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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동동 Apr 22. 2024

옆자리 인연 운이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혼자 버스나 기차를 탔는데 우연히 옆에 멋진 이성이 앉게 되어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는 식의 전개가 많다. 그렇지만 내 경험에 빗대어 보자면 그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나는 고향이 부산이고 대학은 서울로 다녔다. 그래서 주말과 방학 때마다 서울-부산을 거짓말 조금 보태서 수백 번은 더 다녔다. 주로 기차를 탔는데, 나 혼자였으니까 옆자리에는 다른 승객이 앉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 내내는 물론이고, 지금껏 기차를 타고 다닌 세월을 몽땅 다 털어 봐도, 내가 기억하는 한 옆자리에 괜찮은 사람이 앉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이런 일에 특히 운이 없는 걸 수도 있지만, 주변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은 기억도 별로 없는 걸 보면 이런 경우가 흔하진 않은 게 분명하다. 아니면 내 주변 사람들도 다들 나랑 비슷해서 옆자리 인연 운이 없거나.


  처음 기차를 탈 때는 내심 두근거리기도 했다. ‘옆자리에 근사한 남자가 앉을지도 몰라. 나한테 말 걸어오면 뭐라고 하지?’ 순진도 하지. 영화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이었다. 아니, 내 경우엔 드라마는 거의 안 보고 순정 만화를 주로 봤으니까, 영화랑 순정 만화의 폐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근사한 남자’는커녕, 옆에 멀쩡한 사람이 타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대학교 1학년이었던가 2학년이었던가, 아직 어린 학년이었던 때의 일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무궁화호를 타고 있었는데 옆좌석에 어떤 남자가 앉았다. 잠깐 설명이 필요한데, 당시 열차는 새마을호가 가장 빨랐고, 무궁화호가 그다음, 그 밑으로 통일호, 이렇게 3중 체계로 되어 있었다. 새마을호는 지금의 KTX처럼 급행이라 주요 역만 정차했다. 즉, 경부선이라면 서울-대전-동대구-부산 식이었다. 통일호는 완행열차로 모든 역에 일일이 정차했다. 무궁화호는 새마을호와 통일호의 중간으로 새마을호보다는 정차하는 역이 많지만 통일호처럼 일일이 모든 역에 다 서지는 않았다. 가격도 만 원대로 새마을호의 1/3 수준이라 서울에 유학 중인 지방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기차 편이었다. 부산에서 올라가는 서울행 무궁화호 기차는 보통 부산역-구포-삼랑진-밀양-동대구-왜관-구미-김천…, 이런 식으로 정차했다. 간단히 말해 부산에서 동대구 사이에도 몇 군데 더 정차하는 역이 있었다는 말이다. 



무궁화호(출처: 네이버 이미지)

 


  나는 부산역에서 탔는데, 그 남자는 아마도 구포에서 탔던 것 같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매서운 인상으로 나이는 대량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머리는 빡빡 민 데다가 헐렁한 회색 옷을 입고 있어서 처음엔 스님이라고 생각했다. 옆자리에 스님이 앉다니 별 경험을 다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서 서울까지 간다고 했더니 자기는 동대구까지 간다고 했다. 그렇게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아무래도 스님은 아닌 듯했다. 그러면 왜 저렇게 머리를 빡빡 깎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별로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남자가 자꾸 질문하는 것도 성가시고 해서 무릎 위에 펼쳐 둔 책을 보려 했다. 그런데 남자가 자꾸 말을 걸며 방해했다. 아무리 딴청을 피우며 책을 읽고 싶다는 표시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끝내 나는 책 보는 걸 포기하고 남자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기차가 동대구에 어서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부산에서 동대구까지 무궁화호로 1시간 반 정도 걸리는데, 그때는 그 1시간 반이 5시간쯤으로 느껴졌다. 마침내 기차가 동대구역에 들어섰다. 드디어, 이 사람에게서 해방이구나!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 그런데 이 사람이 내리질 않았다. 왜 안 내리지? 동대구 다음 대구역에서도 그 남자는 내리지 않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남자는 옆에서 계속 끈덕지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 남자는 어디까지 가는 걸까? 대화를 피할 수도 없고 어디까지 가는 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속으로만 안절부절못했다. 김천역에 다가갈 때 나는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일어섰다. 화장실에서 숨을 가다듬고 나와서 보니 마침내 내 좌석 옆에 그 남자는 없고 낯선 아주머니가 앉아 계셨다. ‘아! 그 사람이 드디어 내렸나 보다. 동대구나 아니라 김천이었나 보구나. 괜히 사람을 의심했네. 어쨌건 내렸으니까 너무 다행이다.’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내 좌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런데 조금 있자니 옆좌석의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한테 물었다. 


  “아가씨, 혹시 오빠 있어요?” 

  “예?” 

  “아니, 혹시 오빠랑 같이 여행하고 있나 해서.” 

  “예? 무슨 오빠요? 전 오빠 없는데요. 그리고 혼자 탔어요.” 

  뭔가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여기 앉았던 사람이 자기가 아가씨 오빠라던데?”

  “예에~~?”

  나는 소스라쳐서 되물었다. 내 반응을 보고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어쩐지~~!. 내가 김천에서 탔는데 좌석이 여기거든. 그런데 그 남자가 앉아 있는 거야. 좌석표를 보여주면서 비켜 달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자기가 여동생 하고 여행 중인데 꼬옥 같이 앉아 가야 하니까 자리 좀 양보해 달라는 거야.” 

   소름이 끼쳤다.

  “뭣이 좀 이상하더라꼬. 동생인데 왜 좌석이 떨어져 있어? 그래서 안 된다 켔지. 못 바꿔주니까 일어나라, 그카니까 일어나서 저 짝으로 가더라고.” 

  등골이 서늘했다. 

  “그 사람, 생판 모르는 사람이에요. 구포에서부터 옆에 앉았는데, 싫다는 표시를 해도 계속 이야기를 걸더라구요. 세상에, 제 오빠라고 그랬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어이구, 아가씨, 큰일 날 뻔했네.” 


  그제야 봇물 터진 듯 말이 주저리주저리 나왔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문득 고개를 돌렸더니 그 남자가 객차 문밖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였다! 나는 황급히 아주머니 팔을 붙잡고 다급히 속삭였다. “저기, 저 남자가 문밖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어요.” 내 말을 듣고 아주머니가 그쪽을 쳐다보자 남자 얼굴은 곧 사라졌다. 잠시 후에 그쪽으로 가서 살펴봤지만 남자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후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좌석에 꼭 붙어 앉아 있었다. 다행히 아주머니도 마침 서울에 가는 길이라 계속 옆자리를 지켜 주셔서 그나마 그날의 무서운 기억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진짜 치한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나중에 생각하니 그 남자의 빡빡머리는 절이 아니라 오히려 감옥에 다녀왔다는 흔적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오싹했다. 나중에 탄 옆좌석의 아주머니가 자기가 내 오빠라는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몇 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일로 옆자리 인연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대치가 아주 낮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이후 아직 그렇게 무서운 경험을 다시 한 일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옆에 만화 속의 왕자님이 타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옆자리 사람과 좋은 인연은 고사하고 악연이 되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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