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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Aug 18. 2021

실패를 마주하는 방법

그럼에도 열심히 고쳐 쓰는 중입니다

 랩탑 앞에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목 디스크 무서운 줄 모르고 턱을 괸 채 눈만 껌뻑껌뻑. 지금 나는 무엇을 쓸지 고민하며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다. '날짜_제목_이름_피드백'이라는 이름의 워드 파일을 클릭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열어보자 결심해도 피드백 세 글자와 눈이 마주치면 손가락은 터치패드 위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다시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 지금 상처 입을까, 말까. 멘탈이 단단한지 무른 지 맛있는 수박 고르듯 통통 두드려 본다. 


 창작물을 과제로 제출하는 건 약간 포켓몬 게임 속 대전에 참여하는 것 같다. 내 포켓몬. 애지중지하며 먹이고 키우고 단련시켜 온 나의 소중한 피카츄. 뭐, 과제는 벼락치기로 급하게 먹이고 키우고 단련시키는 거라 조금 다르긴 한데. 그래도 내가 만들어 낸 무엇이니까 어쨌든 소중하고 애지중지하고 그런 거다. 살짝 시간에 쫓긴 듯 하지만 더 이상 나은 게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비장하게 "가라! 피카츄!"하는 마음으로 메일 보내기 버튼을 누른다. 이번엔 칭찬만 받을 거야. 다 이기고 내 포켓몬이 최고가 될 거야. 꼭 이렇게 야심 차게 보내고 나면 며칠 뒤 내 피카츄는 상처 입은 채로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온다. 빨간색 글씨로 여긴 수정해야 할 듯, 여기는 별로 등 코멘트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채로. 누군가를 꺾고 이기려고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건 당연히 아닌데, 그냥 창작물을 내고 그에 대한 평가를 받는 기분이 꼭 그렇다. 진 것 같은 기분. 미안해, 피카츄. 



 대전에서 진 내 소중한 포켓몬을 어떻게 졌다고 버리고 "넌 최악이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게 내 창작물에는 너무 쉽다. 나는 내 부족한 결과물을 다시 들여다보는 게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다. 이거 내가 한 거 아닌데요? 태연하게 모르는 척 뒤돌아 가던 길이나 가고 싶다. 내 못난 점이 전부 다 드러난 것 같다. 그런 기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자신의 못난 점을 당당하게 "나는 못난이입니다!"하고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나요? 네, 여기요. 제 인생 공짜로 구독해 보라고 자발적으로 에세이를 써내려 가고 있는 나. 여기에 있습니다. 할 말이 없어지긴 하는데 할 말은 해야겠다. 고쳐야 할 게 많은 내 실패작을 다시 마주하는 일은 어렵다. 어쩔 수 없다. 틀리기 싫어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을 굳게 믿었던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의 틀림을 다시 들쳐 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한 발 짝 나아가야 한다. 턱은 그만 괴고 이젠 커서를 움직여 그 파일을 열어 봐야 한다. 용기 내서 클릭 한 번, 하면 안 열린다. 평소보다 두 배를 내야 한다. 더블클릭이니까. 별거 아닌 것 같은 그 용기는 참기름과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구나. 짜내야 하는구나. 그럼, 오픈! 


 다행히 눈은 붉은색 폰트에 금방 적응한다. 피드백에 맞게 조금 고쳐보기도 한다. 지우기 버튼을 (눈물을 머금고) 연타하고 무언가를 써냈다가 다시 지운다. 가끔은 불쑥 "내가 맞는 거 아니야!"하고 반항이 튀어나온다. 어떻게 더 낫게 바꿀 수 있을까 타자를 계속 치다 보면 가끔 꽤 마음에 드는 표현이 화면에 뿅 나타난다. 순간 아주 작은 성취감이 꿈틀 한다. 파일 이름 뒤에 최종, 진짜 최종, 진짜 마지막 같은 단어를 붙인다 하더라도 다시 봐줄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그래서 더 짜릿하다. 더 나은 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짜낸 용기 한 발 짝이 조금 더 괜찮은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우와, 내가 성공한 참깨라니! 더 고소한 참기름! 


 실패를 마주하는 법은 꽤나 간단하다. 모두가 알겠지만, 그냥 마주 바라보면 된다. 보기 싫은 마음만큼 용기를 짜내는 일도 해보면 그리 어렵진 않다. 내가 원래 엄살이 조금 심해서. 그런데도 미래에 다가올 더 많은 실패에 벌써 숨고만 싶다. 빠져나갈 뾰족한 묘책은 평생 없을 것 같다. 실패를 줄여나가면 좋겠지만 나도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나의 의식을 휴머노이드에 심지 않는 이상 그 방법도 안 될 것 같고. 아니, 그 휴머노이드가 내가 된 이상 걔가 실패를 안 하리란 보장도 없는데. 어떻게 이겨내서 얻은 작은 성취감은 쌓이고 쌓여도 너무 작아서 부정적 평가 딱 하나에도 쉽게 바스러지곤 한다. 그럼에도 계속 마주 봐야 한다. 실패를 마주하는 방법에 방법은 없다. 


 키가 크는 느낌을 성장기 때 실시간으로 느껴본 사람이 있을까. "오, 나 지금 5센티미터 자라는 중. 10분 전보다 눈높이 조금 높아짐." 멋진데? 아무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그 나이 땐 교복도 크게 사 입어서 스스로가 더 작게 느껴질 뿐이다. 그저 몇 번의 성장통과 오랜만에 만난 친척의 "너 언제 이렇게 컸니?"라는 말에 어렴풋이 크고 있나 짐작할 뿐. 그 느낌 하나 믿고 오늘도 피드백 단어가 붙어있는 파일을 열어본다. 실패를 또 마주해 본다. 교복 블라우스 소매가 딱 맞게 손목에 와 있는 것도 모르고 졸업했던 옛날처럼. 나는 그렇게 더 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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