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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뷔 Sep 30. 2024

아빠존의 눈물

10. 애 보느니 밭 맨다(feat. 허리 지옥 브루마블)

옛말에 애 보느니 밭 맨다는 아름다운 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아이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난 주말, 둘째의 플레이데이트(Playdate)가 친구의 사정으로 취소되었습니다. 

아내님은 해외로 출장 가신 상황.

이제 저는 큰일 났습니다.

둘째 딸이 만족할 때까지 놀아드려야 합니다.


우선 동서남북입니다. 

제가 어릴 적 했던 불법 로또 같은 게임인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성행하고 있습니다.

 

행운의 동서남북.


‘메롱’에 걸렸습니다.

'너 바보'에 걸리지 않아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착각. 

모든 것이 다 걸려야만 비로소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귀찮다는 듯 대충 선택하면 안 됩니다. 

신중하게 하나씩 골라드려야 고객님께서 만족하십니다.


이번에는 스머프 게임입니다.


스머프 게임.


주사위를 던져 먼저 끝까지 도달하면 이기는 게임입니다.

중간중간 지름길 같은 사다리도, 아래로 떨어지는 미끄럼틀도 있습니다.

사다리에 걸려 올라갈 때면 조금 약 올려줘야 합니다. 

적당한 경쟁심을 불러일으킬 정도까지만 해야지 너무 약 올렸다간 삐져서 다 때려 부술지 모릅니다.

미끄럼틀에 걸릴 때는 비명을 질러줘야 합니다. 분하다는 얼굴도 해야 합니다. 

래야 고객님께서 고소해하며 좋아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아슬아슬하게 쫄깃하게 가다가 결국에는 져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몰래 말을 옮겨 스스로 미끄럼틀에 걸리는 등 승부조작은 필수입니다.

안 그러면 10번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승리한 둘째 딸은 '그럼 그렇지.' 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음 게임을 꺼냅니다.


브루마블입니다.

(커서 보니 초록별 지구를 뜻하는 Blue Marble 이었습니다.)

1:1 끝장승부. 너 죽고 나 살자입니다.


둘째는 시작하기 전에 서울을 사게 해 달라며 두 손 모아 기도를 합니다.

저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세팅을 합니다. 


추억의 브루마블. 내용은 업데이트 됐지만, 물가는 그대로다.(서울 100만원=거짓말)


주사위만 던지시는 둘째 따님과 달리 저는 플레이어이자 부동산 중개인이며, 은행일도 해야 합니다. 

쓰리잡(Three Job)입니다.

고단하지만 아빠니까 3잡도 해내야 합니다.


이번에도 적당히 봐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하지만 웬걸. 딸이 우대권(어디에 걸려도 모면할 수 있는 황금열쇠)을 한 장 확보합니다. 

'기도빨인가?'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노련하게 우주왕복선에 걸렸습니다.

이제 서울은 제껍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브루마블에서는 서울이 최곱니다)

돈도 있겠다. 다음 턴에 가서 구입만 하면 됩니다.

저는 군침을 삼켰습니다.


둘째가 다시 기도를 하며 주사위를 던집니다. 

기도해봤자입니다. 둘째가 서울에 도착하려면 아직 20칸도 넘게 남았기 때문입니다.

황금열쇠에 걸렸습니다. 

‘서울로 가시오.’


'!!!??'


맹세코 이 거짓말 같은 일이 제 눈앞에서 일어났습니다.

둘째는 환호합니다. 

서울 가면 눈뜨고 코 베인다더니, 저는 서울 가기도 전에 눈 뜨고 서울을 뺏겼습니다.

역시, 인서울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꿩대신 닭, 뉴욕을 살까 런던을 살까 고민하다 런던을 삽니다. 

런던이 왠지 더 있어 보입니다.

주사위를 던지신 딸. 또 황금열쇠입니다. 

거짓말처럼 한 장 남은 우대권을 또 확보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3이 나와 바로 서울이 걸립니다. 

둘째 따님의 땅입니다. 통행료 200만원을 내야 합니다. 

집 팔고 땅 팔아 돈을 갚습니다. 

서울살이...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만만치 않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드리지만 이 기적 같은 일은 맹세코 실화입니다.(제 첫째 딸이 다 봤습니다.)


기도의 힘으로 한 바퀴만에 이 모든 것을 모으신 둘째 따님.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던 둘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갑니다.

저도 뒤늦게 두 손을 모아 기도해 보지만, 이미 신용불량자 신세입니다.

힘을 내 봅니다. 가장으로서 이렇게 무너질 수 없는 노릇입니다.

열심히 주사위를 굴려 한 바퀴 돌 때마다 20만원을 차곡차곡 모읍니다.

그리고 둘째 땅에 걸려 또 상납합니다.

왠지 이거 현실 같기도 합니다. 피땀 흘려 돈 모아 아이들에게 쓰는 현실.


“이게 실제면 내가 아빠 돈 좀 주면 되는데”


둘째가 옆으로 팔을 괴고 누운 채 얘기합니다. 

둘째 앞에는 50만원권과 10만원 권이 수북이 쌓여있습니다.

저한테 뺏은 돈입니다. 

그래도 기특합니다. 세상물정 몰라서 그런지 효심이 있습니다. 


2시간을 하니 허리가 아파옵니다. 

전 세계에 부동산을 소유하신 둘째는 이제 부자로 사는 게 지루하고 시시합니다.

2시간을 하면서도 저는 기적적으로 파산하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제 두 손 모은 기도를 들어주시긴 하셨나 봅니다.(살려는 드릴게)


"아빠 허리 아프다. 이제 그만할까?"


고객님은 다행히 제 제안을 받아들여주십니다. 

저를 충분히 데리고 놀았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 사이 밥때가 됐습니다. 아이들 밥을 차려야 합니다.

그때 첫째가 외칩니다.


“밥 먹고 이번에는 나랑 체스해야 돼!”

"(잠시 침묵)... 그, 그래."


아이들과 행복하게 놀 수 있기에 아빠 존은 오늘도 눈물을 흘립니다.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애 보느니 밭 맨다는 말을 곱씹어 봅니다.

아이를 보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끝난 뒤에 남는 게 없는 것 같아 때때로 아쉽습니다.

즉각적인 결과물이나 보상이 없습니다.

밭을 매면 내가 맨 밭고랑이든 심은 채소든 뭐라도 눈앞에 보이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는 채소처럼 쑥쑥 자라지도 않고,  

과실(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맺을라 쳐도 수십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간 손해 보는 시간투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투자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노력의 결과물처럼 자랑할 대상도 아닙니다.

(이 사실을 종종 잊곤 합니다.)

비록 아직은 작고 어리지만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이자 독립된 존재입니다. 

다만 항상 제 곁에 있어줘서 고맙고,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사랑스러운 대상입니다. 

(물론 말대꾸할 때면 요걸 콱! 하기도 합니다)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 효도로 돌아오기보다는 

그 시간을 통해 제가 살며 얻은 교훈과 생각들이 아이들 인격 한 구석에 남겨져 

독립된 인격체로서 세상을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더 큰 기쁨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아빠보다는 제가 함께한 시간들이 아이들에게 가끔 떠오를 추억이 되고, 

'아빠'라는 말이 아이들에게 그저 따뜻한 감정으로 남아주길 바라봅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곁에서 '아빠 고마웠어.' 한마디 해준다면 잘 산 인생이 아닐 리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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