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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동동 Sep 14. 2024

남편은 탄수화물을 먹지 않는다

'쌀 탄수화물'만 안 먹는다

  지난주의 일이다. 쌀이 똑 떨어졌다. 정말 한 톨도 없었다. 어쩐지 우스웠다.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닌데 집에 쌀이 하나도 없다니? 


  이게 다 남편 때문이다. ‘탄수화물이 뱃살의 주범’, ‘흰밥은 독’이라는 둥의 보도 자료와 유튜브만 줄창 보더니 끼니때만 되면 이렇게 말했다.     


  “밥, 조금만 줘.”

  “밥, 안 줘도 돼.”

  “밥은 됐고.”     


  어이가 없는 건 남편은 정말 ‘밥’만 안 먹는다는 거다. 밥을 제외한 다른 탄수화물은 잘도 섭취한다. 며칠 전만 해도 명절 앞이라고 동태전을 부쳤더니 앉은 자리에서 절반이나 먹어 치웠다. 얼추 동태 반 마리였다. 양을 아는 이유는 경동시장의 손으로 동태포를 뜨는 가게에 가서 손수 동태 한 마리를 골라 포로 떠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동태전이니까 동태, 동태니까 생선, 생선이니까 아마 단백질을 먹는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동태전에 동태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전을 부치려면 계란에 부침가루, 기름까지 들어간다. 그야말로 칼로리 폭탄이다. 괜히 명절에 전을 많이 먹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남편은 전을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건 동태전이지만 고추전, 파전, 사실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동그랑땡을 하고 맛 좀 보라 했더니 “맛있다, 잘 부쳤네” 하며 순식간에 다섯 개를 먹어 버렸다. 동그랑땡을 크게 빚었기 때문에 다섯 개면 배가 꽤 불렀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동그랑땡으로 식사를 대신하겠다며 기름지니까 개운하게 국 있으면 좀 달라고 했다. 토란국을 한 그릇 뜨면서 혹시 밥도 줄까 물으니 또 정색을 하며 “밥은 됐어” 했다. 전뿐만이 아니다. 빵이랑 떡은 ‘혈당 스파이크’를 피해야 한다고 난리다. 그렇지만 떡집 앞을 지나칠 테면 눈에 꿀이 떨어진다. 지난 주말 함께 시장에 갔다가 추석 기분을 낸다고 송편을 좀 샀다.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봉지를 열더니 떡을 꺼내 먹었다. 절반 정도 먹고서는 양심에 찔리는지 또 저녁은 떡으로 때우겠다고 했다. 역시 밥은 안 먹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차라리 밥을 제대로 먹고 떡을 먹지 않는 편이 뱃살엔 더 나았을 텐데. 남편 머릿속엔 다른 탄수화물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밥 탄수화물만 피하면 되나 보다. 아니, 쌀 탄수화물만 나쁜 탄수화물인 모양이다. 



 


 쌀 소비량이 매년 줄고 있다고 한다. 통계에 따르면 작년 1인당 쌀 소비량은 56.4kg으로 70년대에 130kg에 달했던 거에 비하면 절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앞으로도 쌀 소비량이 다시 늘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건강에 관심이 커지면서 흰 쌀밥은 뱃살과 혈당 상승의 범인으로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너무 커졌는지 요즘은 쌀이라고 다 안 좋은 건 아니라는 주장도 부쩍 늘었다. 백미가 아닌 현미는 오히려 건강에 좋다는 거다. 하지만 이미 식어버린 쌀의 인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정부도 쌀 소비량을 늘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고심하는 건 좋은데 아예 쌀 생산량을 줄인다며 수확량이 높은 품종의 벼는 재배하지 말라는 어이없는 정책까지 나왔다. 이런 전형적인 탁상행정이 쌀 소비 증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당연지사다. 단지 그 정도로 쌀을 잘 먹지 않는 요즘 분위기를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한국인은 밥심’은 정말 옛말이 되어 버렸다. 쌀의 식어버린 인기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우리집에서 쌀의 위치만 봐도 그렇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추이




 


그래서 냉장고에 쌀이 떨어졌지만 당장 쌀을 사러 가는 대신 나는 고민에 빠졌던 거다.


  ‘이참에 아예 쌀을 영영 사지 말고 대신 햇반이나 한 상자 사 버릴까?’

  ‘그래도 가을이고 곧 추석인데 햅쌀 맛은 한 번 봐야지 않을까?’


  진지한 얼굴로 남편한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식사 때마다 밥을 먹겠느냐 마느냐 묻는 것도 지겹다고 했다. 이제 쌀을 사지 않으면 앞으로는 영영 사지 않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나 쌀을 푸대접하던 남편은 내 말에 대답을 우물우물 미루었다. 아무리 그래도 쌀과 작별하려니 아쉬운 모양이었다. 게다가 햅쌀밥이라고 하니 입맛도 도는 눈치였다. 남편이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쌀을 아예 안 사는 건 좀...”

  “...그럼 햅쌀 조금만 살까?”

  “그래, 그게 좋겠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 냉장고에서 쌀은 당분간 좀 더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언제까지 그럴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언젠가는 냉장고에서 쌀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햅쌀이나 사러 가야겠다. 많이는 말고 조금만, 그래서 경동시장으로 나섰다. 쌀을 조금만 사려면 마트보다는 시장이 낫다. 여러모로 남편의 뱃살과 건강을 지키는 일은 번거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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