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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동동 May 22. 2024

30년 만에 다시 가다

화순 운주사

(이 글은 5월 26일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게재되었습니다.)


  나는 사학과 출신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학과는 취직과는 큰 인연이 없다. 요즘은 ‘문송하다(문과라서 죄송하다)’는 말이 대변할 정도로 문과 인기 바닥이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그래도 과 정원 60명을 넉넉히 채울 정도는 되었다. 사학과를 가면 답사를 간다. 선배 언니들 말이 답사는 ‘사학과의 꽃’이라고 했다. 답사는 매 학기 1번씩, 봄, 가을에 있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던가 2학년 1학기던가 전라도 쪽으로 답사를 갔다. 공주, 부여를 거쳐 화순을 찍고 순천까지 가는 일정이었다. 화순은 처음이었다. 예전에 교과서에서 ‘여순반란사건’ 때 나온 지명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오래전 일이라 풍경이 어땠는지, 어떤 길로 갔는지는 전혀 떠오르지 않지만,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이미 오후 깊은 무렵이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다. 공주, 부여에서 벌써 많이 걸은 다가 긴 버스 여행으로 이미 피곤했다. 졸다가 다시 움직이려니 너무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내처 자고만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답사반 선배들과 교수님이 이끄는 대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갑자기 잠이 확 깼다. 눈앞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아니면 내가 아예 꿈속의 세계로 들어선 것일지도 몰랐다.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면 이런 곳일까, 아니면 극락이 이런 곳일까. 눈앞에 여기저기 석탑과 석불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양이 다 달랐다. 다를 뿐만 아니라 독특했다. ‘우리나라에 이런 탑들이 존재하다니….’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둥근 원반을 쌓아놓은 듯한 탑, 거대하고 투박한 돌로 된 방 안에 앉아 있는 석불, 마치 하늘에서 땅에 꽂아 놓기라도 한 듯 기단부 없이 기다랗게 서 있는 탑. 바위 벽면에는 부처가 새겨져 있고 지붕 같은 바위 밑에 석불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크고 작고, 어떤 석불은 일어서고 어떤 석불은 앉았다. 제각기 모양도 크기도 달랐지만, 그 얼굴들이 머금고 있는 평화만은 같았다. 저 표정, 무심한 듯, 관조하는 듯한 저 긴 자비로운 눈매와 입은 관음의 것일까, 아니면 석가의 것일까, 아니, 그도 아니면 부처에 대한 믿음을 품고 살아가던 옛 고려 사람들의 마음일까. 탑과 석불들을 지나 계속 산자락을 따라 올라갔다. 또다시 공간이 열렸다. 그곳에는 와불이 있었다. 두 개의 석불이 누워 있었다. 마치 부부인 양, 동기인 양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다. 작은 석불은 큰 동기 옆에 꼭 붙어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크고 넓적한 바위 얼굴에는 고요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주변은 나무와 풀, 바위밖에 없었다. 관광객도 펜스도 없었다. 열반의 세계에 들기라도 한 듯 기이하면서도 평온했다.

 

  그곳은 화순 운주사였다. 운주사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폐사되었으나 이후 중건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옛날 큰 절의 모습은 없고 단지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대신 작은 사찰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운주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동국여지지>에 고려 초 승려인 혜명 스님이 1,000여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라는 이름과 천불천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탑과 석불들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형태로 볼 때 세련된 장인의 솜씨라기보다는 토속 불교와 고려 시대 전파되어 온 다른 종교들의 영향이 있지 않은가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 사이의 틈새가 운주사에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더한다.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관광지로서 개발은 덜 되었지만, 그 덕분에 이곳의 다른 세상 같은 느낌은 더욱 생생하다.

 

  

  그날 이후 언젠가 다시 운주사를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30년 가까이 그 마음을 간직하고만 있었다. 그런데 지난 주말 마침내 그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일요일을 낀 1박 2일 전남 여행, 구체적인 행선지는 보성과 벌교였다. SRT로 광주까지 내려가 렌트카를 빌려 가기로 했다. 그런데 보성 가는 길에 화순이 있는 게 아닌가! 거리도 광주에서 차로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즉시 일정에 화순을 끼워 넣었다.

 


  운주사로 가는 도로는 3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들어가는 차는 우리뿐일 정도로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절 앞에 매표소와 말끔한 주차장이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사찰 입장이 무료가 된 지 오래라 매표소는 문을 닫았고, 주차장 주변에는 다른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이나 매점이 전혀 없었다. 깔끔하게 정비된 일주문은 오히려 생경했다. 들어가는 한걸음 한걸음에 복잡한 생각이 실렸다. 과연 그대로일까? 상업화의 물결을 뒤집어쓰고 다 변해버리진 않았을까? 잘 닦여진 아스팔트 길이 반갑기도 하면서 불안하기도 했다.


   


  내 걱정은 기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에 기대고 선 석불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올망졸망, 작고도 크면서 여전히 돌옷에 세월의 더께같은 이끼를 올리고 선 모습을 보자 반가움이 와락 밀어닥쳤다.



  이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탑들이 오솔길을 따라 하나둘씩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옛 고향 집에 돌아온 듯 들뜨고 흥분되었다. 짧은 오솔길이 갑자기 넓어지며 공간이 열렸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눈앞에 석조불감이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 같기도 하고 돌덩이 같기도 한 이 불심(佛心)의 덩어리앞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석조불감은 부처님을 모신 돌로 된 방이다. 크기는 웅장하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단순히 크다고만 말하기에는 표현이 부족하다. 투박한 양식, 마치 바위를 그대로 잘라 얹어 놓듯 넓적한 돌 지붕 아래 방 안에는 두 개의 석불이 각각 남과 북을 향해 앉아 있었다. 석불의 크기는 방이 꽉 찰 정도였다. 흡사 시골 씨름판에 나온 덩치 큰 장사 같았다. 두 석불은 어두운 방에서 밝은 바깥을 각각 남과 북을 바라보며 고요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금 오래된, 그렇지만 대답할 수 없는 의문이 떠올랐다. '누가 만들었을까?'


석조불감

  

  탑들을 둘러보고 사찰 입구의 산자락으로 올라갔다. 와불을 보기 위해서였다. 올라가는 길이 가팔랐다. 그때도 이렇게 가팔랐던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가는 계단은 군데군데 널빤지를 덧대어 놓았고, 표지 기둥은 썩어 반이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이름 모를 존재로 있는 것이 이곳의 석탑과 석불들에게는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도달한 그곳, 더 이상 계단이 이어지지 않는 곳에 와불이 있었다. 30년 전 모습 그대로, 아니, 처음 새겨졌을 때 표정 그대로 거대한 얼굴 위에 평온함을 가득 담고 고요히 세월 아래 누워 있었다. 경이로웠다. 땅을 요 삼아 하늘을 이불 삼아 흘러가는 세월에 무심히 누워 있는 그 모습은 이 땅에서 묵묵히 견디어 온 이름모를 민초들의 마음 같았다. 통일 신라 사람들이, 고려인들이, 그리고 그 후 이 땅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세월을 견디어 내어 온 표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30년 전에 내 마음에 그토록 깊이 각인되었던 건 바로 그 무심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와불


  

 나는 이제 누가  석탑과 석불들을 만들었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은 우리네 옛 사람들이다. 세련된 솜씨를 가진 석공들이 아니라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석불과 탑에 소박한 소원을 비는 이 땅에서 나고 자라며 대대손손 살아온 이들이다. 그들만이 우리 땅, 우리 산, 우리 바위에서 솟아오른 듯한 이런 탑을 만들 수 있는 손을 가졌다. 그들만이 우리 땅과 돌이 저절로 낳은 듯한, 모든 근심을 넘겨 버리는 평온한 눈매와 입매를 가진 석불을 빚어낼 수 있는 눈썰미를 가질 수 다. 그들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30년, 아니 천년이면 어떠랴. 오래오래 언제까지나 그 탑과 석불들이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 처음 세워졌을 때의 고요함으로 세월을 누르며 서 있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을 묻으며 보성으로 가기 위해 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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