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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동동 May 20. 2024

여기 아파트는 보고 사는 게 아니야

  토요일 늦은 오후였다. 주변은 아직 밝았지만 시계는 이미 6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오후 늦게 압구정에 도착했다. 토요일에는 부동산도 일찍 문을 닫는다. 불안하긴 했어도 6시 전이면 그래도 아직 문을 열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설마’는 없었다. 대부분의 부동산들이 벌써 문을 닫은 상태였다. 허탈한 마음이 이루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남편과 나는 대로를 따라 천천히 차를 몰고 가며 길옆의 부동산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혹시 아직 불을 끄지 않은 집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보이는 부동산마다 문이 굳게 닫히고 창은 어두 어두웠다.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저쪽에 아직 불을 환히 밝힌 부동산이 하나 보였다. ‘혹시?’ 서둘러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단발머리 중년 여성이 고개를 들고 우리를 쳐다 보았다. 


  “저, 아직 영업하시나요? 상담 가능할까요?”

  “그럼요. 가능하지요. 들어오세요.”  



  중개사 여사님은 반가운 얼굴에 우리는 마음이 놓여 가게로 들어갔다. 여사님이 권하는 대로 소파에 앉아 압구정 아파트에 관심이 있어서 한 번 둘러보러 왔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여사님이 즉시 말했다.


  “한번 둘러보고 가고 그러면 여기 아파트 못 사요. 매수 생각이 있으면 바로 사야지.”

  “아니, 그래도 집을 사는데 한 번 보기라도 해야죠”

  “사모님, 여기 아파트는 보고 사는 게 아니야. 집 보고 어쩌고 하면 늦어요. 워낙 매물이 없어서 나왔다 그러면 바로 사야 돼. 그것도 내가 사고 싶다고 사는 게 아니에요. 주인이 팔겠다고 해야 사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게 무슨…?”

  “아파트 가격이 자꾸 오르니까 집주인들이 매물을 거둬들여요. 계약금 가지고 와도 주인이 계좌 번호를 안 줘서 못 산다니까. 저기 저 안쪽에 계신 분들 보이죠? 아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주인이 팔겠다고 해서 계약하려고 왔는데 주인이 계좌 번호를 안 주는 거야. 마음이 바뀐 거지. 지금 계속 주인하고 연락 중인데, 언제 ok 할지 몰라서 하루 종일 저러고 있는 거에요. 주인이 계좌 번호 주길 기다리고 있는 거라니까.”


  과연 안쪽에 부부로 보이는 중년 커플이 앉아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초조한 얼굴인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남편과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서로 눈치만 봤다. 여사님이 말을 이었다.


  “지금 사장님(사장님이라니!) 예산으로 가능한 매물은 여섯 건 정도 있어요. 그런데 그 중 몇 건은 아마 힘들 거야. 매물로 내놓긴 했지만 주인들이 지금 이 가격에 팔 생각이 없나 보더라구. 전화를 안 받아. 옆에서 자꾸 부추기는 거지. 더 오를 거니까 갖고 있으라고. 그래도 이거 두세 건 정도는 주인들한테 물어볼 수 있어요. 거기는 전화 받을 거 같아. 어떻게 해요? 연락해 볼까요? 오늘밤에 가계약금 보내실 수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급전개였다. 압구정이라는 동네의 부동산을 한 번 두드려 보기나 할까 해서 왔는데 바로 매수를 결정해야 한다니! 남편도 나도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전 재산인데 여기, 이 자리에서, 갑자기 이렇게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결정해도 되는 걸까? 겁이 났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서는 흥분되었다. 이미 대치동 재건축 아파트가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걸 봤기 때문에 이런 속도전 부동산 계약이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압구정은 대치동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금액의 부동산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가볍게, 또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거래되는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망설이다가 또 놓칠 순 없어.’


  우리가 놓친 대치동 재건축 아파트들이 생각났다.

 

  ‘다들 이렇게 해서 자산을 불리는 거겠지. 어차피 사기로 마음먹은 거였잖아. 더 생각한다고 달라질 거 있겠어? 그래, 하자!’


  나는 애써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예, 매수 의사 있어요. 주인한테 전화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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