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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뷔 Sep 28. 2024

아빠존의 눈물

9. 엄마들과 어울리기

아빠육아를 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어려움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어려운 것은 엄마들 무리에 끼는 것입니다.(설마 저만?)

일단 호칭에서부터 어울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00엄마, 00맘. 참 기품 넘치고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반면에 저는 00아버님이라고 불리는데 이미 '아버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틀린 겁니다. 

머릿속에서 '에헴', 또는 '어멈아~'같은 고리타분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이를 데리러 학교나 어린이집에 갈 때도 그렇습니다.

서로 00맘, 00엄마 하며 부르실 때는 다들 꺄르륵 하시지만 00아버님이라는 단어가 들리는 순간 

그곳은 그늘진 죽음의 땅처럼 분위기가 급격히 싸해지며 어두워집니다.


00아버님이라는 단어에 세상은 급격히 어두워진다.


게다가 리얼 울트라 사나이 코스(남중-남고-공대-군대-건설회사)를 수료한 저에게 

엄마들은 한없이 어려운 존재입니다.

다들 너무 우아하신 나머지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분들 앞에서 사소한 한 마디라도 하고 싶으면 속으로 10번은 연습해야 간신히 해낼 수 있습니다. 

그마저도 73%의 확률로 실패합니다.

행여나 기습질문이라도 받을 때면 뇌에 블루스크린이 뜹니다. 

모든 기능이 정지한 채 붕어처럼 입만 뻥긋 댑니다.

그냥 어머님들께서 하시는 말씀 은혜롭게 잘 듣고 끄덕이는 게 상책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곳은 해외. 

한국 엄마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적, 인종, 각양각색의 엄마들이 계십니다.


저보다 키와 덩치가 큰 엄마가 지나갑니다. 

살며시 눈을 깝니다. 쫄았기 때문입니다. 

노란 머리 엄마도 지나갑니다. 에그머니, 눈이 파랗습니다. 무섭습니다. 

행여나 말이라도 걸까 서둘러 구석으로 피해 개미에게 말을 겁니다. 

영어로 대화하는 것보다 개미가 낫습니다.(공포)

딸이 친구 엄마라며 소개합니다. 아뿔싸, 히잡을 쓰고 계십니다.

괜히 히잡 쓰신 여자와 말했다는 이유로 쿠란으로 맞을까 두렵습니다.


학부모 행사. '헬로' 다음에는 할 말이 없다. 살인미소로 시종일관 버텨야 한다.


남들 눈도 신경 쓰입니다. 

백수 같은 아저씨가 회사는 안 가고 맨날 엄마들이랑 어울린다고 

괜히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울릴 용기도 없는 주제에 겁부터 먹었습니다.)


이런 아마존 정글 같은 무시무시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는 오랫동안 엄마들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냥 제 소심한 성격 탓입니다.)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제 딸들이 친구가 별로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통상적인 외국 문화인지, 아니면 필리핀의 치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친구와 방과 후 혹은 주말에 함께 놀려면 플레이데이트(Playdate)를 잡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애들 노는 약속을 잡는 것입니다. 

아이들끼리 약속은 기본, 부모들이 서로 연락해서 약속을 정해야 합니다. 

“뭐 애들 노는 것까지 그렇게 하냐?” 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같은 아파트 단지, 심지어 같은 동, 같은 통로에 살아도 층이 다르면 접근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전에 약속을 잡고 방문을 해야 합니다.


제 수줍은 성격과, 수준미달의 영어, 다른 엄마들과 문자 주고받는 것에 대한 불편함 등 복합적 이유로 

교류를 피한 탓에 저희 아이들은 고립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아빠 존(John). 눈물을 머금고 이제부터 달라져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일단 한국 어머니들께 수줍게 인사를 드립니다.

역시 우아함 과다로 다가가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만날 때마다 계속 인사드립니다. 모임에도 참석합니다.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저를 끼워주신 엄마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끔 모닝커피 타임이나, 브런치 모임에도 용기모아 나갑니다. 

(아점이나 때리던 제가 브런치라니, 제 사나이 코스 동료들은 고추 떼라고 할지 모릅니다.)

물론 저는 거기서 흔들바위처럼 과묵하게 고개만 끄덕이다 옵니다.     


요리조리 피해 왔었던 모임에도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아내님이 가끔 물으십니다.

“엄마들 잘 만나고 왔어요?”

다분히 의도가 있는 물음이십니다. 

제 성격을 잘 아시는 아내님은 제가 엄마들 틈바구니에서 곤란해하며 진땀 빼고 있다는 것을 

훤히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 쩔쩔매는 모습을 고소해하십니다.

“조,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더라.”

제 대답에 아내님은 또 환하게 웃으며 기뻐해 주십니다.

제가 곤란해할수록 아내님은 행복하신가 봅니다.

 

한국 엄마들과의 몇 차례 모임에서 저는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아직 외국인 엄마들까지는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무섭기 때문입니다.)

MBTI 상 “E(외향형)”인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칭 “I(내향형)”라고 호소하시는 엄마들이 말씀도 잘하시고 왕성하게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저 정도가 I 라고? 혹시 저분들 인싸를 I 라고 말씀하시는 건가? 아니면 성격테스트도 겸손하게 하신 건가?’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저 성격 I 에요.” 는 제게 “저 공부 못해요. 평균 90점밖에 안 돼요.” 같이 다가왔습니다.

아아, 저 같은 리얼 순수 퓨어 제뉴인(정품) I 는 어쩌란 말입니까? 하늘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습니다. 

그분들은 후천적 ‘E’ 였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이면에는 숨겨진 엄마들의 피나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이들을 위해’ 적잖이 힘을 내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서로 주고받을 정보를 열심히 사전에 검색하고, 괜히 남편의 부족함을 흉보기도 하면서 함께 어울리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엄마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대단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대기업, 공무원, 공직자 출신 등뿐만 아니라 요리, 재봉술 등 능력들이 차고 넘치십니다.

그런 분들이 자식 남편 서포트 하신다고 새벽 5시 반부터 일어나서 끊임없이 일하시고 계십니다.

참 존경심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연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따끔하게 혼나야 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당연한 것도 없습니다. 

그저 숨은 희생과 사랑을 숨겨둔 채 두고 있을 뿐입니다. 


마흔이 넘었지만 이제야 진정으로 깨닫는 것들도 많습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제가 모르는 것들, 배울 것들 투성이입니다.

아빠 육아휴직을 통해 펼쳐진 완전히 새로운 세상. 

이미 존재해 왔지만, 좁은 소견으로 보지 못했던 세상을 알아갈 있음이 좋고 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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