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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파파 Jan 18. 2021

너를 재울 노래

지금은 자장가가 중요한 게 아니지만...

이 글을 올리는 2021년 1월 기준 41개월 된 아들과 22개월 된 딸을 키우고 있습니다.

에피소드들은 어제 얘기일 수도 있고 1년 전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때론 2년째 반복되는 얘기일 수도 있고요.



 둘째는 태어나고 1년 가까이 아빠인 나와 둘이서 잤다. 당초 계획은 달랐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 준비하기로는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갈 둘째는 엄마와, 첫째는 아빠와 자기로 했다. 첫째도 동의를 했다. 하지만 막상 동생을 마주하니 얘 때문에 엄마와 떨어져 자야 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나 보다. 첫째는 단호하게 본인이 엄마와 자겠다고 선언했다. 그날로 끝이었다. 둘째에게 선택의 기회는 없었다. 첫째는 안방에서 엄마와, 둘째는 나와 건넌방에서 자는 생활을 열 달 가량 했다.      


둘째에게 최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매일 밤 함께 자면서 아빠와 딸은 꽤 돈독해진 것 같다. 언젠가 이 주제로도 글을 쓸 텐데 둘째는 엄마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으면 놀랍게도 “아빠가 좋다”라고 얘기한다. 어린 시절 매일 같이 잔 것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많은 엄마 아빠가 그렇듯 나 역시 아기를 재울 때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재우는 것도 일과이자 일이다 보니 자장가 레퍼토리가 만들어지기 마련. 내가 불러주던 노래는 크게 세 가지 테마였다. 첫째는 ‘자장자장 우리 아기~’ ‘엄마가 섬그늘에~’처럼 자장가라 불리는 노래들. 둘째는 임창정 노래였다. ‘결혼해줘’ ‘소주 한잔’ ‘러브 어페어’ 등을 주로 불렀다. 셋째는 CCM이다. 가사집도 악보도 반주도 없이 노래를 불러야 하니 CCM 중에서 잘 아는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똑바로 보고 싶어요’ ‘실로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너는 내 아들이라’ 등을 매일 밤 불렀다.      


임창정 노래든 CCM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가사를 꿰고 있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들은 결국 중고교 시절 부르던 노래들이었다. 노래들을 부르며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당시 소소한 감정들도 생각났다. 내가 잘 기억하는 노래는 내 어린 시절을 말해준다. 그 노래들이 다시 아빠가 된 내 입에서 흘러나와 자식 귓가에 울린다. 엄청난 일은 아니지만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자장가의 주목적은 물론 아기를 재우는 것. 그렇다 보니 큰 소리로 부를 수는 없다. 나지막한 소리로 불러야 하는데 이게 늘 고민이다. 사실 지금도 난제다. ‘나지막’에 방점을 두고 시작하면 이게 참 음이 너무 낮아져 소리가 내 안으로 자꾸 먹힌다. 내 딴에 본래 음을 지키면서도 작은 소리로 부르고자 가성으로 부르면 스스로 오글거리기도 한다.  딸내미에게는 별 상관없겠지만 어쨌든 완창을 하고 싶다. 아빠가 지키고픈 하나의 자존심이다.          


낮은 음으로 부를 때와 가성으로 부를 때, 어느 쪽이 더 딸내미를 잘 재우는지는 의문이다. 우위가 없다. 하지만 아기가 잠이 잘 드는 노래는 있는 것 같다. 우리 딸에겐 CCM '너는 내 아들이라'다. 딸인데.


우연이 반복된 결과일 수도 있다. 아기들이 자장가 하나에 잠드는 경우란 거의 없다. 대여섯 곡을 부를 때쯤 잠이 들고 하필 그때 부른 노래가 '너는 내 아들이라'였던 경험이 또 대여섯 차례 쌓여서 형성된 기억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기 재우기에 반복적으로 성공한 기억은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노래를 자장가 레퍼토리의 하이라이트에 배치하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그렇다. 저 노래가 정말 수면에 특효가 있다면 처음부터 저 노래를 부르면 될 테지만 그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간신히 만든 '내 딸을 재울 노래'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은 방어심리랄까.


하이라이트 자장가가 되고 보니 '너는 내 아들이라'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은 좀 더 자주 소환한다. 가사 내용은 예수님이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내용이다. '너는 내 아들이라'란 가사가 반복되니 부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부모 입장에서 부르게 되는 게 사실이다. 어릴 때는 '아들'에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다. 부모님과 형과 나로 이뤄진 가족이라 괜스레 더 감정을 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린 시절 다녔던 교회에서는 가족찬양대회란 게 있었다. 내가 아빠가 돼서 가족들과 그 대회를 나가게 된다면 '너는 내 아들이라'를 부르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제 두 돌을 앞둔 딸에게 자장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본인이 하고 싶은 놀이와 참견을 다 하고 난 뒤에야 갑자기 쓰러지듯 잠든다. 그래도 누워서 조금이라도 잘 기미가 보일라치면 난 '너는 내 아들이라'를 부르곤 한다. 요즘에는 대부분 실패다. 두 소절쯤 부르면 다시 일어나서 집안을 활보한다. 혹시나 해서 아들을 딸로 바꿔 불러봐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딸을 재우는(재웠던) 노래'가 하나쯤은 있어서 좋다. 아이를 키우는 현재 경험과 과거 어린 시절 기억이 맞닿는 게 소소하지만 의미 있다. 덕분에 온 가족이 가족찬양대회에 나가 '너는 내 아들이라'를 부르는 상상을 다시 하게 됐다. 이번엔 2절에서 아들을 딸로 바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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