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감응하는 삶(2)
안식월의 읽기에서 배운 의의
나의 안식월에 내가 경험한 읽기의 가장 큰 의의는 무엇일까? 세 가지 정도를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공부는 ‘감응’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라 감응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감응은 세계의 속살에 대한 공감이다. 글에 담긴 지식 너머 더 넓은 세계, 더 깊은 삶을 상상하며 감정을 읽어주는 것이다. 경계를 해체하여 그 대상에 전인적으로 가 닿는 적극적인 다가감이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있다. 이런 감응이 가능했던 것은 모든 글에 담긴 ‘모호함과 난해함’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은 나에게 글 읽기를 포기하게 하는 이유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모호함은 그것을 구축한 문학의 경계를 해체하기 위해 그 경계 너머를 더 깊이 이 탐구하게 했다. 난해함 역시 뒤엉킨 글의 질서를 관찰하며 본연의 글의 흐름을 되찾으려 애쓰게 했다. 따라서 이런 나의 노력은 글을 통해 세계와 감응하는 법을 더 깊이 탐색하도록 이끌었다.
이런 점에서 비어 있는 책이나, 집약된 논문, 심지어 산책에서도 단순하고 명쾌함은 오히려 감응이라는 태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볼수록 모호하고, 읽을수록 난해했던 느낌은 나를 창발 하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리하여 의미부여를 쉽게 단정하는 지적 성급함을 경계해 주었다. 확정편향에서도 벗어나게 해 주었다. 모든 것은 단정이 아니라 모호함으로 남겨두도록 했다. 나아가 내가 아는 영역에 대해 지식으로만 흡수하려는 습관을 멈추게 했다. 반면에 그 글이 내 가슴을 두드리고, 마음을 찌르는 느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둘째, 이 읽기는 습관처럼 굳어진 여러 개념에 균열을 일으켰다. 특히 ‘공부’라는 말이 그렇다. 이전에 나는 이 말을 ‘정리된 지식’ 획득을 우선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공부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은 ‘혼란 속에 나를 던지는 일’이며, ‘알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노력이며, 그 알지 못함 속에서 나의 한계를 응시하는 일이었다. 나아가 공부는 ‘안식’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다시 확인했다. 모든 글 앞에서 나는 나를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를 전진하게도 했기 때문이다.
공부/읽기에 몰두하는 동안 시간과 공간은 경계 없이 해체되어 새로운 시공간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해체라는 말에서 암시하듯, 공부는 옛 지식을 허물고 동시에 새 지식으로 나를 개축해 주었다. 이런 점에서 변형된 헤테로토포스라고도 할 수 있다. 낯선 글, 이질적인 주제들을 읽는 일은 곧 상상과 인내를 통해 나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 주었기 때문이다. 안식월의 글 읽기는 나에게 ‘공부’의 의의를 재구축하도록 이끌었다. 즉, 공부는 무엇을 완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을 넘어 세계의 뒷골목, 숨어 있는 세계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듯 감응할 줄 아는 인간으로 변화시켜 주는 선물처럼 기능한다.
끝으로 안식월의 읽기는 나에게 ‘공부의 목적을 재성찰하라’라고 요구했다. 공부의 목적은 결국 ‘감응하는 앎’을 위한 것임을 일깨웠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것만 읽지 않아야 한다. 할 수 있는 대로 새로운 영역의 주제를 찾아 읽어야 한다. 그 글들이 지향했던 내적 동기를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문장들이 내 속에 둥지를 틀어 숙성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고 끝내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한다. 나의 무지를 자극하여 내가 이 세계를 감응할 수 있도록 때를 준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공부는 감응할 때 마무리될 수 있다. 이 감응이 살아나야 나의 읽기는 쓰기로 이어지며 그런 쓰기가 타인의 삶에 제대도 감응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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