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이단아로 뉴욕 미술계에 그 존재를 알린 바스키아는
스타작가 반열에 빠른 속도로 안착했다.
삶과 죽음, 폭력과 공포,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내면 밑바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원초적인 인간 본성을 대면하게 한다.
이번 전시는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지금까지도 미술, 음악과 패션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새롭게 해석되며,
살아있는 신화이자 영웅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_롯데뮤지엄
자신의 기사가 나온 신문
"1977년부터 바스키아는 그의 친구 알 디아즈(Al Diaz)와 함께
‘흔해 빠진 개똥(SAMe Old Shit)’ 같다는 뜻의 ‘세이모(SAMO)’를 만들어
거리 곳곳에 스프레이로 하는 낙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물질만능주의와 권위적인 사회를 비판한 SAMO는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백인들로 뒤덮인 소호 지역의 갤러리들은
그들의 색다른 행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바스키아는 1978년 말부터 불거진 활동에 대한
입장차이로 알 디아즈와 결별했으나,
SAMO라는 글자는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롯데뮤지엄
바스키아는 벽, 문, 테이블, 옷 등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모든 곳이,
그의 캔버스가 되어주었다.
바스키아 전시회다운, 위트있는 Sign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치는 예술이다.
가장 오래 지속되고, 사람들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 장미쉘 바스키아
집을 나와 노숙하며 우편 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바스키아는 앤디워홀을 동경하며
그와 같은 성공을 갈망했다.
1982년 바스키아가 그토록 바랐던 앤디 워홀(Andy Warhol) 과의 만남이후,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본 워홀은 그와 함께 예술적인 교감을 나누며,
1985년까지 150여점의 작품들을 공동으로 제작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워홀이 먼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면,
바스키아가 그 위에 거친 붓질로 덧칠하고
글씨를 쓰고 지워 작품을 완성했다.
1980년대 미국 미술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키스해링(좌) , 앤디워홀(중), 바스키아(우)
"창의적인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흥미로운 변화다.
아마 상호보완적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 친하게 지내며 예술적 교감을 주고 받았고
이는 자신들의 예술적 영역을 확장하게 해주었다.
바스키아는 키스해링을 통해 그래피티에서 회화로,
앤디 워홀은 젊은 바스키아를 통해서
회화의 힘을 재발견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세계적인 팝스타였던 마돈나와도 친하게 지낸,
바스키아와 키스해링, 앤디워홀
앤디워홀의 일기를 통해, 그가 바스키아를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하며 격려하며, 많은 시간들을 함께 보낸 것을 알 수 있었다.
앤디 워홀의 제안으로,
바스키아는 초대된 손님들을
접시에 그려 선물하곤 했다.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은 바스키아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고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칩거하며 작품에만 매진하던 그는,
8월 12일 마약 남용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거리의 이단아’에서 ‘세계 화단의 유망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바스키아는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3,000점에 이르는 드로잉과
1,000여 점이 넘는 회화와 조각 작품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