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 나와 세계(2)
나의 삼면 일체
나의 안식월 역시 삼면 일체의 삶을 뒤따르는 여정이었다. 검은 안식으로 스스로 들어가 나와 나, 나와 세계 그리고 우리를 마주 보는 성찰의 절기로 보낸 것이다.
(1) 나와의 대면
이번 안식월에 나는 2박 3일 일정으로 서천과 군산에 다녀왔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한적했다. 역에 내려 일단 걸었다. 낯선 도시로 떠나는 여행의 의의는 전적으로 나의 움직임에 달려있다. 낯설지만, 오히려 즐거울 것이다. 기차는 몸에 무리를 주는 운전과 달리 도착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편하게 해 준다는 장점이 있다.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전 정중동의 시간인 것이다.
이처럼 기차 여행은 나를 스스로 낯선 도시에 동참시키는 데 적절한 선택이기도 하다. 내가 머무는 숙소 근처에는 바다와 산이 있고, 그 사이로 난 길이 있다. 시골이며 도시이다. 한 며칠 여기서 머물려, 해변 길을 걷고, 바다를 보며, 산을 걸으면서 나는 나를 좀 더 잘 다독이고,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홀로 떠나는 여행, 그것도 기차를 타는 여행은 한적하면서도 복잡한 나의 삶에서 나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놀이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쿠오바디스, 도미네”
서천역에서 군산역으로 내려오는 길을 혼자 걸었다. 날은 맑았고 바람도 가볍게 불었다. 배낭을 가볍게 했으니 걷는 일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역을 빠져나왔다. 근처 작은 가게에서 물 한 병과 간단한 간식을 챙겼다. 도로 곁길로 조심스럽게 걷기도 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도심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길은 길로 이어지고, 바다는 가까운 듯 멀었다. 걸으면 밀려나는 것 같아서 잡으려고 조금 서두르면 이내 몸에 갈증이 일었다. 정오에 가까워져 오니 기온은 오르고 몸도 지쳐갔다. 쉬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쉼과 걸음이 반복될 것이다. 시골 논둑길로 들어서면서부터 몸이 빠르게 풀어졌다.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도대체 네가 가려는 곳은 어디인가?”
“잊어버린 것은 없나?”
나에게 묻는 말인가 싶었다. 소리만 들렸다. 실체는 없는 듯해서 당황했다.
“나는 가르치는 자였고, 스스로 공부하는 학자이며, 다양한 글을 쓰는 독립작가다. 걷기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세상에 나서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나설 수 있는 여건도 부족하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삶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잘 살았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했고, 이상의 실현에 그치기보다는 더 큰 세계를 상상하며 살았다. 어릴 적 꿈같았던 삶의 이상적 모습을 어느 정도 구현했고, 하고 싶은 말도 다 하며 지냈다. 그런데 내가 가려는 곳이 어딘지, 잊어버린 것은 없는지 왜 묻는 걸까? 나는 잘 가고 있고, 분실물도 없이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야.”
이 보이지 않는 소리는 나에게 목적지와 분실물을 확인해 보라고 일러주었다. 해는 아직 중천이어서 덥고, 간단히 먹은 점심에 배가 조금 출출한 탓에 몸이 지쳐있긴 하지만, 내가 어디로, 무엇을 챙겨야 할지는 전혀 걱정 없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듣고 보니 무슨 이유인지 나를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질문은 내가 나를 돌보는 거울이다. 피곤한 몸, 허기져가는 정신, 빨리 이 길을 끝내야겠다는 조급함. 이런 광야의 풍경에 내몰린 듯한 이런 상태는 나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어디로 가며, 무엇을 챙겨서 가나?
“삶에 고통이 없었다면, 문학을 껴안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소설가 박경리. 그가 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라는 말까지 던졌다는 것을 읽을 적이 있다. ‘아무리 가진 것 없이 산다 해도 나 역시 버리지 못한 채 짊어지고 사는 것은 없을까?’라는 물음이 마음에서 일었다. 몸이 어둠에 빠져드는 것 같은 순간에 나를 안식하게 하는 듯한 질문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래, 내가 가는 곳은 ‘길 위’ 여야만 하고, 내가 잃어버린 것은 ‘마땅히 버리고, 또 버려야 하는 것, 움켜쥠.’ 하지만 내가 뭘 움켜쥐고 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길은 계속되었고 나는 비어 가는 몸을 지탱한 채 걸었다. 해 질 무렵, 마침내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 가는 길에 옛 건물의 카페가 눈에 띄었다. 뒤볼 것도 없이 들어섰다. 나는 평소와 달리 시원한 음료 하나, 따듯한 음표 하나 이렇게 두 개를 주문했다. 하나는 먹고 가고, 다른 하나는 들고 가려는 생각에서였다. 더위와 걷기에 지친 나에게 주는 작은 위로였다.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짐을 정리하고, 쉬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내 배낭에는 어제 들고 왔던 음료가 그대로 거기 있었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이것 버려야 할 것 같은데…. 어젠 왜 그렇게 별생각 없이 서둘러 샀을까?”
“순간의 욕구가 삶의 질서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 나는 이것을 버려야 했다. 순간의 욕구를 느긋한 욕구로 물려보는 것. 그러다 보면 삶은 자연스럽게 그 욕구를 희석해 줄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사실 이런 발견은 특별하지 않다. 결국, 안식월에 내가 되찾은 ‘느릿한 욕구’는 삶의 전면을 통합하여 대면하는 이들의 지혜에 기대고 있다. 나에게 느릿함은 게으름이 나 판단장애가 아니다. ‘나의 삶을 과속하지 않는 정상적인 속도를 유지한다’는 말과 같다.
(2) 나와 자연의 대면
안식월의 결정적 발단은 내 생일이었다. 사실 지난해 내 몸은 질서가 깨졌다. 결국, 약을 듬뿍 받았다. 먹지 않아야 할 음식 목록을 덤으로 받았다. 자연스럽게 모든 음식은 가볍게, 아니 때론 힘겹게 직접 만들어야 했다. 하루 세 번 찾아오는 식사 시간에 갇힌 듯했다. 식사 약속에 상대방이 불편하리라는 괜한 걱정도 자연스럽다. 사람 만나길 좋아했었다. 하지만, 밥을 앞에 두고 마주 앉는 일이 사라졌다. 사람 만나는 일도 쑥 줄어들었다. 좀 불편하지만 모두 내 ㅁ을 위한 치료라는 의사님의 조언이 힘이 되다가 돌아서 나오면 남은 기력마저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은 나를 헝클어 놓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날은 어느새 선물처럼 내 삶에 쌓여간다. ㅁ은 상쾌해졌다. 시간은 여유로워졌다. 무엇보다 세상에 밖으로부터 오는 위협보다도 자기 몸 안으로부터 스멀스멀 삐져나온 질병에 치명적 습격을 받으며 고생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 새삼 알게 되었다. 매끼 음식을 만들어 먹는 즐거움을 알았고, 외출할 때마다 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번거로운 일도 기쁨이라는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 단순해진 삶을 태어나면서 누렸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착각을 평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새롭다. 나의 ㅁ은 그렇게 거듭나는 중이다. 가벼워진 ㅁ은 작은 촉감에 민감해지고, 큰 부대낌에 둔감해졌다.
신기하게 ㅁ의 새로움은 ㅁ의 변화와 맞닿아있다. 이 두 번째 ㅁ은 마음이다. 그저 ‘맘’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든다면 좋을 것이다(Orandum est ut it sit mens sana In Corpore Sano.).” 알려진 대로, 이 유명한 명제는 데키무스 유벨날리스(라틴어, Decimus lunius luvenalis AD 55~140년)의 감정이 실린 넋두리 같은 시의 한 구절이다. 육체 단련에 몰두했던 로마 사람들을 향한 새타이어(풍자, satire)를 시로 남긴 데서 유래되었다. 짐작해 보면 그 시절 육체의 강건함은 아마도 정신의 새로움과는 무관했던 모양이다. 새로워진 육체에 올리브를 바를 수는 있었지만, 푸석해진 정신에 손댈 여유는 없었던 모양이다.
약을 투약하고 나를 관리한 지 몇 개월, 나의 경험을 되새겨보았다. ㅁ의 변화는 그것이 근육질이 되었든, 약골이 되었든 맘을 뒤흔든다는 것을 알았다. 웃을 수도 있고, 울음 직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름 중요하다고 여겨야 할 것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자기 ㅁ의 변화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것이다. 아마도 약골이 되어가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 자기 ㅁ을 위한 식사를 할 때마다 자신을 다독여주는 것이 좋다. 자기 암시야말로 어쩌면 가장 좋은 맘 상태를 유지하는 길일지 모른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다. 새로운 ㅁ은 건강한 맘으로 자신을 다독인다. 동시에 ㅁ 밖으로 나오는 ‘ㅁ’으로 상대를 환대한다. 예상하는 대로, 이 세 번째 ㅁ은 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서점에 나가보면, 말이 ㅁ의 강건함과 긴밀하다는 주장은 즐비하다. 심지어 고대 히브리 성경의 잠언에도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잠 16:24)는 지혜를 넌지시 건넨다. ㅁ과 ㅁ과 ㅁ이 긴밀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ㅁ과 ㅁ과 ㅁ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몸은 우람하여 강건해 보였는데, 지기 안으로 다뤄진 맘은 굽어 있고, 밖으로 쏟아지는 말은 상대에게 악 약 같은 사람들이 즐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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