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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뷔 Oct 29. 2024

아빠존의 눈물

발리 여행. 현지인에게 꼬치꼬치 캐물어 얻은 지식 대방출(틀림 주의)

아빠존의 육아는 오늘도 힘겹습니다.

10월 21일 - 10월 25일. 

학기 중간의 느닷없는 방학 때문입니다.

학비도 더럽게 비싼데 쉬는 날이 많습니다. 

제 돈을 꽁으로 먹으려고 합니다. 

성질 같으면 교장실로 당장 쫓아가 다 때라 뿌수고 싶지만, 

장 이름이 애덤(Adam)이라 봐줘야 합니다.

눈이 파란색이기 때문입니다.(무섭)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아내님이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를 후보로 올리셨습니다.

더위에 연약한 제게는 여기(필리핀)나 거기나입니다.

멀리는 못 갑니다.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는 것만으로도 빵끗 웃으며 감사해야 합니다.


구글 지도를 켰습니다.

맙소사. 놀랍게도 인도네시아는 남반구에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발리로 가기로 했습니다.

남반구이기 때문입니다. 

북반구에 사는 제가 거길 다녀오면 왠지 세계를 정복한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북반구 + 남반구 = 지구 = 세계정복)

집돌이인 제게 아문센의 남극점 여정에 버금가는 여정이긴 합니다만 가고 싶었습니다. 

코리올리 효과(소용돌이가 북반구의 반대로 도는 현상)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호입니다. (피곤해서 결국 까먹고 못 보고 옴)


발리공항. 깨끗.
최첨단 발리공항. 내 얼굴이 오류인지 컴퓨터가 거부해서 직원이 달려와야 했다.(실화)


발리 도착.

날씨가 좋습니다. 왠지 남반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꽃나무들이 참 많고 수려합니다. 남반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버거킹이 꿀맛입니다. 남반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이스커피가 차갑습니다. 남반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아, 남반구시어.


감탄을 연발하며 예약한 차에 오릅니다. 

조수석 문을 열었는데 운전대가 있습니다. 

짐을 싣던 운전사가 저를 보며 어리둥절해합니다. 

니가 운전하게? 하는 표정입니다. 아니야, 짜샤 라는 표정을 지어줍니다.

이제 보니 인도네시아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습니다. 

차가 왼쪽으로 통행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멋져 보입니다. 남반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차가 반대로 다닌다. 역주행하는 오토바이 때문에 조금 헷갈리곤 한다. 


발리는 꽤 큰 섬입니다. 

섬 주제에 커봤자지 했는데 경기도 면적의 절반 크기입니다.

새삼 작은 고추 대한민국이 놀랍습니다.


첫 번째 여행지는 우붓(Ubud)입니다.

차로 1시간 30분이 넘는 여정이지만 볼거리는 많습니다.

신들의 섬이라는 발리. 

가는 길 좌우로 크고 작은 조각품 가게들이 많습니다.

정교하고 수려합니다. 수준급입니다.



우붓은 발리 내륙 해발 600~700미터에 있는 서늘한 곳입니다. 

예전에는 시골이었다는데 지금은 관광객(대부분 유럽, 호주인)들이 가득합니다.

계단식 논과, 신성한 원숭이 숲이 유명합니다.


계단식 논. 우리 눈엔 익숙하지만 땅 넓은 서양사람들에게는 이색적인가 보다
원숭이 숲 매표소. 굳이 왜 리얼 아저씨 몸매의 조각을? 주문한 놈도, 만든 놈도 수상하다.
원숭이 숲 매표소. 90%가 유럽/호주사람. 크고 무섭다.
원숭이. 내 새끼 좀 봐. 자식 자랑 중이시다.
원숭이. 복슬복슬 순한 듯 하지만 맘에 안 들면 사람도 때린다. 
자본주의 원숭이 놈들. 먹이 준다 해야 돌아봐 준다.


우붓 시내를 여행하는데 놀랍게도 예닐곱 집 건너 사원이 있습니다.

그냥 장식인가 싶어 다시 봐도 다 진짜 사원입니다.

왜 이리 사원이 많은가 싶습니다.

자동차 대시보드에는 작은 꽃장식이 있고, 사이드 미러에는 삼색실이 묶여 있습니다.

아아, 궁금합니다. 호기심 마렵습니다.

그래서 옆에 그랩(Grab = 동남아의 우버) 기사님을 힐끗 봅니다.

과묵한 현지인입니다. 조금 무섭습니다.

하지만 지금 안 물어보면 평생 기회는 없습니다.

입을 떼 일단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침이 마르도록 발리를 칭찬합니다. 영어로.

"디스 플레이스 이즈 베리베리베리 굳!" 극찬입니다.

기사님이 빵끗 웃으며 "웨라유 프롬?"합니다.

"사우스 코리아." 하자 기사님의 표정이 엔젤(Cheonsa)처럼 변합니다.

"신타이용! 신타이용!"을 외치십니다.

알고 보니 신태용 축구감독님 얘깁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함께 신태용을 외치며 기사를 방심시킨 후 발리의 비밀을 빼내기 시작합니다.

기사님은 신나서 비밀을 술술 불어줍니다.

(사실 비밀 아님. 게다가 틀릴 수도 있음.)

하지만 저는 브런치 작가+입 싼 놈이기 때문에 현지인에게 캐물은 지식을 대방출할 계획입니다.


[비밀1] 발리, 특히 우붓에 사원이 많은 이유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발리는 85%가 힌두교입니다.

인도의 힌두교와 발리의 힌두교는 다르다고 하는데

여하튼 이곳 사람들은 가족마다 사원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 4 가족이 모인 그룹사원이 있고, 또 마을 사원도 있습니다.

가족사원에 그룹사원 마을사원까지.

전통색이 짙은 우붓에 사원이 많은 이유입니다.


발리 우붓 사원. 하나같이 정교하고 공을 많이 들였다.
골목길 안 곳곳에도 사원이 있다.


발리의 가족 사원에는 조상들의 영혼을 모십니다.

발리인들은 가족이 죽으면 영혼이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믿는데, 

가족 사원이 있어야 돌아와 머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원과 제사는 장남이 물려받습니다. 집도, 가족 재산도 장남이 물려받습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어딘가 옛날 우리나라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발리 힌두교의 특징인 것인지, 여하튼 유교적 특성과 많이 맞닿아 있습니다. 


사원은 또 감사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발리인들은 물, 공기, 음식 등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것을 감사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어디에 어떻게 감사를 표할지 몰라 사원에 감사 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매일 작은 바나나잎 상자에 꽃과 잎과 작은 빵 혹은 쿠키를 담아 감사제사를 지내고, 

그것들을 다음날 길 한 곳에 모아 새들, 곤충들이 먹도록 합니다.

자연에서 받은 것, 자연에게 돌려줍니다. 

작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공물 먹는 새들

 

[비밀2] 자동차 대시보드의 꽃접시와 사이드 미러의 삼색실

발리인들의 자동차 대시보드에는 차낭(차낭 사리 Canang Sari)이 있습니다.

없으면 힌두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감사와 헌신 그리고 악운을 쫓는 의미의 공물입니다.

나쁜 신들에게 나 대신 이거 먹고 떨어져 이런 개념인 것 같습니다.

처음 차낭을 봤을 때 환영의 의미인가 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웬 쿠키야 하고 집어 먹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기사님의 아내분이 아침마다 만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차낭 사리(Canang Sari).


차의 사이드 미러에는 홍색, 백색, 흑색 실이 꼬여 묶여있습니다.

꼬치꼬치 캐물어 봅니다.

흑색 위시누(비슈누) 균형/질서, 적색 브라흐마 창조신, 백색 시바 파괴신을 뜻한다고 합니다. 

운전하면서 파괴, 창조도 필요할까 싶지만, 어쨌든 무사고 기원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비밀3] 발리가 다른 인도네시아(대부분 무슬림)와 달리 힌두교가 85%나 되는 이유

기사님 왈, 원래는 인도네시아가 모두 힌두교였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름에도 인도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악한(?) 무슬림 공주가 인도네시아 왕자와 결혼해 왕자를 무슬림으로 개종시켰다고 합니다.

개종한 왕자는 힌두교를 믿는 아버지인 왕을 쫓아냈는데, 

왕이 피신한 곳이 발리섬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다른 곳은 대부분 무슬림이 되었지만, 

발리만큼은 아직도 힌두교의 전통을 지켜내고 있다고 합니다.

단순한 이야기인지, 역사적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님의 말투에서 발리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

비밀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버렸습니다. 

기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비밀을 캐냈다고 좋아했는데, 지금 정리하고 보니 꼴랑 세 개뿐입니다.

이럴 리 없습니다. 제목에다가는 대방출이니 뭐니 호들갑 떨었는데, 정도면 사기 수준입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머리를 갸웃대며 기사님과 나눈 많은 이야기들을 복기해 봅니다.

아아, 지금 보니 기사님의 가정사와 K드라마 얘기를 그렇게 신나게 했던 거였습니다.


사실 별것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구글이나 Chat GPT가 훨씬 자세하고 정확히 알려줄지 모릅니다.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현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서로 웃고 떠드는 것. 그게 즐거웠습니다.

부족한 영어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금 용기를 냈더니 

완전히 새로운 문화와 이야기들이 펼쳐졌습니다. 

그들의 진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기사님 첫째 아들의 나이와 전공은 물론 시크릿 가정사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여행도 있구나 싶습니다. 

가이드 투어, 호캉스 등과 또 다른 느낌입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행사가 있는지 마을 사원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뭔가 달라 보입니다.

그네들의 삶을 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역시,

마흔이 넘어도 보고, 듣고, 배울 것들 투성입니다.


마을 행사 모습. 저들과 심적으로 1mm 가까워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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