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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Jan 12. 2021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본다면

오늘의 선곡: 사샤 슬로운, High School Me

    누구에게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있다. 나는 딱 두 번. 일곱 살 때 안경이 너무 쓰고 싶은데 시력은 좋으니까 일부러 TV를 가까이서 봤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차라리 실패하면 좋았을 것을. 어린아이를 붙잡고 "네가 고도근시가 뭔지 알아?" 울면서 설명해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 고등학생 때는 춤을 좋아했다. 스트릿 댄스를 추던 반 친구가 같이 댄스 학원을 다니자고 했다. 정말 신이 나서 엄마한테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초를 치듯 엄마는 "고등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무슨 춤이야"라고 말하셨다. 그리고 그 말을 너무 잘 들었다. 친구의 제안을 거절한 게 아직도 미련이 남는다. 원래 순탄하고 얌전한 사춘기를 보낸 아이들은 몇 년이 지나서야 "그때가 반항해 볼 절호의 기회인데!"하고 뒤늦게 후회하는 법이다. 어쨌든 만약 내가 그 두 번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일곱 살 나에게는 알 없는 패션 안경을 사줄 거고, 열여섯 나에게는 엄마 몰래 팝핀 학원을 끊어줄 거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있지만 솔직하게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스물 다섯 이전의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10대 시절은 더더욱. 그때의 나는 줏대가 없었다. 얘 말도 맞는 것 같고, 쟤 말도 맞는 것 같았다. 누가 "너는?"하고 물어보면 어버버 하기 일쑤였고. 그때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참 남들에게 밉보이는 게 싫었구나'싶다. 아무 생각 없이 "네가 다 맞아" 하면 딱히 미움받을 일도 없으니까. 그게 누구든 간에 말이다. 물론 당시에도 '줏대 없는 나'에 대해 고민을 하긴 했다. 그럼에도 딱히 고치지 않고 한동안 그 지경으로 살았던 걸 보면 역시 생각 없이 사는 게 참 편하긴 했나 보다. 아주 좋게 말하면 착했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했다. 그때의 나는.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어렸을 땐 사람의 단점을 잘 못 봤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른 친구들이 한 친구의 어떤 점이 싫다고 했다. 다들 맞다며 이런저런 자기만의 경험을 꺼내기 시작했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 뒷담화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난 잘 모르겠는데, 걔가 그랬나. 그냥 듣고만 있다가 한 명이 "너는 잘 몰랐지?"하고 대뜸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응"하고 얼버무렸다. 그 "응"이 너무 소심했다. 그 이후로 나는 친구들이 싫다고 한 그 아이와 멀어졌다. 내가 먼저 거리를 뒀다. 내 친구들이 걔가 별로라고 했으니까. 걔랑 놀면 다른 친구들이 나도 싫어하게 될까 봐. 


    진짜 나쁜 애 아닌가? 걔는 갑자기 쌀쌀맞게 변한 내 모습에 얼마나 실망하고 상처를 받았을까. 크게 싸운 적도 없는데. 그냥 계속 친하게 지낼 걸. 더군다나 그때 뒷담을 했던 친구 몇몇은 지금 뭐 하고 사는지도 모르는데.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가 좋았지"라며 눈은 촉촉해지고 애틋한 행복함을 얼굴에 띄우곤 한다. 나도 함께 추억에 젖으려고 하면 꼭 그런 지난 못난 날이 떠올라 정신이 퍼뜩 든다. 내 기억엔 없는데 내가 준 것이 분명한 상처들이 많지는 않을까. 마음이 씁쓸해진다. 굳이 나쁜 마음을 먹어야 진짜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타임머신을 타든 타지 않든,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몇 번이고 과거의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4번이나 압축한 안경 렌즈가 얼마나 무거운 줄도 모른 채 해맑게 TV를 가까이서 봤을 거다. '와, 선배님.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정도의 춤 실력도 가지지 못했을 거다. 그 친구에겐 또 상처를 주고 우리 사이는 멀어졌을 거다. 단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했던 잘못된 말들에 대해 후회와 죄책감만 쌓였을 테다. 다만 믿을 수 있는 건 이 문장뿐.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의 나는 예전에 내가 바랐던 사람과 많이 닮지는 않았다.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고, 돈도 많지는 않고 (어떻게 로또는 사는 족족 꽝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내가 잘하는 일에 대해선 확신보단 의심이 더 크다. 아마 어린 내가 안다면 대성통곡을 할 텐데, 잘생긴 남자친구도 없다. 대신 지금의 나는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여전히 어렵지만 뭔가가 '아닌' 상황에는 '아니'라고 말하려고 한다. 마음속에 있는 작은 죄책감들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예전의 실수를 받아들이고 또 다른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사람의 '한결같음'이 미덕 중 하나라지만 변하지 않고서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변했고, 변하고 있고, 변할 것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이 정도면 2007년의 나는 2021년의 나를 자랑스러워해 줄 수 있을까. 


    그래 한 번 타보자, 타임머신. 타고 날아가 2007년의 어느 날에 도착한다. 노을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방과 후의 운동장. 보충 수업을 빼먹고 (역시 춤 학원을 안 다녔어도 서울대는 못 갔을 인물이다) 몰래 도망가는 어린 나를 불러 잡는다. "나는 미래의 너야!" 하고 자초지종을 말해본다. 어린 나는 당황해도 일단은 이 이상한 사람의 말을 들을 거다. 비록 속으로는 '진짜 나라면 저 쌍꺼풀은 언제 생긴 거지'하고 의심만 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말해줄 거다. "모든 게 다 잘 되어가고 있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네 생각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야." 믿어줄까? 믿어줬으면, 지금의 나를 자랑스러운 것까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좋아해 줬으면.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의 선곡: 사샤 슬로운, High School Me

https://youtu.be/a59jsCSkZqg


"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그때의 나는 분명 나를 자랑스러워할 거야."라는 가사가 귀에 콕 박혀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되었다. 참 좋아하는 아티스트인 사샤 슬로운. (이 노래는 나의 글과는 다른 이야기이지만) 공감이 가는 가사 덕분인지 그의 음악을 들으면 매번 내 이야기도 주절주절 꺼내놓고 한참을 쓰게 된다. 지긋지긋한 판데믹이 지나가면 한국에서 꼭 만날 수 있기를!




* 테드 창, 김상훈 옮김,「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숨』, 엘리, 2019. 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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