케냐는 답사 한 번을 안와 본채로 선임하고 E-메일로 상황을 주고받으며 모든 살림살이를 정리하니 이삿짐이라곤 이민 가방 8개가 전부였다.
우리 가족은 설렘과 긴장감으로 2007년 6월 18일,케냐‘조모 케냐타 공항’에 도착한다. 첫째 아이는 30개월로 아빠가 뒤에서 밀어주는 유모차에 탔고 둘째 아이는 4개월이 갓 넘어서 엄마인 나의 품에 안겨서 입국했다.
케냐에 도착한 지 6개월이 안된 12월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케냐 대통령 임기는 5년이 지반 1번 연임이 가능하다. 현대통령인 키바키는 연임을 위해서 야당의 오딩가와 대선을 치르게 되었다. 투표가 개봉되는 과정은 TV로 생중계가 되었다. 현대통령보다 반대편 야당대표의 표가 눈에 뜨게 앞서갔다. 정부는 토요일 오후에 일요일은 공휴일이니 투표 개시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월요일에 다시 개표를 시작한다고 공포를 했다. 그때부터 나라 분위기가 어수 선하하 더니 일요일 오후엔 키바키 대통령이 TV에 나와서 재선이 되었다며 선서하는 모습이 중계되었다. 그때부터 전국적으로 대통령 선거는 부정부패라며 시위가 일어나면서 부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나 다를 바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이로비의 가장 큰 슬럼가인 키베라에는 많은 부족들이 모여 사는데 날마다 폭동이 일어났고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만 갔다. 나이로비에 있던 군인과 경찰들은 시위가 일어나는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 틈에 도둑들은대낮에도 가게의 물건을 약탈하고 대범하게 가정집을 털었다.
나이로비에 살던 외국인과 돈 많은 인도인은 선거가 치러지기도 전에 본국으로 이미 출국을 했지만케냐에서 정착한 지 고작 6개월 밖에 안 된 우리 가족은 TV 뉴스를 통해서 바깥세상을 살필수밖에없었다. 나름 큰 쇼핑몰에 있는 슈퍼마켓은 진작부터쌀과 밀가루, 식용유, 빵, 우유, 설탕과 많은 식료품은 동이 난 상태였지만 잠깐이라도 문이 열리면 물만 사 오곤 했다.
케냐는 45개 이상의 부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중에 끼구유와 카렌진 부족이 제일 크다. 대통령 부정선거로 나머지 부족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부족들이 모여 사는 시골에서는 마을 간에 서로 죽이고 복수하는 사태가 연일 일어났다.
동아프리카의 허브라고 불리는 케냐는 국제구호단체와 UN아프리카 본부, 각 나라의 대사관과 외국기업 그리고 크고 작은 NGO 단체가집중적으로 자리를 잡고있다. 이런 단체들이 연합해서 케냐정부에게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부족 간의 살인을 멈추지 않으면베이스캠프를철수하든지 다른 나라로 옮기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폭동은 외부의 압력으로 잦아들었고 나라는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폭동 속에서도 사람이먹고사는문제는 중요하다. 나 또한한국에서 살 때는 먹지도 않았던 음식이 당기고 한 번도 안 담가 본 김치를 만들었다. 한국인에게 김치는 중요한 음식이다 보니 배추를 파는로칼 시장을찾아갔다.멍키 마켓이라고 불리는 시장은 ‘아가칸’이라는 종합병원의 길 건너편에있었다. 정식 이름은 시티파크 마켓이지만 근처에 원숭이 공원이 있어서 사람들은멍키 마켓으로 불렀다. 시장에가기라도 하면원숭이들은시장 안에 먹을 것이 많다는 것을알고는 소풍을 나오듯 지붕위로떼를 지어 다녔다. 그러다가 잘 익은 과일을 발견하면 순식간에 낚아채어서 공원으로 도망치곤 했다. 멍키 마켓의 지붕은얼기설기로나무가 얹혀 있었고 위로는 비닐이 엉성하게 덮여 있었다. 우기 철이면시장 바닥은 온통 진흙투성이가되어버리기 일쑤였다.
멍키 마켓에서 현지를 나를 보면 '무중구’라고 불렀다. 무중구란 키스왈리로 외국인이라는 뜻이다. 시장 사람들은 외국인인 나를 반갑게 맞아 주곤 했다. 나의 품 안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양인 아기가 신기한지 반갑게 아는 척을해주었다.
하루를 벌어서먹고사는젊은 청년들이 시장에는 넘쳐났다. 그들은외국인 여자가 시장에 오면 당연히일거리를줄 것이라는확신을 가지곤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멍키 마켓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대부분의 청년들의나이는 17살이나 그 아래였다. 그네들은 시장 안에서 서성거리다가 외국인을 발견하면 어디에선가불쑥 뛰쳐나와서 짐꾼역할을 자처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다. 바싹 마른 청년들은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독하고 싼 술을 마시거나 미라라는 마약을 먹으며 하루를 버텨낸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노숙자들은 자주 말라리아에 걸린다. 케냐 사람들에게 말라리아는 몸살감기처럼 걸리는 병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음식만 잘 챙겨 먹으면 1주일 후엔 일상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지만 에이즈 보균자가 30프로인 나라에선 며칠을앓다가 죽고 만다. 그렇게 멍키 마켓엔 낯익었던 젊은 짐꾼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져 갔다.
케냐 사람들은 친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일단은 ‘마이 프렌드’ 또는‘라피키, 라피키’라고 부른다. 라피키는 친구라는 뜻이다. 그렇게 나는, 멍키 마켓의사람들과 서서히 친구가 되어 갔다.
몇 해 전, 멍키 마켓에 불이 나는 바람에 모든 것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밤새 지붕과 석가래, 허접한 좌 판대 그리고 그들의전 재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과일과 야채는검은 숯덩이로 변해 버렸다. 거의 한 달동안이나연기가 올라온 시장에서는 멀쩡한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모습이엿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정글속에서 굶주린하이에나를 연상시켰다. 가끔씩 그 앞을지나갈때면귀가로 잿더미 위에서 슬피 우는 하이에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만 같았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다시 찾아간 마켓은 그사이에초입부터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늘 음식물이 쌓여있던 주차장은 뒤쪽 공터로 옮겨졌고, 짐꾼들이 손수 짐을 나르던 때와는 달리 바퀴가 달린 손수레가 등장했다. 길이 비좁아 서로 몸이 부딪혔던 골목은 차 한 대가 족히 지나갈 만큼 넓었다. 진흙으로 질퍽거리던 바닥은 굵고 단단한 돌들이 빼곡히 박혀있었고시장은전보다 훨씬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내가 케냐에 오기 훨씬 이전부터 멍키 마켓을오랫동안지켜오던 상인들이나를 기억하고는 ‘라피키’라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국인들이 자주가던배추집사장님 네는 성실하고 따뜻한마음을 갖은끼 꾸유 (케냐 45개부족 중 제일 큰 부족) 부부이다. 한국인인나는그네들이공급하는 배추로 1년, 365일내내 김치를 먹었다. 그때 담갔던 김치는 아마도 한국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모른다.
지금껏 내가케냐에서 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멍키 마켓 사람들의 친절함이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현지인들이 나에게 ‘라피키’라고 불러준 것처럼 이젠 내가 이곳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가서 ‘라피키’라고 부르곤 한다.
타국에서 살아가려면 그리움과 외로움을 잘 견디어 내야만 한다. 케냐살이 17년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 겪었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현지인들이 있었다. 그네들의 도움이 컸기에 나름 건강한 정신과 육체 그리고 마르지 않은 우물처럼 풍요로운 마음으로 적도의 땅, 케냐에서 흥겹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