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과 싱가포르에서의 추석의 추억
내일이 추석이다. 여름이 정말 길고도 길어 추석이 코앞인데도 기온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대로 역대급 더운 추석을 보내겠구나 하고 있었는데 신기하게 어제 오후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면서 하늘이 높아졌다. 추석의 매직인가 보다. 날씨가 좀 추석 같아진 건 좋았지만, 냉장고가 벌써 비었다. 연휴가 길어 준비한 음식을 벌써 다 먹어버린 것이다. 남편이 시장에 가서 송편이나 사 와서 먹을까 했다. 송편이라…. ‘추석’하면 송편이다. 하지만 나는 추석이 다가오면 어쩐지 송편보다 월병 생각이 난다.
월병은 중국에서 중추절이라고 우리나라로 치면 추석과 같은 명절에 만들어 먹는 떡이다. 달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점에서 송편과 같지만, 송편이 반달 모양인데 비해 월병은 보름달처럼 둥글다. 둥근 모양은 화합을 상징한다고 한다. 펄벅의 책, <대지>에서 여주인공 오란이 “하얀 쌀가루와 돼지기름을 반죽해” 만들던 떡이 바로 월병이다. 대지를 읽고 인상 깊었던 장면은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나는 이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러던 차에 남편의 해외 발령으로 2011년부터 2016년까지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월병을 홍콩에서 처음 봤다. 홍콩에서의 첫 해, 중추절이 다가오기 한 달도 전부터 온 거리에는 월병 광고가 넘쳐났다. 유명 베이커리와 식당들은 모두 자기만의 월병을 자랑하며 선물 세트를 판매했다. 내가 홍콩에 있을 때 유행은 아이스 월병과 스타벅스 월병이었다. 전통 월병이 지나치게 칼로리가 높아 상대적으로 칼로리 부담이 적은 아이스 월병, 그리고 속에 전통적인 내용물 대신 커피와 초콜릿을 채운 스타벅스 월병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스타벅스 월병은 먹어 본 적이 없지만 아이스 월병은 홍콩의 파리 바게뜨 같은 동네 제과점, 맥심에서 당시 유행하던 ‘앵그리 버드’ 캐릭터를 찍은 걸로 우리 식구 수만큼 3개 사서 먹어 본 기억이 있다. 맛은 솔직히 ‘찰떡 아이스’ 같았다. 그랬거나 말거나 드디어 유행하던 아이스 월병을 먹어봤다는 사실이 기뻐 환하게 웃으며 월병을 손에 들고 사진까지 찍었었다.
홍콩에서 월병을 만났다면, 나한테 월병의 진짜 천국은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에서는 중추절 한 달 전부터 오차드 거리에 있는 큰 일본계 백화점, 다카시마야 백화점 지하 2층 홀에서 월병 마켓이 열린다. 이 기간 동안 싱가포르 어디서나 월병 마켓이 열리지만 다카시마야에서 열리는 마켓이 가장 규모가 크다. 여기서는 팥 이외에 견과류, 타로(연꽃씨) 등 다양한 소를 넣은 월병을 한 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심지어 홍콩의 맥심 베이커리도 이 마켓에 참가하기 때문에 계란 노른자가 들어간 난황 월병도 볼 수 있었다. 다카시마야 월병 마켓의 장점은 규모가 크고 종류가 많다는 것 이외에도 시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게마다 시식 코너를 마련해 손님들에게 권했다. 그래서 직접 맛을 보고 고를 수 있다. 물론 한 가게만 해도 몇 가지 종류의 시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일일이 전부 시식하고 다니다가는 순식간에 체중이 불어날 수도 있다. 나는 속에 견과류가 든 것과 타로 앙금이 가장 좋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추석 전에 선물 세트를 주고받듯, 중국 사람들도 월병 세트를 주고받는다. 남편이 회사에서 유명 월병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우리 남편은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에 나는 무척이나 부러웠다. 월병이 먹고 싶으면 내 손으로 사는 수밖에 없었는데, 월병은 사실 비쌌다. 내가 있을 때 보통 하나에 싱가포르 달러로 30달러 정도 했다. 4개가 한 세트였으니 한 세트를 사려면 120달러를 써야 했다.
가볍게 쓸 돈은 아니었다. 꼭 비싸서라기보다는 우리 식구 중에서 월병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월병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월병은 ‘떡 병(餠)’자를 쓰긴 해도 겉모습이나 맛이 꼭 커다란 만주 같았다. 원래 만주를 좋아하는데 특대 사이즈에다가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특이한 맛까지 맛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쉽게 상하는 음식도 아니니 맘 같아서는 몇 세트쯤 사서 쟁여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가격 부담이 너무 커서 나는 낱개로 구입하곤 했다. 대신 한 세트 사서 한국의 부산 친정으로 매년 보내곤 했다. 나한테 만주를 좋아하는 입맛을 물려준 친정아버지라면 월병을 좋아하실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내 예상대로 아버지는 월병을 맘에 쏙 들어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 매년 중추절 무렵이 되면 월병 좀 보내라고 먼저 이야기하시기까지 했다.
가격 이외에 월병이 부담이 되었던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칼로리 때문이었다. 처음에 어디선가 ‘월병이 칼로리가 너무 높아 젊은 사람들이 기피한다’는 기사를 봤을 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명절 음식이 칼로리 높은 건 당연하지’라며 가볍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월병을 덥석덥석 베어 먹었다. 다행인 건 한 번에 다 먹지는 않았다는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월병 하나의 열량이 800칼로리나 되었다! 햄버거 하나만큼의 열량이었다. 월병이 칼로리가 높은 이유는 내용물을 싸고 있는 겉의 피 때문이었다. 월병의 피는 “대지”의 오란이 했던 것처럼 정말 쌀가루, 혹은 밀가루와 돼지기름을 다져 만들었다. 칼로리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월병을 사면 조그만 플라스틱 칼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칼을 버리곤 했다. 나중에 남편이 회사에서 듣고 와서 월병을 제대로 먹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월병은 보통 명절 모임 때 나와 여러 명이 함께 즐기는 디저트 같은 음식이다. 동봉된 칼로 월병을 잘게 조각내서 이쑤시개로 한 조각씩 찍어 먹는다는 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한 번에 1/4, 어떨 때는 절반 가까이 먹기도 했으니 내가 섭취한 칼로리는 도대체 얼마였을까? 어쩐지 월병을 먹고 나면 속이 아주 든든하긴 했었다. 나는 당장 한국 친정으로 전화를 걸어 친정아버지께 절대 월병을 한 번에 드시지 말라고 단단히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알겠다고 하셨지만 제대로 지키셨는지는 모르겠다.
해외 생활을 마무리 짓고 한국으로 들어오고 나니 월병은 추억으로 남았다. 싱가포르에서 먹던 맛을 잊지 못해 인천 차이나타운에도 가 봤지만 싱가포르에서 보던 월병이 아니었다. 차이나 타운의 월병은 한국 사람 입맛에 맞게 변해서 그야말로 큰 만주 같았다. 올해는 아들이 싱가포르에 있으니 혹시 먹어볼 수 있을까 싶어, 지난달에 아들한테 부탁했다. 시간 있으면 다카시마야 백화점에 가서 월병 하나만 사 달라고. “문제없어요.” 아들은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그 이후로 월병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다. 잊어버린 게 분명하다. 올해도 월병을 먹지 못하고 추석을 맞이하게 되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
송편을 보면 월병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