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건강다이제스트 11월호에 투고한 내용입니다. 시험관을 하면서 느낀부분을 솔직히 담아보았습니다>
나는 77년생, 마흔여덟 살의 중년 여성이다. 서른여덟에 늦은 결혼을 했다. 결혼 전에는 아이에 대한 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함께 살아갈 사람이 생기자 마음 깊은 곳에서 ‘가정을 완성하고 싶다.’는 바람이 자라났다. 산부인과를 다니며 자연임신을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더 미루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국내 굴지의 난임병원을 찾았다.
2015년부터 3년 동안 시험관 시술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몸은 지쳤고, 마음은 무너졌다.
건강까지 악화하면서 결국 아기를 포기해야 했다. 시간이 흘러 건강은 회복되고 일상도 밝아졌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몸과 마음 깊숙이 응어리로 남아 있다.
이 글은 그 응어리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기록이다. 나처럼 늦은 나이에 난임병원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나마 닿기를, 그리고 시험관이 결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리고 싶다. 더 나아가 고령 산모가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병원과 정부가 결과의 숫자만 보지 말고 과정의 온기를 키우는 시스템을 고민해 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남편은 나보다 여섯 살이 많다. 우리 둘 다 적지 않은 나이라 임신은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난임병원의 문을 두드렸고, 그곳에서 우리는 생식세포 의 기능적 나이를 추정하는 검사를 진행했다.
의사의 말은 단호했다.
“난자는 노화되었고, 정자의 질도 좋지 않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충격은 피할 수 없었다. 내 나이 서른아홉, 남편은 마흔다섯. 숫자보다 더 노화됐다는 표현은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병원은 ‘더 늦기 전’을 강조하며 시험관 시술을 권했고, 우리는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믿고 시작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원인은 둘’일지라도 ‘과정은 거의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라는 사실을.
매월 호르몬 주사를 맞고, 배란을 조절하고, 초음파로 난포를 확인하고, 난자를 채취하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다. 난포가 충분하지 않으면 다음 달을 기약해야 했다. 나는 난포 자극을 해도 난자가 많이 나오지 않는 편이었다. 병원에서는 “한 달에 한두 개씩 모아 5~6개가 되면 이식하자.”는 누적 배아 이식 전략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채취와 대기가 반복됐다.
몸의 통증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건, 이 고단한 과정을 성공할 때까지 매월 반복해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남편도 초반에는 안쓰러워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내가 스스로 배에 주사를 놓는 모습은 그의 눈에 점점 ‘익숙한 풍경’이 되어갔다. 여성이라면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일처럼 받아들이는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다.
병원에서 남편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정해진 날에 정자를 채취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후의 모든 과정은 나의 몸에서, 나의 시간 위에서 이루어졌다.
‘왜 남성의 정자 건강을 개선하는 치료는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을까?’
‘왜 치료의 무게는 대부분 여성의 몸에 실릴까?’
문득 이런 의문이 들다가도 자신을 달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성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아이를 품는 건 결국 내 몸이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이것이 전부일까?’라는 질문은 내 안에서 점점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주변의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시험관 시술의 실패보다 더 큰 상처는 남편의 무책임과 무성의함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남성보다는 여성 쪽에서 더 강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절실함에 기대어 치료 시스템이 여성 중심으로 굳어지고, 그 위에 병원의 수익구조까지 얹혀 있는 것은 아닌지 단순하지만 뼈아픈 의심이 들었다.
2015년 당시 시험관 시술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았다. 정부 지원도 체외수정 4회, 인공수정 3회로 제한적이었다. 그 이후의 비용은 모두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약값, 채취비, 배양·보관비, 유전자 검사비, 이식비… 계산기 숫자가 커질수록 마음의 여유는 바닥으로 내려갔다.
첫 시술 때는 우리 부부도 아이 이름을 지어놓고 행복한 미래를 그렸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계절이 몇 번을 돌아도 돌아오는 말은 늘 같았다. “이번에도 실패입니다.”
병원은 더 정밀한 검사를 권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었다.
‘이번엔 될 거야. 다음엔 틀림없어.’
자신을 다독이며 버텼다. 정부 지원은 이미 끝났고, 카드 한도마저 가득 찼지만, 병원에서 필요하다 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부 지원 외에 사비로만 3천만 원 가까이 썼다. 돈이 들어갈수록 ‘희망’은 점점 ‘집착’으로 변했다.
대기실에서 들려오는 타인의 사연은 내 마음을 더 흔들었다.
“누구는 일곱 번 만에 성공했다더라.”
“집 한 채 날리고 겨우 아이를 품었다더라.”
“시험관은 결국 확률 싸움이다.”
그 이야기들은 곧 내 현실이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아이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번에는 확률이 더 높다.’라는 말에 매달리는 확률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처음 다녔던 대형병원은 분업화가 철저했다. 초음파를 보는 곳과 결과를 듣는 곳이 분리되어 있었고, 담당자도 달랐다. 어두운 초음파실에 들어가면 의료진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설명은 최소였고, 기계음만 웅웅거렸다.
“오늘은 난자가 두 개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낙제점을 간신히 면한 학생처럼 안도했다. 한 개도 안 보이는 날도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힘들다고, 한 달만 쉬자고 말하면 의사는 늘 같은 문장을 건넸다.
“오늘이 당신에게 가장 젊은 날입니다. 꾸준히 나오셔야 합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꾸준히 하면 언젠가 되겠지.’
하지만 이런 성실함이 나의 마음에 검은 그림자를 점점 키워내고 있었다. 이식하는 날이면 줄지어 누운 여성들 사이로 의사가 걸어 들어오는 식이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배아를 주입하며 다음 침대로 이동했다. 간호사는 “10분 후에 일어나세요”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모멸감에 속울음을 참았다. 사람이라기보다 부품처럼 다뤄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병원은 너무나 차가웠고, 너무나 비인간적이었고, 그래서 모멸감이 컸고, 지금도 그 기억은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결국 2년 만에 병원을 옮겼다. “이 병원은 조금 더 인간적이야.” 지인의 말에 그렇게 했다.
정말 달랐다. 존중을 받는 느낌이 좋았다. 난자 채취 후 반드시 한 달은 쉬어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초음파는 의사가 직접 보았고, 화면을 함께 보며 설명도 해주었다.
“지금 난포 상태가 이렇습니다. 오늘은 조금 쉬어가도 괜찮습니다.” 진료실에서는 눈을 맞추고 묻고 들어주었다. 간호사들도 차분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병원’이었다. 나는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하지만 최근 이 병원도 문을 닫았다. 저출산과 대형병원 쏠림 속에서 생존이 어려웠다고 한다. 사람 냄새나던 병원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마음이 오래 쓰렸다.
우리 사회에서 난임은 더는 ‘특별한 몇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난임 시술 건수는 지속해서 증가하고, 난임 치료를 통해 태어나는 아기의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35세 이상 고령 산모가 급증해, 분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어섰다는 통계도 있다. 출산율은 낮다고 말하면서도, 정작난임 치료의 ‘과정’에 따뜻함과 안전망을 충분히 마련했는가를 돌아보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정책은 많이 달라졌다. 현재는 소득 기준이 사라지고, 신선 배아·동결 배아·인공수정에 각각 건강보험이 적용되어 최대 21회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비급여 영역이 존재하고, 횟수 제한을 넘으면 모든 비용은 개인 부담이다.
시험관은 확률 게임이 아니다. 누군가의 삶이고, 인생이고, 가족의 서사다.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을 보지 않는다면 정책은 반쪽에 불과하다.또 다른 문제는 병원의 운영 논리다. 시험관 시술은 고도의 기술과 팀워크가 필요한 의료 영역이다. 동시에 수익구조와 효율의 논리가 강하게 작동한다. 성공률은 중요한 지표지만, 그 지표에 환자의 몸과 마음이 깎여나가서는 안 된다.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로 쉼과 회복의 신호를 지워버리는 관행, 초음파와 진료를 철저히 분리해 환자를 데이터 단위로 분절하는 시스템, 이식 당일의 ‘컨베이어벨트 같은 동선’… 이런 것들이 환자에게 남기는 것은 차가운 기억과 긴 그림자다.
나는 바란다. 병원이 수익을 좇기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곳이 되기를. 성공률을 위해 환자의 몸을 과도하게 몰아붙이는 대신, 여성의 건강권과 회복권을 지켜주는 시스템이 되기를. 초음파실과 진료실의 칸막이 뒤에서 환자가 데이터로만 오가지 않기를. 의사가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설명해주고, 질문을 기다려주는 진료가 표준이 되기를.
횟수 중심의 지원 체계를 넘어서 비급여 영역의 투명성과 합리성을 높이고, 남성 난임 치료를 적극적으로 권고하는 표준 프로토콜을 마련해 부부 공동 책임의 치료 문화를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과정의 따뜻함’을 제도화했으면 좋겠다. 상담과 심리지원, 동료 지지 모임, 휴식 권고와 회복 가이드, 퇴근 시간 이후에도 가능한 설명 창구 같은 것들 말이다. 난임 치료는 몸의 문제이자 마음의 문제다. 마음을돌보지 않으, 치료는 어느새 ‘확률 게임’으로 전락하고 만다.
실패의 계절들을 지나며 나는 알게 되었다. 용기란 결과를 바꾸는 게 아니라 과정의 나를 지키는 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병원이, 제도가, 사회가 그 과정을 지켜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답게’ 치료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작은 기록이, 누군가의 오늘을 버티게 하는 온기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