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행이 누군가에게 소소한 행복을 안겨 줄 때
친구들을 만났다. 두 명. 셋이서 옹기종기 밥 먹고, 디저트 먹고 단골펍을 갔다. 재밌게 놀다 나왔다. 집에 가기 못내 아쉬워 소위 ‘노상을 까다’ 가 방을 하나 잡고 셋이서 쉬기로 했다. 5인이상 집합금지에 걸리지도 않고, 그냥 적당히 마시다가 들어가려고. 그 사이에 우리 집으로 가는 막차는 끊겼다(이게 바로 경기인의 비애다).
그런데 하나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내가 민증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한 달도 더 전에 텝스 시험을 보러 갔다가 흘리고 나왔는데, 솔직히 이젠 그 누구도 내게 민증을 보여달라는 말을 하질 않는 탓에 민증의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고 살았고, 그걸 까맣게 잊은 것이다. 여권 같은 것도 챙겼을 리가! 맙소사, 어디서도 민증 잃은 이십대 중반을 받아주지 않았다. 살려달라! 그러나 역시 어디서도 나를 살려 주지는 않았다. 그저 어쩌지 고민하며 나와 함께 길바닥에 앉아 있는 의리녀들 앞에 경찰차가 멈추어 ‘이 위로 쓰레기차 한 대 지나가는 것 못 봤느냐’ 고 물었을 뿐이다. 너무 궁금해 물었더니 쓰레기차가 없어져서 찾는 중이라는 골때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우리 지금 청춘 코미디 찍는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셋이 옹기종기 이태원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태원이 그렇다. 치안이 별로다. 밤 늦은 번화가가 다 그렇지만 이태원은 유독 심하다. 그 잠깐동안 수많은 외국인이 껄떡댔고, 종종 한국인도 그랬다. 이태원 지하철 밑으로 도망쳐 내려왔다. 내려오는데 거기 웬 사람이 누워서 잘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노숙자는 아니었고, 아마 놀다가 첫차를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이 광경도 너무 웃겨서 ‘그래, 청춘이니 이 짓도 하고 있는 거지’ 생각했다. 앉아서 잠시 있다가 결국 견디지 못한 서울 거주 친구가 하나 택시를 타러 갔다. 남은 경기도민 둘은 피씨방에 갔다. 그러나 피씨방도 민증 잃은 이십대 중반을 받아주지는 않았다…. 살려 달라니까! 인터넷 성인 인증도 안 되고, 무조건 실물신분증만 인정이다. 아르바이트 분이 나를 좀 측은하게 보는 것 같기는 했다. 누가 봐도 성인인 사람이 민증이 없어 쩔쩔매는 멋진 모습은…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도 나를 긍휼히 여겨 거둬 주지는 못했다. 안녕, 잘 있어. 남은 두 경기도민은 선택권이 없었다. 택시를 탔다. 얘들아 미안해. 나 때문에 불필요한 지출을 본 친구들 때문에 너무 난감하고 미안했다. 의리녀들은 상관없다고 해 줬지만.
생각해 보면 오늘 오전부터 재수가 안 좋았다. 어제 생리가 터져서 생리 이틀째, 양이 쏟아지는 날인데다, 친인척이 상을 당하는 꿈을 꾸고 깨어났더니 엄마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고, 친구들에게 안 입는 티셔츠를 넘기려고 만난 건데 티셔츠도 까먹고 그냥 나갔다. 홍철 없는 홍철팀, 티셔츠 없는 티셔츠 만남이 된 것이다. 만나서는 잘 놀았으나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여하튼, 택시에 타자마자 기사님이 심드렁한 말투로 물어왔다.
“어디 가세요?”
“XX요.”
기사님 목소리에 화색이 돈다.
“XX요? 잠깐만요, 여기다 대고 말씀해 주세요….”
차가 출발한다. 기사님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아무리 돈 많이 쓰는 손님이래도 이 정도로 화색이 돌 일인가? 이내 궁금증이 해결된다. 기사님이 먼저 입을 여셨다.
“아가씨가 오늘 저를 살렸네요.”
“오늘 수입이 안 좋으셨나봐요?”
“하루종일 손님이 너무 없었어요.”
“저는 민증을 잃어버려서 어디서도 안 받아주길래 결국 택시를 탔는데, 제가 운이 나쁜 덕에 그래도 기사님께는 좋은 일이 됐으니 다행이에요.”
기사님이 허허 웃으셨다. 솔직히 나는 오늘 하루종일 돈도 많이 썼고, 택시비는 정말 예상치도 못한 큰 지출이었다. 민증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내 불찰이지만. 그렇게 나의 골치아픈 하루가 기사님에게는 망해 버린 하루를 살려내는 결과로 작용했다. 친구들에게 미안해 무거워졌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래, 뭐 이런 날도 있는 거다. 행복 총량의 법칙이다. 나한테서 덜어진 행복만큼 오늘 기사님에게 갔다. 누구 하나라도 행복했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니겠는가? 하루의 불행때문에 내내 내 기분이 안 좋으면 너무 수지가 안 맞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둘 다 행복하면 좋지.
“그러니까 뭐 행복 총량의 법칙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