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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동동 Apr 17. 2024

할머니의 손은 아직 따뜻했다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을 읽고

  죽음은 무섭다. 

  어린 시절에 죽음은 더 무서웠다.


  어릴 때 즐겨보던 TV 프로그램으로 “전설의 고향”이라고 있었다. 전설의 고향에는 거의 매회 차에 귀신이 나왔다. 옛날엔 세상에 한을 품을 사람이 온통 여자, 그것도 처녀뿐이었던 모양으로 귀신은 거의 하얀 소복에 검은 머리를 풀어 헤친 처녀 귀신이었다. 그 처녀 귀신이 가느다랗고 서늘한 목소리로 “서방니임~” 하고 부르면 나랑 동생들은 “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가끔은 처녀 귀신 말고 검은 갓이랑 도포를 입은 저승사자도 나왔다. 저승사자는 저승 공무원이라 그런지 갓 쓰고 도포 입은 남자로 나왔는데 저승이라 갓이고 도포고 다 검은색이었다. 특이한 건 남자인데도 여자처럼 입술에 칠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색깔은 검은색이었는데 아직도 저승사자하면 그 검은색 입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이유가 색이 검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남자가 립스틱을 하고 있다는 게 이상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검은 입술을 한 저승사자가 얼굴에 퍼런 조명까지 받으며 방 한구석에서 갑자기 나타나면 심장이 ‘쿵’ 떨어질 정도로 무서웠다. 이렇게 전설의 고향을 보고 나면 몇 날 며칠은 밤에 불 끈 후 화장실도 못 가고 끙끙댔다. 

  

 


  죽음이 이렇게 전설의 고향에 나온 것처럼 무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언제부터 들기 시작했더라? 대학 시절, 한 친구가 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친구네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할머니는 돌아가실 듯 말 듯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마침내 누군가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다고 했다. 방에 들어가 할머니 손을 잡아 봤다. 여전히 따뜻했다. 아직 체온이 채 식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여전히 살아 계신 걸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 가슴이 오르내리는지 봤다. 역시 움직이는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할머니 코 밑에 종이를 대어보라고 했다. 종이가 떨리면 숨을 쉬고 계신 거고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신 거라고 했다. 종이를 대어봤다. 종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았다.’

 



   실제 누군가 겪은 죽음에 대해 듣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친구가 이야기해 준 죽음은 전설의 고향에서 보던 죽음의 세계와 달랐다. 거기에는 저승사자도, 처녀 귀신도, 무덤도 없었다. 할머니의 죽음은 슬펐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런 것 말고도 무언가 더 있었다. 뭔가가 마음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손’? 죽음은 차가운 게 아니었던가? 죽음은 생명의 단절이고 갑작스러운 것이지 않던가? 그러나 친구가 겪은 할머니의 죽음에는 그런 생과 사의 구분 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숨결이 너무 미약해서 코 밑의 종이를 떨리게 할 수도 없을 때 의학적으로 죽음을 선포할 수 있지만, 실은 생명이 조금 더 지속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 할머니가 숨을 거둔 시간은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그만큼 생과 사의 경계는 흐렸다. 할머니의 죽음에서 죽음이란 생명의 불꽃을 한순간에 꺼 버리는 스위치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과 사가 뒤엉켜 있다가 생명이 서서히 잦아드는 모습에 좀 더 가까웠다.   

 


  사실 자연의 섭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쪽이 더 맞는 말이다. 죽음의 이미지는 무섭지만, 탄생과 소멸은 생명이라면 당연히 거치는 순환 고리다. 마치 계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것과 같다. 태어난 존재는 성장하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럼으로써 죽음은 새 생명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이 자연의 순환은 단절이 아니다.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 생과 사는 이렇듯 맞물려 있다.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의 책, <아침 그리고 죽음>는 그런 자연의 흐름으로서의 죽음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책 속에서 어부 요한네스는 어부들의 구전 노래 소리와 함께 태어나고 부두를 뒤덮은 바다 안개 속에서 옛 친구의 인도로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 그의 영혼은 아직 이승과 걸쳐 있지만 곧 떠날 참이다. 그의 눈에 삶과 죽음의 세계가 겹쳐 보이고 그는 어리둥절하지만 무섭지는 않다. 요한네스는 바다의 안개 속에서 사랑했던 기억들을 다시 만난다. 그의 죽음은 이렇듯 슬프지 않고 담담하다. 

  


  이 책은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눈으로 보고 머리로 줄거리를 따라가려 하면 지루해진다. 그러나 글자가 주는 이미지, 소리를 들으려고 하면 귀에 파도 소리가 들리고 코에 바다 내음이 들이찬다. 늙은 어부의 마지막 여정, 마지막 날이 눈 앞에 펼쳐진다. 요한네스와 함께 안개낀 바닷가 항구에서 그와 딸, 싱네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된다. 그렇게 독자도 죽음을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게 할머니 이야기를 해 주었던 친구도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친구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내 기억이 맞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내가 기억하고 싶은대로 간직하고 있다. 친구는 없지만, 친구 할머니의 따뜻한 손은 나를 통해 남았다. 그리고 다시 이 글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죽음이라는 고리를 수없이 통과하면서도 인간의 기억을 남기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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