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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뷔 Nov 01. 2024

아빠존의 눈물

발리의 장님 원숭이, 그리고 쓰레기차

역시 집돌이인 제게 여행기는 어렵습니다.

계속하다 보면 나아지겠지만, 

중간중간 사진도 찍어야 하고 이걸 써야지, 저걸 써야지 하다 보면

온전히 느끼고 즐거워할 순간들을 놓치곤 합니다.

혹 수요 없는 공급은 아닐까 걱정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빠존의 눈물)


발리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사원, 조각상은 아닙니다.

하나는 원숭이 숲에서 본 장님 원숭이. 

또 하나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 봤던 쓰레기차였습니다.



우붓(Ubud)의 원숭이 숲에는 천여마리가 넘는 원숭이가 있습니다.

원숭이들은 여기저기 널려있고, 자유롭게 돌아다닙니다.

관광객들은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고 좋아합니다.


원숭이. 포즈도 잘 취해준다.


저도 신나서 사진을 찍어댑니다. 

동물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신나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데 인적이 뜸한 곳에 거대한 케이지가 있습니다.

야생원숭이들 구역에 케이지라니. 

호기심에 다가갑니다. 

케이지 안에는 원숭이 몇이, 그리고 사연들이 적혀있습니다.

다들 야생에서 생존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케이지 속 늙은 원숭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윽한 눈빛. 눈앞이 아닌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

깊은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어딘가 득도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어쩐지 마음이 쓰입니다. 

고놈을 한참 보게 됩니다.


원숭이 바팡(Bapang)


궁금합니다. 그래서 케이지 사연을 읽어봅니다.

역시나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바팡(Bapang)은 한 때 한 원숭이 그룹의 리더였습니다.

가장 힘이 셌고, 그걸 보여주기 위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기 그룹이 독사의 위협을 받았을 때 그는 그룹을 보호하기 위해 웠고, 

결국 뱀독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아득한 눈빛의 이유였습니다.


야생에서 없게 바팡은 그래서 보호받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지고,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회사든 어디든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때,

바팡의 눈빛이 제 발목을 잡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것은 발리의 쓰레기차입니다.

조금 특이합니다. 발리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쓰레기차라니.


여행 마지막 날 새벽 6시. 

공항으로 가기 위해 분주히 떠납니다. 

도로는 한산합니다. 

저는 마지막 발리의 풍경을 눈에 담습니다.


비눗방울이 날아다닙니다.

이 새벽에 비눗방울이라니.

잘못 봤나 싶습니다.


계속 날아다닙니다. 

이 새벽 비눗방울은 어디서 왔을꼬. 


맙소사. 

저 앞에 쓰레기차가, 비눗방울을 내뿜고 있습니다.


비눗방울을 내뿜는 쓰레기차라니.

순간 기분이 몽글몽글해집니다.

어딘가 낭만적입니다.

기피, 거부, 혐오가 낭만이 되는 순간입니다.

어릴 적 소독차를 따라다니던 기억도 납니다.


거기 담겼을 사연도 궁금합니다.

새벽, 청소부 아빠를 따라나선 꼬마의 장난일까?

쓰레기 통에서 발견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청소부일까?

낭만쟁이 청소부 아저씨가 차에 설치한 비눗방울 장치려나?

즐거운 상상입니다.


제 기억 속 발리의 쓰레기차는 이제 낭만으로 저장됐습니다.


발리의 쓰레기차. 아쉽게도 비눗방울을 내뿜던 그 차는 찍지 못했다.


생각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저러면 저들도 웃을지 몰라.

진지함, 엄숙함이 기대치 못한, 어이없는 웃음에 무너지는 상상도 해봅니다. 


베트남전 반전 시위대가 총구에 꽃꽂이하던 순간도 아마 실소가 터졌을 겁니다.

덕분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살았더랬죠.

낭만의 꽃꽂이. 베트남 반전시위 중. 



생각을 깨우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여행을 할 때면 그 순간들이 더 자주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니 뇌가 긴장하고, 생각은 쉽게 깨어나는 것 같습니다. 

집돌이인 제게도 여행은 이렇게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아내와 딸들과 함께라서 가장 좋습니다. 


발리의 장님 원숭이, 발리의 쓰레기차. 

저희 딸들도 언젠가 따뜻한 눈으로 공감할 날이 올 것입니다.


발리 해변의 아내님 그리고 따님들. 오밤중에 품격 있는 그림자놀이 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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