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면허 취득 체험기
아아, 저에게 필리핀에 와서 가장 충격받은 것들을 꼽으라시면
그중 하나는 단연 교통일 것입니다.
동남아가 대체로 비슷한 것 같습니다만, 실제로 체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여행으로 방문한 동남아에서 직접 운전할 일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택시나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종종 아찔한 순간이 있지만,
현지인 운전사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 지렸네.'하고 넘어가곤 합니다.
막상 직접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정말 막막해집니다.
회사 가기보다 운전하기가 더 싫습니다.
오토바이, 자전거, 리어카, 무단횡단, 지프니... 카오스(Hondon)가 따로 없습니다.
아마 교통사고 전문 한문철 변호사님이 여기 오시면 콘텐츠 걱정은 없으실 겁니다.
24시간 라이브 방송 때리셔도 죽을 때까지 방송 가능한 상황들이 매분 매초 발생합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자세히...)
(필리핀 면허 취득)
하지만 저는 아이들을 위해 교통 카오스에서 운전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대비해 한국에서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았습니다.
이걸로 1년 운전하고, 나중에 필요하면 갱신해야겠다 싶었습니다.
한국도로교통공단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제네바협약이 '그렇게 하렴' 하고 동의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네바 협약에 의해 국제면허증으로 운전할 수 있는 국가들이 나와 있습니다.)
제네바 협약 = 스위스 = 요들송 = 몽블랑. 뭔가 모르게 강력한 느낌이 듭니다. 끗발 좀 날릴 것 같습니다.
협약 국가에 필리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국제면허증. 유효기간 1년. 그걸 믿었습니다. 제네바 협약이니까요.
하지만 필리핀에 와보니 누군가 그랬습니다. '그거 아마 3개월 밖에 못쓸걸.'
저는 속으로 '흥, 뻥치시네.' 했습니다.
버젓이 '발급일'과 '유효기간 1년'이 면허증에 적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예 못쓰면 못 쓰는 거지, 1년이라고 적힌 것을 3개월만 사용가능하다는 것은
제 공돌이 논리회로로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 말씀이 맞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대사관 홈페이지에 가보니 필리핀에서 국제 면허증의 유효기간은 입국 후 90일까지였습니다.
따지고 싶었습니다.
"아, 왜요! 이렇게 어정쩡하게 해 줄 거면 애초에 왜 국제면허증 사용하게 해 준 건데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공권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았습니다. 도로교통공단 국가별 안전운전 유의사항에 1줄만 써주면 좋았을 것을.
(깨달음) 한국에서 된다고, 외국에서 될 거라 생각하지 마라.
국제면허증 유효기간이 1년이라 하더라도 실제 사용가능 기간은 국가별로 제각각이며,
여권과 면허증을 같이 지참해야 한단다.(귀찮)
저는 멘붕에 빠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것은 이미 입국하고 갓 90일이 넘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행여나 경찰한테 걸리면 어쩌나...
저는 두려웠습니다.
500페소(약 12,500원)를 항상 준비했습니다. 경찰들이 인간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차하면 면허증 밑에 싹 숨겨서...(읍읍)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국제 면허증을 제시해 봤자 현지 경찰들은 그게 뭔지 모르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합니다.)
필리핀 운전면허를 발급받아야 했습니다.
한국 면허(1종. 보통)를 갖고 있던 저는 훌륭한 제네바 협약 덕분에 별도의 면허시험 없이
LTO(Land Transportation Office, 한국으로 치면 도로교통공단)에 가서 신검서류 등을 제출하면 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누군가가 면허증용 플라스틱카드가 동이 나 면허증 발급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플라스틱카드가 없어서 면허증 발급이 안된다?
'거짓말하시네.' 했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첫 번째. 아아, 이 상황이 될 때까지 아무도 몰랐나 봅니다.
두 번째. 아아, 이 카드 대란이 언제 해결될지 아무도 모른다 합니다.
세 번째. 아아, 심지어 면허증 용 플라스틱 카드는 그냥 플라스틱 카드였습니다. 그게 없어서...
(RFID 기능 따위 없습니다. 지금 보니 홀로그램은 하나 있습니다.)
그래도 정 급한 사람은 종이로 면허증을 만들어 줬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플라스틱 카드로 변경해야 했습니다.(귀찮)
인내와 조마조마와 뽀찌 500페소를 가지고 3개월을 버텼습니다.
다행히 그 기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운전을 안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가을날...
까치처럼 희소식이 날아왔습니다.
플라스틱이 준비됐으니, 면허 발급이 가능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먼저 신체검사(Medical Check)를 받으러 갔습니다.
LTO주변에 허름한 신체검사 사무실들이 와글와글합니다.
한 허름한 사무실에 현지인들과 쪼롬히 앉았습니다.
의사 쌤이 부릅니다.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아저씨입니다.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체중을 잽니다.
아아, UFC 계체 할 때 봤던 그 초정밀 체중계입니다.
디지털 나부랭이 따위 믿을 수 없다는 듯 단호한 체중계였습니다.
시력검사를 합니다.
다행히 크고 작은 알파벳들입니다. 아는 알파벳을 말했더니 뿌듯합니다.
영어공부 하길 잘했습니다.
의사 쌤이 묻습니다. 영어입니다.
그래도 몇 개월 살았다고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자신감으로 "아임 쏘리?(뭐라고요?)"를 5회 발사해 줍니다.
의사 쌤이 고개를 저으며 검사지를 가리킵니다.
대충 "어디 안 좋은데 있냐?" 고 묻는 것 같습니다.
저는 씨익 웃으며 "아임 오케이, 헬씨, 헬씨!"라고 외칩니다.
역류성 식도염이 있지만 비밀로 했습니다.
의사 쌤이 멋있게 서명을 합니다.
신검서류가 나와서 확인합니다.
헬씨라고 말했을 뿐인데 혈압이 120/80. 정상입니다. (혈압은 재지 않았습니다.)
새삼 말의 힘을 느낍니다. 신검 비용을 내고 나옵니다.
돈으로 건강을 산 느낌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서류를 들고 LTO를 방문합니다. 무더위에 한참을 기다립니다.
제 차례가 오니 웹캠 앞에 서라고 합니다.
영문을 모른 채 섰습니다.
찰칵
그것이 제 면허증 사진이었습니다.
뽀샵 따위 없습니다.
흑백사진인데 거의 흉악범 몽타주입니다.
기다리면 면허를 발급해 준다고 하길래 기다립니다.
잠시 기다리며 주위를 살펴봅니다.
어느 여자 경찰이 커다란 금고에서 나옵니다.
그분 손에 플라스틱 카드가 현금다발처럼 가득 들려 있습니다.
금고에 넣을 만큼 소중한 것인데 왜 관리를 안 했나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저뿐 아니라 현지인들 모두 수개월을 기다린 터라 무더위에도 찍소리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트집 잡혀 집에 가라고 하기라도 하면 낭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나마 브로커가 있어서 조금 빨리 했지만,
그냥 맨땅에 헤딩이었더라면... 아찔합니다.
면허발급비용을 내니 면허증을 줍니다.
땡큐를 연발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루가 걸렸습니다.
집에 와서 면허증을 꺼내보니 별것 아닙니다.
다시 봐도 영락없는 흉악범입니다.
그래도 '마이 프레셔스'를 외쳐줍니다.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면허 발급은 험난했지만 즐거운 모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문화는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또 그 안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곱씹을수록 교훈 맛이 납니다.
그렇게 해피엔딩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면허발급은 시작일 뿐, 부산보다 3.7배 어려운 본격적인 필리핀 운전월드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