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 나와 세계(1)
호모 비아토르, 호모 코뮤니타스
“안식월은 세계와 나의 대면이다.
세계 속에서 단독자인 나를 응시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고독과 침묵으로
길 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다. 인간은 ‘홀로’와 ‘함께’라는
역설적 존재 형태가 공존한다.”
안식월, ‘마주 봄’의 의미
나의 안식월은 ‘마주 봄’의 절기다. 이번에 정리할 안식월의 세 번째 요소는 바로 ‘대면’이다. 앞선 글들에서 나는 걷기를 통해 공간과 시간의 해체를 경험하고, 읽기를 통해 공부하는 행위가 안식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언급했다. 이제는 안식월 동안 심화한 ‘대면’의 의미를 정리하며 나 자신을 성찰하려 한다.
안식월에 나는 주로 기차를 이용했다. 짧은 곳이면 전철을, 조금 먼 곳이면 일반 기차를, 서너 시간 걸리는 곳이면 고속열차를 활용했다. 나는 주로 창가 좌석을 이용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고, 몸을 기대 쪽잠을 잘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끔, 한낮에는 터널을 지날 때 창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는 날이 있다. 낯설지는 않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창 속의 나는 볼 때마다 조금 새롭다. 거울과 창이 있을 때, 또는 셀프 카메라를 작동할 때가 내가 나를 볼 기회다. 주로 내 외모다. 대체로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바로 보이지 않는 나를 비춰보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 이것을 보통 ‘성찰한다.’라고 한다. 하지만, 아주 간단한 말로 하고 싶다. 바로 ‘마주 본다.’이다.
즉 ‘내가 나를 마주 본다.’ ‘내가 무엇과 누군가와 대면한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창에 어린 내 모습을 통해 ‘마주 봄’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다가 나는 평소 주목하지 못했던 낯선 의미를 하나 조심스럽게 포착했다. ‘마주 봄’에는 나를 마주 보는 대상에게 개방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 ‘마주 봄’은 ‘열어줌’과 ‘받아들임’이 동시에 일어나는 내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마주 보려는 나의 능동적, 적극적 의지이다. 터널에 들어섰을 때 창가에 비친 내 모습이 처음에는 뿌옇게 실루엣 정도만 보였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차창 밖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자 내 모습이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보려는 의지, 그것이 나를 대면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잠시 쉬는 시간에 나는 아예 스마트폰을 열어 사전을 열었다. ‘마주’라는 말을 찾아보았다. ‘똑바로, 바로’라는 의미가 짙게 배어있다. ‘맞다’라는 의미와 곁들여서. 나는 잠정적으로 이 ‘마주 봄’이라는 말을 ‘두 상대가 몸을 정면으로 하여 똑바로 대하는 태도, 모습’이면서 ‘서로 대하는 상대에게 서로 자기감정을 열어주고, 받아들이는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행동’ 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요컨대, 마주 봄(對面)은 그 상대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고, 상대를 수용하려는 관계의 한 단면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의 능동적, 적극적 의지다.
그런데 며칠 뒤 나는 윤동주의 시「자화상」(1939.9)을 읽으면서 이 ‘마주 봄’이 성찰과 공존, 전망이라는 개념을 함의할 수 있다는 어떤 작은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시 첫 구절 때문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가만히 들여다본다.’라는 이 말은 이 시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 같다. 특히 ‘가만히’라는 말이 그렇다. 요란하지 않게, 자기 안으로 시선을 굽게 해서 내면을 관찰하는 행위가 엿보인다. 물론 이 시에서 시인은 ‘가만히 들여다본다.’의 대상을 자기 자신으로 규정했다. 시인의 ‘마주 봄’의 대상은 바로 ‘자신’이었다.
또 어느 날, 나는 히브리 시인 중에 한 사람이 적어 놓은 시편을 읽게 되었다. 시편의 여덟 번째 시이다. 그 시 중간 즈음에 이런 대목이 있다.
3 내가 보곤 하거든요, 주님의 하늘과 주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들을.
달과 별들도요. 주님이 마련해 두신 것들입니다.
4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이 그를 기억해 주시며,
인간이 무엇이라고 주님이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이 시인 역시 ‘마주 봄’의 행동을 취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윤동주 시인이 자화상과 달리 자기 내면을 넘어 ‘하늘, 달, 별들 대하며 사람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다시 말해 자신을 감싸고 있는 자연과 세계를 마주하며 ‘자신’을 조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윤동주 역시 자기가 자기 내면을 대하는 그것뿐만 아니라, 자연에 마주한 인간을 성찰하는 시를 제법 많이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시인의 관점에서 나는 ‘마주 봄’이 ‘나의 나’만 아니라 또한, ‘자연/세계’를 대면하는 나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마주 봄의 대상에는 인간의 공동체, 즉 사회 자체도 있다. 어쩌면 이것은 한 개인이 ‘인간들의 속성’을 대면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청준의 단편소설 잔인한 도시에서 나는 도시가 발전하고, 성숙한다 해도 자기 세계에 갇힌 공동체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마주 보는 대상이 사회여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닫힌 세계’를 열어 ‘열린 세계’로 가는 것의 유익함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관점은 안식월의 마주 봄이라는 행위가 ‘검은 안식’과 긴밀해진다는 것을 함의한다. 터널로 들어서면서 나와 대면한 또 ‘다른 나’가 바로 그것을 입증한다. 어둠에 묻힌 창에 드러난 내 모습은 그 자체로 검은 자아였다.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 오롯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터널 속에서 창가에 비친 나는 평화로우면서도 아직 어둠과 불안에 갇혀 있다. 그런 나를 기차 안 밝은 세계에 평안하게 앉아있는 내가 바라본다. 이것이 실제 일어나는 일이라면 아마도 가볍게 지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마주 봄은 자기 의지의 산물이다. 이 자기 의지는 안식월 안에서 삼면 일체를 실현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삼면 일체란 첫째, 이 세계에 단독자로 존재하는 자유 하는 ‘나’를 대면하는 것, 둘째, 나를 둘러싼 ‘자연과 피조 세계’의 대면, 셋째, 내가 속한 이 사회, 공동체에 대한 진실한 대면이다. 내가 이 삼면과 대면할 때, 하나의 새로운 대면으로 귀결된다. 바로 인간이 신의 통치 질서를 대면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확신이다.
나는 아주 다행히 이번 안식월에 ‘자기 의지’의 선구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장자, 연암, 예수이다. 무엇보다 장자, 연암에 대해서는 이번에 좀 더 깊이 읽고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처음 만난 듯 낯설어서 아직 그들의 사상이 닻을 내린 심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안식월 ‘마주 봄’과 관련해서 그들이 공통된 양상을 이미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각자 대면한 세계에서 삼면 일체의 실현을 통해 ‘홀로 함께’를 모두 구현한 사유의 설정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대면을 실현한 자들이다. 인간이 길 위의 단독자인 호모 비아토르이면서 ‘자연과 사회와 타자’를 대면하며 공동체성을 함양하는 호모 코뮤니타스라는 것을 말과 글과 삶으로 입증해 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과 대면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와는 이질적인 검은 존재를 직면하며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는 안식의 실현 말이다. 나는 이 안식월에 다시 기억한다. 안식은 쉼이 아니라 자기와 세계와 공동체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적극적인 자기 해방의 절기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안식월에 ‘마주 봄’이라는 의미를 대면의 삼면 일체로 요약했다. 이제 나는 안식월에 내가 새롭게 대면한 것들을 통해 삼면 일체의 양상을 좀 더 정리해 보려 한다. 이들에게서 간과할 수 없는 공통특징이 있다. 바로 그들은 대면의 대상 중 모두 ‘자신과 대면’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을 대면한 뒤에, 곧 자연을 대면하고(장자), 사회와 문명을 대면하고(연암), 타인, 소외된 이들, 원초적 죄인(예수)을 대면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 세계를 동시에 대면한 지혜자였다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안식월, 내가 대면한 삼면 일체
삼면 일체의 대면은 바로 자신과 자연과 세계와 타인을 마주 봄이다. 나는 이것들을 오늘 여기에서 다시 대면한다. 그들과 마주하려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이다. 나는 나의 결단으로 이들의 지혜를 수용하려고 애썼다. 사실, 이런 노력 자체가 나를 ‘검은 안식’으로 밀어 넣은 이유가 되었다. 이들을 만나는 동안 나는 새롭게 고독했고, 새로운 은둔자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대면자’의 용기를 갖게 되었다. 데이비드 빈센트는 치머만의 말을 빌려 전해주듯 “건강한 고독은 자기 회복과 건강하고자 하는 경향(15쪽)”이라고 권면한 바로 그대로이다. 안식월 동안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첫째, 장자다. 그는 철학으로 인간의 위상을 파헤친다. 그의 무위는 ‘인간이 단독자로 자유하다.’라는 것을 실증한 사유의 핵심이다. 이러한 무위는 자연과의 일치다. 인간이 자기 내면을 자연과 일치시키려는 무위의 노력은 곧 고독해진다는 것이다. 스스로 혼자가 될 때 가능하다. 동시에 장자는 인간과 무위의 놓이는 자연이 공동체성의 관계에 놓인다고 관찰했다. 만물제동을 보여주는 제물론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그의 견해는 인간이 홀로 무위를 실현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이 세계와 균등한 위상에서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 공동체성의 존재다. 이로써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스스로 변방으로 물러나 제물을 실현한다. 이는 인간이 단독자이면서 자연과 무위의 인간이며, 궁극적으로 탈인간의 인간화에 도달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특히 장자의 경우, 나는 그의 제물론에서 자연을 대면하는 그의 태도를 잘 볼 수 있었다. 제물이라는 말 그대로 하면, ‘물을 제한다’ 즉 ‘사물을 균등하게 조율한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이 제물론의 문을 여는 이야기에 ‘오상아(吳喪我)’와 ‘천뢰(天籟)’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 두 용어가 장자가 세계를 제물 하는 핵심 의미라고 생각했다. 먼저 오상아는, 풀어쓰면, ‘내가 나를 장례 지냈다(최진석 역).’라고 한다. 천뢰는 ‘하늘이 세계 모든 구멍에 각자 소리를 내게 하는 바람의 주인’을 의미한다. 장자의 말을 해석하는 사람 중에서 어떤 이는 ‘오상아’의 ‘아(我)’를 주목한다. 바로 ‘자기 내면’을 기표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나를 장례 지냈다’라는 이 말에서 장자가 ‘탈아(脫我)’ 즉 자기를 벗어던지는 인간상을 선언했다는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또한, 천뢰를 통해 세계 것들이 각기 자기 소리를 내는 것은 그 소리의 근원이 하나라는 말에도 공감했다. 이로써 장자의 견해는 세계가 왜 균등한가, 경계 없이 왜 소통해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이라고도 생각했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은 제물이 추구하는 실천적 덕목이다. 나아가 인간은 자연을 대면할 때, 비로소 자신도 대면하고, 나아가 더 큰 지혜에 대면할 수 있다. 결국, 세계는 인간과 자연, 작은 지혜와 큰 지혜의 조화를 통해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장자는 홀로, 자신과 자연을 대면함으로써 무위에 삶에 도달하는 인간상을 구현해 냈다는 것이다.
둘째, 연암이다. 그는 문학으로서 인간의 자리를 파고든다. 그는 안식월처럼 자기 일상에서 스스로 벗어나 열하로 향하는 사신단과 동행한다. 맡은 소임도 없이 험한 길에 스스로 참여한다. 검은 안식에 참여한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열하일기를 남긴다. 특히 이 일기는 가는 여정에서 겪은 일들만 기록되었을 뿐이다. 이런 열하일기의 저술 뒷이야기 역시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단독자 의식이 드러난다.
한편, 연암의 문학관은 실증적 관찰이다. 그는 관찰을 시작으로, 냉철한 사유를 거친 자기 성찰을 글로 갈무리한다. 경험을 문학화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문학관이다. 거의 의심 없이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세계로부터 조금 벗어난 곳에 인간의 자리를 정위 한다. 이는 보편적 인간에게는 다소 불안한 조치다. 하지만, 그는 여러 고독한 과정을 거치며 점점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인간을 창출한다. 이때 최후의 인간은 결국 고독자이며, 길 위에 있는 존재다.
이와 함께 연암의 관점은 인간의 실용성에 토대를 둔다. 이는 인간이 홀로 존재하면서도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주목했음을 입증한다. 그의 문학은 인간의 자기 갱신일뿐만 아니라 이 세계, 특히 인간이 거하는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아래로부터 개혁하는 실학적 결과물이다. 이로써 인간은 세계에서 비켜나 홀로 있으면서도 세계의 진실과 분리되지 않는 사회관계적 존재가 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그의 북학사상이다. 북학의 대상인 청나라는 오랑캐가 아니라 선진 문물을 구현한 어엿한 나라이다. 그들과 교류는 그저 이익을 위한 정치적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전진하는 세계를 위해 서로를 공존재로 인식하는 실용적 태도이다. 이로써 인간은 홀로 미물로 세계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세계들과 교류함으로써 함께 거시적 존재로 확장될 수 있는 역동하는 존재다. 그가 사신단의 일원으로 끝내 선진국 청나라에 머물지 않고 다시 돌아와 자기 이야기를 실천해 보려는 시도 역시 그가 공동체적 의식을 지닌 단독자였다는 것을 입증한다.
셋째, 예수다. 예수는 스스로 실증하는 삶을 살았다. 인간의 관계적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예수는 홀로 군중에게서 떨어져 존재하는 일이 많았다. 자기 내면을 마주 보기 위함이다. 동시에 여러 무리 틈에 있기도 했다. 관계하는 인간인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다. 동시에 다른 이를 위해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역설적 위상을 갖는다. 그는 글을 남기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사람이 지금도 그를 묵상하고 있다. 그의 묵상은 인간과 동떨어진 독립 공간에서 몰래 이뤄지는 침잠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라는 인간 속으로 파고든다. 그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수고를 불사한다. 마침내 예수는 자신과 그들의 공동체성을 이뤄낸다.
공동체성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영성이다. 정신이다. 기본 가치관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공동체성은 보이지 않아도 보고 있다,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다는 의식에 가깝다. 이 공동체성에 의해 인간은 ‘홀로 길을 가는 존재’이면서 ‘더불어, 함께 가는 존재들’이라는 관계성이 입증된다. 예수는 틈을 내어 자신을 고독의 강에 띄운다. 자기 삶을 성찰하며 돌이킨다. 그의 묵상은 곧 몸의 실천이다. 속으로 하는 생각이 아니라, 프락시스의 실현이다. 그의 묵상의 결과는 항상 개인적이면서 공적이다. 이런 점에서 중의적이다. 따라서 예수는 사람됨을 실현하는 것으로 한 인간의 존재의의를 일깨우고 약자와 병자와 가난한 자와 같은 소외된 자들을 치유함으로써 그들이 공동체와 사회에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공동체적 인간을 직접 제시한다.
이러한 예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타자의 대면은 바로 안식일과 관계되어 있다. 특히 ‘손이 안으로 굽어진’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줌으로써 논쟁이 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예수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속에서 예수는 ‘안식하는 날’이 종교적 전통에 갇힌 날이 아니라, 경계선 너머로 밀려난 자, 진입 장벽에 꼼짝 못 하는 자, 스스로 자기 걸음을 내디딜 수 없는 자들을 해방하고, 자유하게 하는 날이라는 것을 선언했다.
예수는 자신이 대면한 이들을 구원해 냈다. 이 구원은 그의 굽은 손이 펴진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식사할 수 있는 것이며, 멀리 걸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두 발의 힘을 되찾아 준 것이다. 결국, 예수가 타자를 대면하는 일은 곧 예수가 스스로 한적한 곳에 나가 홀로 있는 고독한 의식과 맞닿아있고, 나아가 거대한 하늘의 뜻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여 실현한 것이다.
이처럼 내가 대면한 이 세 인물의 삶과 사유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들려준다. 홀로 있는 고독과 함께 있는 공동체는 상반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삶은 진정한 공동체성이 성립하는 전제조건을 일러준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고독한 자기 성찰이다.
이들은 모두 타인과 세계라는 거시적 상대를 대면하기 전에 먼저 ‘자기 대면’을 시도했다. 광야로 나가거나, 자연을 벗 삼거나, 이유 없이 힘겨운 여행을 따르거나, 환호하는 군중을 뒤로하고 홀로 한적한 곳으로 나가 묵상하는 등 외부와의 단절을 스스로 선택했다. 이유는 하나, 자기 내면을 응시하는 시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들의 시공간은 헤테로토포스다.
한편, 이들의 고독한 자기 성찰은 이제 공동체성의 실현으로 승화된다. 이 고독한 성찰이 단순히 개인적인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자는 자연과의 합일, 연암은 사회 개혁을 글로 남겼다. 장자는 자기 글의 대부분을 ‘우언(寓言)’으로 남겼다. 사물의 앞에서 뒷면을 바라보며 이야기한 것이다. 바로 이야기하는 것이 빠르고 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는 느릿하고, 천천히 사물의 진실에 다가가야 상호 일체감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사회적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이 우언은 나의 느릿한 욕구를 되찾는데 큰 힘이 되었다. 연암의 사회 속에 일어나는 사건을 직접적인 말글로 남겼다. 나는 그가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돌아가시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런 흔적을 발견했다.
눈을 뜨고 싶어 하는 맹인이 눈을 뜨면 주변이 낯설어지는 불안감을 호소하자 연암은 ‘도로 눈을 감고 가라’고 권면한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알맞은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권면에서 연암이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직시하며, 그것을 타자의 고유한 흐름, 나아가 자연과 세계의 변화를 간파한 것을 발견한다. 그의 글은 그저 이야기가 아니다. 굳어버린 관습과 문명의 게으름을 직시하며 대안을 찾아내려는 분투기다. 예수는 자기 삶을 아예 글처럼 그려주었다. 어느 날 율법을 어긴 여인을 데려와 예수의 판단을 시험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악한 모의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예수는 그 군중을 향해 분노하기보다 몸을 구부려 땅에 글을 쓴다. 무엇을 썼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어떤 상징일 수 있다. 이제 보여줄 자기 몸의 행동이 곧 자신의 판단이며, 말이라는 것. 그다음 예수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했다. 군중들은 비겁하다. 껍데기 분노를 내던지고 이를 갈며 돌아갔을 것이다. 예수는 글을 자기 몸의 상징으로 써 내려갔다. 스스로 곤경을 감수하고, 돌파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삶은 ‘검은 안식’을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검은 안식은 이들이 보여준 것처럼, 홀로 고독한 시간을 감수하며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용기 있는 결단이다. 이 고독의 시간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살뜰히 돌보고, 그 힘으로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며, 모두가 함께하는 공동체적 삶을 실현할 수 있다.
나는 알게 되었다. 이들의 사유와 실천은 대면하는 인간의 본질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데 기여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대면한다. 이것이 안식월이 담지한 세 번째 특질로 나를 안내한다. 인간은 단독자로서 고독하게 자기를 성찰한다. 또한, 홀로 이 세계와 관계를 강화한다. 마침내 개인에서 공동체로 합류한다. 그렇게 고독한 자기 성찰이 공동체성의 실천으로 승화된다. 앞서 내가 대면한 이들은 삼면 일체의 실천들이다. 고독했으나 세계를 그럴듯하게 위장한 빛, 심화한 어둠을 깨뜨려 진실의 빛으로 안내한 삶이 뚜렷했다. 다시 말해, 자기희생의 인간관, 탈인간화의 인간관, 반성하는 인간관이라는 통합적인 인간관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이들의 견해는 인간이 신의 세계를 대면하며 그의 길을 따라, 홀로, 함께 걷는 인간성의 실현으로 수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