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리 Oct 21. 2020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오늘의 선곡: 사라 맥라클란, Angel

    백수가 체질이다. 오래 놀아보니 알겠다. 밤이 더 길든 낮이 더 길든 상관없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하루를 시작하고, 모든 메뉴를 브런치로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며 (브런치는 역시 김밥에 라면이 최고), 예전이라면 '퇴근하면서 봐야겠다'며 미뤄뒀을 최애의 영상을 매 분 매 초마다 보며 덕질할 수 있는 이 삶이 나에겐 딱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재능이고 놀기에도 소질이 좀 있으니 꿈은 뽀로로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모여라.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회사 밖을 한 걸음 나서는 순간 느낀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규칙적인 생활을 무자비하게 망쳐버릴 수 있다는 짜릿함. 갑자기 늘어난 여유로운 시간을 흥청망청 써버리겠다는 기대감. 홀가분한 마음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안 쓴 것처럼 상쾌하다. 오래 쉬기로 작정한 만큼 해보고 싶었던 건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마지막 퇴근길을 걸었다. 


퇴사 짤 하면 역시 이거죠. 출처: 네이버 블로그 Park Amsterdam


    그로부터 대략 5개월이 지났다. 꿈꾸던 백수 생활은 적성에 맞을 정도로 좋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만족만 했다면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쉬고 있는데도 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이 불안함과 불편함은 뭐지?


    햇빛이 내 방을 채우면 눈을 뜬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부터 켠다. 혹시 자는 동안 떡밥*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가장 먼저 확인한다. 대충 다 봤으면 이제 침대를 벗어날 법 한데, 굳이 일찍 벗어날 이유가 없으니 더 뒹굴거리고 싶다. 그러면 꼭 평소에 잘하지도 않는 인스타그램 어플이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카메라 모양의 버튼을 누른다. 괜히 봤다. 사람들이 나보고 '갓(god) 백수'라고 부럽다고 했는데, 신 치고는 내 삶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내 하루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오늘은 나도 생산적으로 살자!" 외치며 드디어 침대 밖으로 나온다. 


    분명히 패기 있게 하루를 시작했는데 거실로 나오자마자 도로 소파에 누워버렸다. 아빠와 동생이 출근한 후 집안일에 열중인 엄마만 남아있는 곳에서 혼자 벌러덩 누워있기란 참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운동은 최고의 핑계다. 조용히 헬스장에 다녀온다. 남은 하루는 엄마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다가 지루해지면 책을 읽으면서 보낸다. 몇 장 못 읽고 (무려 커피를 방금!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든다. 눈을 뜨면 역시나 자는 동안 떡밥이 떨어지지 않았나 가장 먼저 확인한다. 한참 덕질을 하다 보면 벌써 저녁이다. 큰일 났다, 생산적으로 살겠다고 했는데! 오늘은 '작문으로 배우는 영어' 5페이지는 공부하려고 했는데. 몇 챕터 남지 않은 책도 다 읽고 브런치에 올릴 글도 쓰려고 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퇴사하면 여행도 다니고, 해보고 싶었던 일은 다 해보고, 그걸 글로 다 적어두기까지 할까. 모두에게 24시간이 똑같이 주어지는데 나라고 못할 일은 없다..가 아니고 있었구나. 그렇게 "오늘도 망했다"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거 아시나요? 사실 자연산 능이버섯은 굉장히 비싼 버섯이라고 하네요.. 눈물이.. (출처: 네이버 지식인)


    유독 내 글도 잘 안 써지고 남의 글도 영 읽히지 않아 책상에 엎드려 음악만 계속 쏟아내는 아이패드만 멍하니 쳐다보던 밤이었다. 무작위로 재생시킨 내 플레이리스트에서는 마침 사라 맥라클란 (Sarah McLachlan)의 '엔젤 (Angel)'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지금 천사의 품에 안겨 있어요. 여기서는 평온을 찾을 수 있길 바라요. (You're in the arms of the angel. May you find some comfort here)." 꼭 나를 이해한다는 듯,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주며 괜찮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듯했다. 


    마지막 퇴근길을 걸었던 그 순간 사실 나는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며 아무 걱정 없이 시간을 흥청망청 써버리겠다고 했지만, 진짜 속마음에는 '그래도 진짜로 그렇게 살면 안 된다'라는 강박이 깊게 뿌리를 잡았다. 그 강박은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기'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쉬는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불안함을 먹고 자랐다. 노래를 들으며 깨달았다. 그저 아무것도 안 하는 휴식 또한 간절히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안 한다고 자책만 했다. 사실 하루를 되돌아보면 진짜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열심히 자기의 삶을 사는데 나만 멈춰있는 것 같은' 기분이 불안함의 가장 큰 원천이었다. 끝없는 비교와 그에서 오는 열등감이 문제였다. SNS만 들어가면 쏟아지는 멋진 인생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훌륭한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아 나가는 사람들. 운명의 사랑을 만나 남은 삶을 함께 꾸려 갈 계획에 바쁜 사람들. 그 인생들 사이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내 삶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도 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로 선택한 삶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럼에도 나만 멈춰있다는 자괴감에 우울이 바닥을 치고 내핵까지 뚫고 갔다. 결국 인생이란 긴 경쟁이구나라는 씁쓸한 생각에 울적해졌다. (이러다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면 내가 더 싫어졌다. 그만해!)


그거 생각보다 꽤 힘들더라고. (출처: 웹툰 마음의 소리 871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자책하지 말자.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나는 지금 삶이라는 긴 레이스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쉬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들도, 평생 그러고 있을 거냐며 한심하게 쳐다보고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여태껏 최선을 다해 달려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쉬지 않고 계속 달려야 하는 건 아니다. 지금 지쳤다면 잠깐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에게 여유를 허락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로 했다. 국어사전에 '쉬다'를 찾아봤다. "피로를 풀려고 몸을 편안히 두다." 이것 봐. 어디에도 '일을 하다' 혹은 '마음이 불안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라는 뜻은 없다고. 공식적으로도 인정받았으니, 나는 괜찮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 


    며칠 전 읽은 오은 시인의 칼럼이 떠올랐다. "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쉼이 주는 안도감은 사라지고 만다. 거기에 들어서는 것은 불안감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 아무것도 안 했다는 이유에서 기인하는 자기혐오, 바지런하게 뭔가를 '생산'하고 있는 이들을 떠올릴 때 극대화되는 열등감 등 대부분의 감정이 부정적이다."** 이젠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서 나를 놓아주기로 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천사의 품에서 편안하게 쉴래요. 


    잠깐, 이러다 평생 쉬면 어떡하지?




오늘의 선곡: Sarah McLachlan, Angel (https://youtu.be/2LuGzwNy2ws)


(+) 맥라클란은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키보디스트 조나단 멜보인(Jonathan Melvoin)에 대한 롤링스톤의 기사를 읽고 영감을 받아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멜보인은 헤로인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멜보인에 대한 그 기사를 읽고 깊은 슬픔과 공감을 느꼈다고. 그는 "헤로인을 해보지도, 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허무함이라는 감정과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동영상에 달린 댓글 창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소중한 이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또 맥라클란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책임지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마음으로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순간에 어떤 기분으로 이 곡을 만나는지는 각자가 다 다르겠지만, 곡이 흐르는 동안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위로나 위안, 따뜻함 그런 것들 말이다. 


사심을 담아 올해 많이 들었던 버전의 '엔젤'도 함께 소개하고 싶다. 팬심 빼도 정말 좋거든요.. (https://youtu.be/gu9iLVEx2o0)





* 떡밥: 새로운 사진이나 영상물. 낚시를 할 때 물고기를 잡기 위해 떡밥을 뿌리는 것처럼 팬질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말함. (출처: [미쓰송의 덕생덕사] 당신 옆 동료도 '덕질' 중입니까)

** 오은, "[문화와 삶] 쉬는 시간에 무엇을 했었지?", 경향신문, 2020.10.08

*** "'I have to make fun of it': Sarah McLachlan on the intense power of Angel, the unofficial song of sorrow" CBC Radio, Jun 18 2018

**** McDonnell, Evelyn (September 1997), "Lilith Fair", Spin, Spin Media LLC, p. 64. 

매거진의 이전글 스물아홉, 마이 퓨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