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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뷔 Sep 06. 2024

아빠존의 눈물

2. 육아휴직을 당했습니다.

2022년 가을.

아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 해외 파견근무 지원해도 돼요?"


그것은 질문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냥 하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연히 막는다고 될 리 없었습니다.

‘또?’ 라든가 ‘애들 학교는?’이라고 물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안될 걸 알고

한참 고민하는 듯하다(남자들은 이 부분을 간과하다 화를 당하곤 하는데,

꼭 깊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결론은 찬성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평화가 옵니다.) 찬성했습니다.


사실 엔지니어인 제가 믿었던 것은 가능성이라는 것인데,

그것이 0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내의 회사에서 해외 파견근무는 일종의 사내 혜택이라

경력직에게 그 혜택이 돌아갔던 전례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미 강력한 후보자가 있었던 상황.


하지만 그 무엇도 제 아내님의 해외 진출 야욕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시골 구멍가게 할머니 같이 국내에서 지지고 볶고 살고픈 제 그릇과 달리

아내님은 생각과 그릇이 월드와이드하셨기 때문에

그 모든 상황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준비를 해나가셨습니다.

팬데믹의 여운이 남았던 상황이라 경쟁률이 사상최저인 데다

영어권인 필리핀이라는 점이 아내님의 구미를 당겼던 모양입니다.

아내께서는 특히 영어 인터뷰 등이 중요하다며

셀프 특별 사교육비까지 지출하셨습니다.     


사실 아내의 시도는 이번이 첫 번째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세 번째.


저는 가능성 없는 시도를 하는 아내를 겉으로는 응원했지만

내심 이번에 떨어지면 ‘이제 그만하세요!’ 라든가

‘스스로한테 특별 사교육비 쓰지 마세요!’라고 한마디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내의 비대면 최종 인터뷰가 있던 날,

아내는 네트워크 오류로 가장 중요한 해외 파견지의 팀장님(외국인)을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것도 모자라 결국 실패,

며칠 뒤에 별도의 인터뷰 다시 잡는 등

(의도치는 않았지만) 그분께 아주 큰 불편을 드렸던 것입니다.

미운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혔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아내의 파견근무 가능성은 0%에서 0.00%로 떨어졌습니다.

저는 함께 울먹이며 위로했지만,

속으로는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따끔한 일침을

어떻게 날려야 하나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잡힌 인터뷰에서 파견지 팀장님이 아내에게

필리핀의 기후에 관해 설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굳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선례’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만큼 ‘선례’를 중요시 여기는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조선왕조 오백 년에 빛나는 종묘사직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 나라에서

누가 감히 선례 없는 일을 저지르려 하는가. 어림없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최종결정권자는 파견지의 팀장이었습니다.

종묘사직의 위대함을 모르는 오랑캐였던 것입니다.

그분에 의해 제 달콤한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내님은 전례 없던 ‘경력직 출신 첫 해외파견자’가 되셨고,

제 눈동자는 갈 곳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보통 해외파견자의 준비 기간이 3~4개월인 반면,

아내님의 준비 기간은 1달 남짓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내는 저희 두 딸을 필리핀에 데려가고 싶어 했습니다.

영어도 영어지만, 다른 문화를 경험케 해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 생각에는 공감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업무는 파견지에서도 일 년 중 절반을 해외 출장지에서 보내야 하는 업무였습니다.


아이들을 데려간다 해도 8살, 4살의 딸들이 일 년의 절반을 홀로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서둘러 변수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습니다.

필리핀이라는 지역, 영어, 아내의 업무특성, 어린 두 딸, 아이들 학교,

14년간의 제 경력과 승진, 긴박한 일정 등.

모든 변수를 노트에 썼습니다.

그리고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오직 콤퓨타처럼 논리에 입각한 결정을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쉽게 결론 낼 수 없었습니다.


한편, 그즈음 세간을 뒤흔드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드라마 ‘카지노’였습니다.

제가 주변 분들께 고민 상담을 하면 우선 나오는 얘기가 카지노였습니다.

하지만 아내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아내님은 유행에 둔감하신 분이셨습니다.

(필리핀에 가신 후에 두 달 뒤에 그 드라마를 접하셨고 그제야 필리핀이 무섭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은 나지 않았고,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정답은 없었습니다.

결국 의사결정의 문제였습니다.


운 좋게도 제 주변에는 제 팀장님을 비롯해 정말 지혜롭고 훌륭한 조언자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아낌없는 조언을 해 주셨고, 지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저는 결정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필리핀을 가기로.


회사에 조심히 이슈를 던졌습니다.

회사의 첫 번째 반응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육아휴직을?"이었습니다.

저는 그 반응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회사의 충견인 네가? 였는지, 아니면 가정이라곤 생전 돌보지 않을 것 같은 네가? 라는 뜻인지

아직도 아리송합니다.

어쨌든 제 사정을 들은 회사는 감사하게도 흔쾌히 육아휴직을 응원해 줬습니다.

이 모든 결정이 2주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글로벌한 아내님과 오랑캐의 농간으로 육아휴직을 ‘당했습니다’.



[갑자기 떠나게 된 직장]



저는 이제 승진 경쟁에서 밀릴 것은 물론,

여름밖에 없는 나라에서 땀에 절어 2년간 아이들의 책가방모찌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영어도, 따갈로그어도 못하는 쭈그리로서 말입니다.


하지만 제 속도 모르는 주변인들은 '용기 있다', '멋지다', '좋겠다'라고 했고,

저는 애써 억지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가 잘 해낼 줄 알았습니다.

여태껏 무난히 잘 해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습니다.

준비된 육아휴직과, 당하는 육아휴직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맞은 매와 얼떨결에 맞은 매의 고통이 차원이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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